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보니 전쟁터, 서열 꼴찌 새끼 원숭이.'
「토크 마카크 원숭이 암컷인 그렘린을 소개합니다. 태어난 지 9주밖에 안 돼서 작고 연약합니다. 그렘린에게 자연은 위험한 곳이죠. 무서운 포식자들도 있고, 무리 안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다른 무리가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죠. 새끼 원숭이의 셋 중 한 마리는 생후 1년을 못 넘기고 죽습니다. 그렘린은 배울 게 많습니다. 그것도 서둘러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부터 그렘린을 만나 보시죠.」
매주 오후 5시 30분, 목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나면 여지없이 보던 동물의 왕국. 방송에서는 토크마카크 원숭이 '그렘린'을 소개했다. 그렘린의 모습은 흡사 '도태위기에 놓인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 어찌 보면 동물의 세계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질 일들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동물과 인간에게는 공통적인 면이 있다. 이 둘의 가장 큰 특징은 집단이 생기면 강한 개채, 약한 개채로 나눈다. 강한 개체는 약한 개체를 무리로부터 떠밀고, 약한 개체는 그 무리에서 도태된다. 날 수 있는 힘을 잃고 외딴곳에 정체되어 갈 길을 잃은 기러기들, 남극과 북극 이동 중 동상이 걸려 떨어져 나온 펭귄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도태된 동물이 다시 무리에 합류할 확률은 실질적으로도 매우 낮다. 대개 그대로 굶거나 얼어 죽는다. 이처럼 '동물의 세계'는 무서울 정도로 참혹하고 냉정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류사회 또한, 동물의 왕국이나 다름없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두 번 다녔다.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점과 학습능력이 부진해서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해 혼자 유급했다.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일부 보육 선생님들한테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매번 성적이 좋지 못해 호된 꾸중을 듣기도 했다.
내 IQ는 다른 평균의 아이들보다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학습을 하면서 산만했고, 집중력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보편적으로 뒤떨어졌다. 한 가지 맡은 일을 시키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로 다른 일을 해서 어른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제멋대로인 녀석으로 혼나기 십상이었다. 한곳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미있는 일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 맡은 일을 해야 마음이 편했다. 선생님께 이쁨 받는 은혜 갚은 두꺼비로 불리지 않았고, 청개구리로 불렸다. 늘 반대로 행동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고 새로운 문물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지나친 행복감을 느꼈다.
통상적으로 보았을 때, 한 학급마다 한 두 명가량의 학생 성적은 평균적으로 부진한 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해서 학습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격변하는 외부 자극에 의해 정서가 불안해지고 뇌의 성장이 더뎌져 방황해서 그렇다. 학교 내부의 부조리나 가정의 폭력으로 정서가 엉망으로 망가졌기 때문이다. 학습능력이 부진한 학생들 대부분은 가정이나 외부적 사건의 일환에 의해 신체적 상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비사회적인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인다. 평균적인 틀에 맞지 않는 행동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상처라는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에서 유래된 말이다. 일반적인 의학용어로 외상을 뜻한다. 심리학에서는 정신적인 외상 충격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심리적 용어의 의미를 담은 단어로 사용된다.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경우가 극히 많으며 이러한 이미지가 장기기억된다는 특징이 있다. 트라우마의 예로,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불안해지거나 심한 감정적 동요를 들 수 있다.
소외를 자주 경험한 아이들은 정서적 외상의 피해로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소정의 시간이 지나도 트라우마로 생긴 고통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잊지 못한다. 따라서 어른은 자녀에게 유년기 시절에 좋은 기억을 특히 많이 심어주는 것이 좋다.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성이 좋은 아이는 어른이 되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한 일을 찾아간다. 좋은 경험을 많이 해야 독립심이 자연스레 길러지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가 정한 선택에 책임을 질 줄도 알게 된다. 이처럼 경험이 풍부한 아이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에 따른 위험도 감수하는 노력을 한다.
그런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른의 배움이 시급하다. 모든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부모로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어른이라면 가장 먼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방법들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필수의 덕목이다.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창의적인 놀이와 행동인지치료 및 심리치료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일상에 녹아들도록 적극적으로 나서고 도와주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이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은 어른으로써 올바른 결정이면서도 어른이 아이를 통해 사회성을 배우는 또 다른 배움의 기로이기도 하다.
생활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나는 다음 친구들이 오길 기다렸다. 삼촌이 사주신 합체로봇을 꼭 끌어안으면서 창문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유리 박힌 청록색 철문을 통해 이전에 담당하셨던 엄마 수녀님이 말했다.
"새로운 수녀님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이따가 더 좋은 친구들 만나게 될 거야."
물고기 미끼 물듯 수녀님의 마지막 인사를 덥석 받아냈다. 잠시 후, 다른 친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앉아 떨던 불안한 내 눈빛은 창문에서 떼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이제 막 올라온 친구들은 침대에 혼자 앉아 있는 내가 신기한 듯 창문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방에 입실한 애들은 장판에 병아리 같은 샛노란 가방을 내려놓고 점잖은 어르신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장판은 금세 또래 아이들로 가득 찼다. 침대에 덩그러니 앉은 나를 포함해 생활실에 있던 아이들은 총 24명이었다. 생활반 담당수녀님이 오시기 전에 어떤 애가 침대로 다가왔다. 걔는 우물쭈물 만지작거리던 합체로봇 장난감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거 누구 거야?"
'이것은 내 엄마가 준 소중한 물건이고 날 지켜줄 거야. 누구 거든 줄 수 없어.'라고 대담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소심이란 바다에서 용기란 섬으로 방향을 가리킬 직시란 나침반이 없었기에. 그저 속으로만 대꾸했다. 속으로만. 노랗고 파랗고 녹색인, 그리고 붉은 다섯 마리의 육식동물들이 합쳐진 백수왕 고라이온(볼트론)의 고개가 머쓱한 듯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내 거야!"
누가 모를까? 엉겁결에 목소리가 크게 나와버렸다. 로봇에 올라간 친구의 손을 올려쳤더니 얼굴이 빨개진 녀석은 눈에 힘을 주었다. 약간의 정적이 끝내 주먹다툼으로 번졌다. 처음 보는 애와 갑자기 주먹다툼이라니, 전재산이 빼앗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발악을 하던 중 얼굴에 작은 상처가 났다. 긴장감을 놓다가 더 맞을세라 적개심은 놓지 않았다. 볼 한쪽에 손을 대어보니 군대라면이 담긴 봉투 아래처럼 울긋게 부었고 얼얼했다. 손톱에 긁힌 자국이 만져졌다. 작은 생채기 위로 피가 찔끔 솟았다. 피카소가 보았다면 예술, 내가 바라본 건 피꺼솟이었다. 주먹 같은 붓질로 탄생시킨 첫 작품 치고는 훌륭했다. 녀석의 손을 세게 내친 이유는 장난감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애착이 떨어져 나갈까 봐 반사적으로 자율신경이 반응해 방어기제가 발동했던 걸로 유추한다. 결국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울면서 수녀님이 어서 오기를 바랐다. 발소리가 가까워졌고 새로 온 수녀님이 창문을 열고 호통을 쳤다.
"누가 첫날부터 싸우니?!"
수녀님의 어조는 너무 화나지 않은 것 같았다. 끝말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1년 일찍 생활한 노하우로 '진짜 분노'의 억양을 간파했던 것이었다. 수녀님은 생활실로 들어와 눈곱만 한 상처가 난 내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어유~ 상처 난 것 좀 봐. 싸우면 뭐가 좋다고. 응?"
그렇다. 싸워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수녀님의 따뜻한 위안을 듣고 나니 문득 양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래서인지 처음 보는 수녀님에게 남모를 애정이 갔다. 엄마수녀님은 호통을 칠 때엔 너무 무서웠지만 평화로울 땐 안정감이 피부로 잔잔히 느껴졌다. 긴장이 와해되어 생성된 세로토닌이 혈관도로를 타고 흘러들어 가 심장과 꽁냥 거리기를 유지했다.
가족관계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가 존재한다. 이 보육원은 수녀님과 생활자들 간의 '가족적인 연대'가 존재했다. 이곳에서 보호를 받는 스물네 명의 아이들은 수녀님의 영속적인 특별한 자녀가 되었다.
친구와 싸움이 일어날 때 불리해지면 '엄마 수녀님'께 일러바치는 확성기의 역할은 남이 시키지 않아도 도맡는 일이 되었고, 그때 생긴 별명이 '마마보이'였다.
우리가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건 간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고뭉치는 이곳에서 생활자로 생활하고 있는 대부분이 그랬다.
결핍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곳. 편부모 가정에 소속된 아이, 학대받거나 폭력을 당한 아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모여 수녀님을 엄마로 가정을 이루는 특별한 곳이었다. 서로의 CCTV, 때로는 눈이 되어주는 나는 '마마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