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_작품의 구성무시(構成無視)
-분야: 어문 > 수필 > 중수필/평론
-저작자: 계용묵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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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소설은 종래의 구성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한 틀을 시험하면서 성공하고 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가 그것이요 조이스의 「율리시스」, 프루스트의 「잃어진 때를 찾아서」, 그리고 이번 대전 후 싸르트르의 「자유에의 길」들이 현저한 것으로 이들 작품은 20세기 신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논의가 되어 옴과 동시에 그 영향은 세계 문단의 구석구석에까지 파급이 되면서 있다.
이 여파는 우리 문단에도 파급이 되었다. 일부의 작가 층에서 소설 구성의 무시설(無視說)이 대두되고 또 그것을 실제로 이 구성 무시를 작품에서 시도하는 층도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의 작품에 나타난 무시된 구성에는 자못 수긍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그것은 전연한 구성 무시요, 구성을 위한 무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20세기 문학의 대표자인 릴케들이 고집한 구성 무시는 17세기 고전주의 시대부터 세밀하게 인간의 심리 갈등을 분석하는 것으로 소설의 사명이 다하는 것 같은 내용에다 그 어떤 한 일정한 틀을 부여하는 것을 절대 조건을 고집해 온, 예를 들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같은 그런 구성법이요, 구성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그들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구성을 무시한 작품들이 어찌하여 구성이 무시되었던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문단의 구성 무시에 대한 작품의 논의를 삼고자 한다.
가장 대담히 구성이 무시된 특출한 작품으로는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들어야겠다.
이것은 누구나 아다시피 말테라는 한 청년 작가가 유고로서 남긴, 단편적인 감상, 비망 노트, 과거의 추상, 일기, 쓰다 버린 편지 조각, 면전의 풍경 묘사들을 아무렇게나 순서도 없이 모아 놓은 것으로, 이 작품의 구성에 대하여 작자 자신이 말하기를,
“이런 소설은 예술적으로 본다면 되잖은 흠 투성인 구성에 틀림없을 것이나, 직접 인간적인 것에 접촉하기 위하여서는 결국 용허(容許)될 형성일는지도 모른다.”
고 하였다.
이것은 구성을 무시하였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것에 접촉하기 위하여서는 이렇게 구성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는 새로운 구성을, 즉 무구성의 구성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당연한 것이, 그 작품이 주는 감명이 이렇게 해석을 하게 만든다.
구성이란 결국 작품의 효과를 노리는 한 건축 방법이므로 소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서는 구성에 그 어떤 틀이 있고, 그 틀에 구애를 받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자유스러운 구성이어야 할 것을 대담하게 시험한 것이라고 보겠다.
말하자면 이 수법은 종래의 소설이 그 원인 결과의 방법에 좇아서 진행을 시키는 작위적인 시간 질서를 깨쳐 버림으로 새로운 구성을 구성하였을 뿐인 것이다. 이 구성은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는 영혼의 심연을 파헤치기 위하여서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말하자면 종래의 구성법으로서는 인간의 진실상을 묘파할 수 없는 데서 건조된 구성이었다.
조이스가 「율리시스」에서 기술법을 채택하여 묘사를 열거 식으로 한 것이나, 또는 희곡체, 시나리오 들을 이용하고, 신문의 제목과 그 문체를 그대로 흉내내므로 장마다 특별한 취미를 그 문체에서 북돋으려고 하는 새로운 시험으로서의 구성 무시나 프루스트의 「잃어진 때를 찾아서」에서, 우연한 한 사건을 제시하고, 갑자기 과거의 모든 것을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회상 방법의 채택이나, 작중 인물이 작품의 줄거리와 진행에 거리낌 없이 자기의 의식의 흐름을 토로시키는 소위 내적 독백 같은 방법을 채택하므로 종래의 구성법을 무시한 이들 새로운 구성은 즉, 무구성의 구성은 역시 인간의 진실상을 묘파하기 위한 데서였다. 이들 작품이 그 어떤 새로운 대상이 없이 무리하게 무시한 구성은 모두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는 가옥의 건축에 비해 본다면, 종래의 건축하던 판에 박은 듯한 가옥의 건축 방법 그것이 아니면 가옥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인간으로서의 생활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사고도 없이 가옥을 건축한다면 그저 그 식대로 안방이 두 칸, 건넌방이 한 칸, 마루가 간반, 부엌을 안방 옆에 달고 대문은 행랑방 옆에 달아서 ‘ㄱ’자로 집을 꺾고 기와를 올려야 하는 그런 건축 방식에서 보다 생활적으로 편하게,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참으로의 인간 본위로 통풍 채광까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설계를 한 건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건축을 하는 가옥도 설계 그것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고 건축 그것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판에 박은 기와집은 17세기 이래의 소설의 구성 방법이라고 한다면 종래의 구성을 무시한 소설은 기와집의 건축 방법을 무시한 인간의 보다 나은 생활을 그리고 생명을 위한 양옥이거나 2층, 3층, 내지 5층, 10층의 신양식의 건조법에서의 구성이오, 결코 구성 그것이 무시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 이것을 끝으로 좀 더 자세하게 20세기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무시하는 구성과 우리 문단의 작품에 나타난 무시된 구성을 역시 가옥의 건축법에서 지적하여 그 가옥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볼 절차에 이르렀다.
여기 폐병 청년이 생사의 막다른 골목에서 허덕이며 공기와 채광이 불충분한 재래식 가옥에 누워서 피를 토하고 있다고 하자. 그리하여 이 청년을 살리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볕이 바른 양지쪽의 산경(山傾)에다 통풍과 채광이 충분히 되게 유리집을 짓고 그 안에서 치료를 받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들 대표작 작품은 폐병 청년을 살리기 위하여 유리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이래도 좋았다. 병의 치료를 위한 집이라면 모양을 볼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우리 문단의 구성 무시의 작품도 그 폐병 청년을 구하기 위하여 단연히 재래식의 기와집에서 환자를 풀어내오므로, 재래의 구성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끌어내었을 뿐 유리집의 건축이 없었기 때문에 한지(寒地)에서 배회를 하는 것 같은 감이 불무하다. 그리하여 그 결과가 빚어낼 것은, 통풍 채광은 시원치 못할망정, 그 재래식의 기와집에 그대로 누워서 치료를 받느니보다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더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초하게 된 것은 오직 이 한마디가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발표지〕《새벽》(1955. 3.)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