* 효심으로 울린 돌종 *
모량리에는 손순(孫順)이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당시는 많은 변혁이 있었지만 백성 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가난의 역경을 이겨야만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손순도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연명하기 조차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 학산(鶴山)은 학자다운 가풍으로 살았기에 가세는 펴질 날이 없었는데 그 아버지마저 죽게 되자 손순은 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어머니 운오(運烏)를 모시고 아내와 어린 자식과 함께 그날그날을 연명해 가기 시작했다.
손순 내외는 날품팔이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동냥하듯 곡식 한 줌을 얻어 오거나 음식을 얻어 가지고 와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철없는 자식이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음식을 먹는 동안 자식을 업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는데, 그러자면 죽을 작정으로 떼를 쓰고 울기 때문에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들에게 저 먹을 음식만 먹으라고 수십 번씩 타일러도, 자식은 제 것을 빨리 먹어치우고는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이었다.
손순 부부는 이럴 때마다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식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식의 배를 불릴 만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다.
"저 자식을 죽일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겠소?"
"자식이야 언젠가 또 얻을 수도 있지마는 어머니는 한번 가시면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는데,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굶주려 병이라도 걸리거나 그로 인해 돌아가시면 어찌하겠소."
"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매장합시다. 지금 우리 능력으로 어머니 한 분의 생명을 지켜 가기도 어려운데 두 생명을 지키려다가 둘 다 잃고 말 지경이니 자식은 잊읍시다."
"가슴이 아프지만 부모와 자식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할 지경이라면 마땅히 부모를 남겨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손순 부부는 밤새 부둥켜안고 울다가 할 수 없이 자식을 등에 업고 괭이를 들쳐 메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량리, 서쪽에 있는 취산(醉山)으로 들어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동안 파 들어가는데 괭이로 내리치면 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 파보았더니 돌종 하나가 나왔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오."
그들이 돌종을 올려 두들겨 보니 소리가 그윽하게 울리는 것이 매우 신비스럽기 만했다.
"이렇게 이상은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 듯하다 묻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넓은 땅에서 석종을 얻었는데 어찌 자식을 묻을 수가 있겠소. 집으로 내려갑시다."
손순은 돌종을 지고, 아내는 아이를 업고 산길을 내려오며 돌 종소리만큼이나 가슴을 울렸다. 죽을 뻔 한 자식을 다시 업고 내려오자니 묻으러갈 때보다 설움이 더 깊었다.
손순은 석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멀면 멀수록 더욱더 울려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은은한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는데, 그 여운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흥덕왕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참으로 오묘한 소리로다."
왕은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갔다.
"서쪽 성 밖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맑고 멀리 들리니 필시 보통 종이 아닐 것이다. 어서 가서 알아보도록 하라."
왕의 사자가 손순의 집에 달려가 알아보고 그 사실을 흥덕왕에게 사뢰었다.
"옛날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곽거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자 땅에서 돌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로다."
옛날 중국의 한나라에 곽거라는 사람이 있었다. 효성이 지극한 곽거는 어머니의 음식을 자식에게 빼앗기자 아내와 의논하여 자식을 묻기로 했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마는 부모는 한번 잃으면 영원히 모실 수 없으니 그 아들을 땅에 묻어버리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땅을 석 자 가량 파 들어갔더니 황금 솥 한 개가 나왔는데, 솥 위에는 붉은 글씨로 '하늘이 곽거에게 준다'고 쓰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로 인해 손순의 효행은 널리 소문이 퍼졌다.
과연 부모와 자식 중에 하나를 버릴 지경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서로 묻고 의논하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르치고 깨우쳤다.
흥덕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상으로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가 얼마나 장한가를 표창함으로써 귀감이 되게 하였다.
손순의 효행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시주를 해왔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모두를 그에게 다 상으로 돌려주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손순은 자기의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홍효사(弘孝寺)라하고 그 돌종을 매달아 오는 사람마다 치게 함으로써 마음에 잠든 효행심이 은은하게 울려나도록 했다.
훗날 사람들은 돌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고 했는데 잘못 전하여 삼국유사가 쓰일 당시에는 지량평(枝良坪)이라고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출처:삼국유사)
개심사심검당(開心寺尋劍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신창리) )
심검당은 건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지은 시기를 알 수 없고 단지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인데 건물 왼쪽에 앞면 3칸·옆면 5칸 규모의 덧집이 붙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개심사영산회괘불탱(開心寺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6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개심사 (신창리))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화면 중앙에 서 있으며 둥근 얼굴, 비대한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옷에는 둥글고 변형된 덩굴무늬가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고, 석가모니불 뒤의 광배에는 모란 줄기와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석가의 머리 주변엔 7구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으며, 옆으로는 2구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석가를 협시하고 앉아 있다. 석가의 몸통 주변에는 8구의 화불이 좌우로 앉아 있으며 맨 아래 부근에는 2구의 제석천과 범천이 손을 모은 자세로 석가를 향해 서 있다.
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