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1
2월4일[연중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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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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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dZJicjWu4I (한덕훈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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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사도 공동체의 모습은 묵상할 때 마다 감동적입니다..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돈보스코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돈보스코 시대 당시 역시 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대 변혁의 시대에 사람들은 교회로 부터 매력을 잃고 떠나갔습니다. 그런 어려운 시대 주님께서는 돈보스코를 선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절정기 시절, 발길 닿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신자들, 청소년들, 특히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의 낡은 수단 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가 지니고 있었던 매력은 탁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짙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많은 청소년들은 그와 함께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꺼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떼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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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쉬면 도움이 되고 쉬지 못하면 짐이 된다>
활기 왕성한 20대 초반 겨울에 성당 청년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간 적이 있습니다. 2박3일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을 정상까지 뛰어서라도 올라갈 기세였기 때문에 남들의 짐까지 짊어지고 쌍계사에서 뱀사골까지 거뜬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틀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남에게 내 짐까지 맡기고 끝에 쳐져 한쪽 발을 질질 끌며 쫓아가야 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기다려줘야 했던 이들이 이젠 저를 기다려줘야 했습니다. 그때 왜 산에 오르면 겸손해진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일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리고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하는 이들은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버는 것처럼 쉬는 날을 마련해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하면 오래 못 버팁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읽으며 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사제들이 좀 더 본당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십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피정하라’는 뜻입니다.
현재 교구사제의 연중피정은 길어야 5일입니다. 그것도 저녁에 들어와서 오전만 하고 가니 실제로는 3일 정도라 하겠습니다. 일 년에 3일 피정! 교황청에서 정한 피정기간은 일 년에 10일입니다.
그리고 피정에 들어가서도 강의를 듣고 전례를 공동으로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피정은 본래 광야에서 나 혼자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광야에서 하신 일이 피정입니다.
광야에서는 미사도 성경 읽는 것도 강의 듣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 대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침묵 중에 주님과만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피정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정기간이 짧은 데는 신자들의 영향도 매우 큽니다. 평일미사를 빠치면 개중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많은 신자들이 제자들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제자들의 피정을 방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직접 그들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들이 없어 목말라 하는 수준의 신자들은 이미 주님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오른 이들입니다. 목자들이 피정할 때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스미르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카르포스 교부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카르포스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인이라 불리시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카르포스는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자들이 쉴 시간이 부족하면 오히려 양들에게 피해가 갑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목자들에게 쉴 시간을 충분히 할애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더 많이 쉬어 보다 생기 있는 영으로 신자들을 대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너무 바쁘게 사목하셔서 지쳐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외국은 피정기간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요 휴가도 일 년에 거의 1달이고 7년을 일하면 1년은 안식년을 합니다.
그러나 저희 교구 같은 경우는 평생 1번만 안식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사제들에게 조금 더 쉬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신자들이 본당 신부님이 피곤하신 것을 보면 평일에는 우리가 공소예절이라도 하며 지낼 터이니 일주일 동안 조용하게 피정하며 쉬고 오시라고 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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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엠이 부부들과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형제님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안내를 오래 했지만 이렇게 형제님들이 많은 순례단은 처음 봅니다.” 그동안 순례를 오면 대부분이 자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40명이 순례를 왔는데 남자는 신부님 포함 2명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는 자매님보다 형제님이 더 많은 유일한 순례라고 합니다. 10부부에 사제인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르즈나 골프 모임에는 형제님들이 많은 편인데 성지순례에는 형제님들이 적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에 형제님들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기에 형제님들이 기꺼이 자매님을 위해서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성지순례의 기쁨을 잘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기도합니다. 형제님들에게 우선순위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운동과 취미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순례를 함께 하면서 형제님들이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많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들의 우선순위에 성지순례가 맨 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지 않고, 우선순위에 성지순례를 먼저 놓았던 형제님들과 함께 했던 성지순례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성지순례를 하는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성지순례 첫날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당엘 갔는데 그 성당에서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 참례에 앞서 부부들은 혼배미사를 드린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부가 축복을 주었기에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곳에서 혼배미사를 볼 수 있었던 부부들도 혼인의 첫날을 생각하며 부부의 사랑을 새삼 확인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22년 전에 서품 10주년 기념으로 동창신부님들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젊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힘과 열정은 있었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동창들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 우선순위가 아니라 성지순례로 포장된 동창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22년 시간이 흘러 엠이 부부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니 피정을 겸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1521년 스페인은 신대륙으로 왔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과 대포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총과 대포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을 주교님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주교님에게 전하였지만 주교님은 배우지 못한 원주민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성모님의 메시지가 맞는다면 ‘증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께 주교님의 이야기를 전하였고, 성모님은 장미꽃을 주교님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12월의 장미는 있을 수 없지만 후안 디에고는 가지고 있던 틸마에 장미를 담아 주교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주교님께 장미를 드리는 순간 틸마에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지는 ‘표징’이 일어났습니다. 주교님께서 요구하는 증표를 성모님께서는 성화라는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에는 현대과학의 힘으로는 규명하기 힘든 표징들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틸마는 선인장으로 만들었는데 길어도 20년이면 삭아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곧 500년이 되는데 아직도 틸마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도 순례 중에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았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색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도료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사의 과학자들이 광학 현미경으로 2000배 이상 확대해서 성모님의 눈을 보았더니 그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표징이 있는 것도 신앙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후안 디에고의 뜨거운 신앙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후안 디에고의 말을 믿고 따른 주교님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열매를 맺어서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토착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총과 대포로는 열수 없었던 마음을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4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보호자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멕시코 인들에게 일생에 한번 쯤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멕시코 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22년 전 성지순례에도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저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시금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따로 부르셔서 엠이부부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저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제게 주어진 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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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주님 안에서는 항상 휴식이란 없음을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 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활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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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외딴곳으로”라는 표현이 두 번 거듭 나옵니다(31절과 32절).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 뜻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며 일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셨고, 그들과 함께 따로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잠시 군중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장면이 때때로 나오는데, 그 다음에는 언제나 중요한 계시가 이어집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낫게 해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7,33 참조). 당신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9,2 참조).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곳도 군중과 따로 떨어진 한적한 집입니다.(9,28 참조)
교회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활동과 애덕을 실천하는 데는 신자들의 많은 노력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저마다의 열정과 열의로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자칫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잃을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 인간적인 기준을 따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활동이 개인의 선호와 관심에 따라 흘러가기도 합니다. 제자는 언제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시 돌아와 그분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계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따로 한적한 곳에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믿는 이의 삶은 넓게 보면 주님께 바치는 한 편의 기도이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이 모든 것 안에 주님과 함께 머무는 침묵의 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집착과 열망에 따른 것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당을 찾는 모든 신자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 머물면서 삶의 방향을 찾고 그분의 양식으로 힘을 얻는 ‘외딴곳’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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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또 신부님]
<인간에 대해 측으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삶을 살자>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갓 신부가 되고, 성당의 소임을 받고 살아가던 해에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긴 하지만 처음에 병원을 찾아가 뵈었을 때에는 휠체어에 의지하시고, 식사도 누가 떠 주어야하고, 혼자서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말도 어눌해지셨고요. 그러다가 퇴원하셔서 집에서 요양을 하십니다.
한번은 제가 강원도에 여행을 갔다가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강원도 찰옥수수를 한 자루 사가지고 고향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아서 겨우 걸음을 떼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와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독 때문에 피곤했는지 저는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오랜만에 한 단잠이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조금 어둑어둑해 있었습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섬주섬 챙겨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무언가를 바구니에 담아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바로 제가 가지고 온 옥수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오랜만에 먼곳에서 온 자식에게 밥 한 끼 해먹이는 것이 애미의 도리일 텐데, 몸이 이 지경이니 어떻하니. 그래서 내가 옥수수를 삶아 왔으니까 이거라도 먹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두세 시간 동안 잠든 사이에 중풍의 어머니께서 그래도 자식에게 밥은 못해주더라도 옥수수라도 삶아서 끼니를 채워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중풍으로 못쓰는 손발이지만 낑낑거리며 그 오랜 시간 동안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그리고 수염도 뽑아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어놓은 것입니다. 어머니 앞에서는 그저 맛 있게 먹었지만, 돌아오는 차 속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런 불편한 어머니를 이끌고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의 힘이 위대함을 그리고 자식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또 한 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가 봅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보낸 것이 바로 엄마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서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도 싶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또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떤 일로서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서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셨다는 것, 그들의 아픔이 눈에 밟혀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아픔과 어려움이 눈에 밟혀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신 분이 바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느끼시는 가장 첫 마음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바로 측은함입니다. 그런 측은한 마음이 우리의 예수님을 바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신이신 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시고, 우리들 죄의 아픔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픔을 찾아다니시고, 우리의 모자란 한계 때문에 그 전지전능하신 신이 바로 십자가에서 아주 나약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측은함이 우리의 주님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저 심판하고, 벌주고,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저 화석같은 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 아파하고, 또 우리의 죄를 함께 짊어지신 분임을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구원의 역사는 거기에서 시작되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보잘 것 없는 삶 가운데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어떤 거대한 힘을 기대하고 기적을 바라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을 아는 우리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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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종민 마테오 신부님]
어떤 자매님이 남편을 두고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우리 마태오씨에게 좀 언행일치를 하면서 살라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行(행)은 되는데, 言(언)이 참 험합니다.
보통 言行一致(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말만 앞서고 행동은 뒤따르지 않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자매님의 말씀에 따르면 남편의 행동은 올바른데 말이 험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행동이 올바른 것처럼 말도 고운말 바른말을 했으면 하는 것이 자매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요한 10,11)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을 보시고 착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사도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예수님과 사도들은 군중들을 떠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을 가만이 두지 않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가 있었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온 사람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온 양들입니다. 잠시 쉬며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예수님은 그들을 귀잖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엾게 여기시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름답고 일치된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들려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사랑합니다.
이런 우리의 사랑을 예수님 앞에 표현함으로써 응답해야 합니다. 일치된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우리 또한 일치된 말과 행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양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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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의 명성과 권위를 맛본 제자들은 불철주야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쉼 없이 일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전부를 걸고 나선 제자들이 그 정도의 열정 없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분주하게 일하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잊을 때가 있습니다.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확인해 주지만, 때로 인간이 노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규율 사회와는 달리 긍정성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피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할 것이 너무 많고, 좋은 것이 넘쳐도 우리는 선택 장애를 겪고,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누려야 할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와 기쁨이 일과 노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송과 환대가 넘치는 곳을 떠나 ‘외딴곳’으로 가서 쉴 것을 명하십니다. 마치 예수님 자신이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아 칭호를 받을 때, 언제나 산속 깊은 외딴곳에 가시어 하느님을 만나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제물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잃을 수 있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되찾고자 욕망의 나를 벗어던진 참된 나를 찾고,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가엾은 마음’을 닮아, 참된 선행과 나눔의 가치를 찾아가는 ‘인생 피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처럼, 나에게도 주님 안에서 아쉬움 없는 쉼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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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딴곳에서>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외딴곳에서>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 위하여
더욱 정성껏
함께하기 위하여
때로는 홀로 머물며
스스로를 돌보러
꿀맛 같은 쉼 있는
외딴곳으로 가야 하리니
그리 찾은
어느 외딴곳에서
사랑이 간절한
누군가를 만나거든
그 사람 물리쳐
다른 외딴곳 찾지 않고
지금 머문 외딴곳에서
그저 아낌없이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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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그분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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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친구와 전화하는 이런 대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보세요?”, “응, 너구나. 요즘 어떻게 지내니?” “좋아, 넌 어때?”, “사실 엉망진창이야.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글쎄 암이라는 거야.” “그래? 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설마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현대인에게 이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어린 학생들과 노래방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면서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신부님이 먼저 한 곡 불러주세요.” 노래를 선곡해서 부르는 데, 아무도 제 노래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노래를 선곡하느라 바빴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왜 부르고 있는가 싶어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마이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 뒤 노래를 부르기보다 열심히 학생들의 노래를 들어주었고 열심히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남이 노래를 들어주지 않으면 굳이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만 노래 부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도 그랬던 것일까요? 들어주지 않는 말의 홍수 속에서 외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한 말만 기억나고, 남이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내가 말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관계를 더 좋게 하시려고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신 우리의 말을, 어떤 말이든 상관없이 모두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에는 늘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요구사항의 말을 가지고 있었지요. 육체적인 아픔을 해결해달라는 말, 마귀를 쫓아 달라는 말, 영적 부족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 그 밖의 많은 청원의 말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가엾은 마음, 바로 사랑하는 마음에 그들의 모든 말들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말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처럼, 나의 이웃과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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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년 02월 04일 - 연중 4주 토요일
<일용할 양식, 마음의 양식, 영혼의 양식>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 대부분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은 아니더라도 서러움 같은 것이 있었는데 가난의 서러움과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었지요. 아주 부잣집이 아닌 한 두 가지 서러움이 대부분 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가난하니 공부하지 말고 일하라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아무리 가난하고 그래서 굶주려도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시키는 부모가 있었지요.
특히 농번기가 되면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부모는 아무리 바빠도 학교 가게 하지만, 일을 시키려는 부모는 이렇게 바쁜데 무슨 공부냐고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지요.
그래서 공부를 정말 하고 싶어 한 자식들은 이런 부모 때문에 서러움이 더 컸고, 부모가 공부시키지 않으면 내가 벌어서라도 공부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하곤 했지요.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면 어떤 것이 더 서러움이고 어떤 것이 더 가여움입니까? 가난한 것이 더 가엾고 서럽습니까? 못 배운 것이 더 가엾고 서럽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빠져 있지만 이어지는 마르코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내용이 이어서 나오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둘 다 가엾게 보셨지만, 굶주린 군중보다 목자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가르침을 받지 못한 군중이 더 가여웠고, 그래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군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군중은 가방끈이 짧았고 지도자들 가운데는 참스승이 없었으며, 그래서 주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셨다고 했는데 지식을 많이 가르쳐주셨을까요?
목자가 없다는 것은, 지식을 많이 넣어주는 스승이 없다는 것과 다른 뜻입니다. 목자가 없다는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넣어줄 스승이 없다는 뜻일 것이고, 지혜도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지혜일 것입니다.
사실 스승도 이끄는 존재지만 목자는 양 떼를 생명의 땅 곧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존재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것의 의미는, 군중을 배불리 먹여 육신 생명을 잘 살게 하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시고 그곳으로 인도하시고자 함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할 때도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청하고, 마음의 양식을 청하는 것도 좋지만, 영혼의 양식을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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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외딴곳-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시편 23,1-3ㄱ)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오늘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오늘 복음의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외딴곳 성전에서의 미사전례입니다.
새옷을 입으면 마음이 새롭고 기분이 좋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새날이자 새하늘, 새땅입니다. 오늘 2월4일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고 내일은 연중 제5주일이자 정월대보름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오늘 입춘날 대문에 많이 써붙이는 문구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입춘대길은 조선시대 남인의 거두 허목이, 건양다경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만들었다 합니다.
매월 첫주 금요일 고백성사 보는 날이 참 좋습니다. 날마다의 미사 역시 좋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을 상징하는 고백성사요 성전미사입니다. 불행중의 불행이 주님을 잊고 사는 것이요 자기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궁극의 삶의 의미,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인,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ㄱ)
어제의 화답송 시편 후렴은 바로 주님은 내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오늘의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주님은 내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얼마 전 은평성모병원에 갔을 때 시편 성구가 한눈에 들어왔고 감동했습니다. 주님만이 참된 치유자요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의사분들을 한없이 겸손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의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당신 백성 위에 당신의 복을 내려 주소서.”(시편 3,9)
우리가 외딴곳에 만나는 하느님은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히브리서는 끝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 말씀입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시니 우리는 감격에 벅차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빌게 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시는, 좋은 기도문은 늘 읽어도 새롭고 좋습니다. 제 행복기도도 그러합니다. 원래는 감사기도였다가 행복기도로 바꿨고 또 바꾼다면 예닮기도로 바꾸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기도요 예수님을 닮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호칭 다음에 “참회합니다”, “믿습니다”를 넣으니 대만족입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을 만나는 외딴곳이자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특히 "참회합니다" 고백하니 전존재가 깨끗해진 느낌이 듭니다. 외딴곳 쉼터에서 바치기에 참 좋은 기도문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파견派遣과 귀환歸還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파견되었던 제자들은 주님께 귀환하여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합니다. 귀환하여 외딴곳에서 주님과 깊은 친교와 기도시간으로 충전되면 제자들은 또 파견될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미사봉헌 후 다시 파견될 우리와 흡사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대로 주님의 사목적 배려입니다. 일에 중독되어 쉬지 못하는 것도 큰 병입니다. 그러니 때로 죄책감 없이 “노(NO)”라고 말하며 외딴곳의 쉼터를 마련하여 번아웃된 심신을 충전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일행이 외딴곳의 쉼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예수님 말씀에 굶주린 군중이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이 가엾은 마음에 들어 쉴 사이도 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빵에 앞서 말씀입니다. 말씀과 빵, 결코 이 순서가 바뀌어선 안됩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우선적으로, 근원적으로 말씀을 갈망하는 인간 영혼들입니다. 그러니 말씀으로 해갈되어야 할 영적 목마름이요, 말씀으로 충족되어야 할 영적 배고픔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에 이어 5천명을 배불리 먹인 빵의 기적입니다. 그대로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진 성체성사 미사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놀랍고 감사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만의 외딴곳이 아니라 배고파 모인 모든 군중들에게도 외딴곳이 주님과 함께하는 배움터이자 쉼터가 샘터가 되었고 모두 영육으로 충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외딴곳을 상징하는 성전 미사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참 좋은 선물이 미사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외딴곳의 쉼터이자 배움터이자 샘터인 이 거룩한 성전 미사를 통해 우리의 지친 영육을 치유 충전시키시어 세상 삶의 자리에 복음 선포자로 파견하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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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마르6,31)
<구원에 필요한 간절함!>
오늘 복음(마르6,30-34)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에 앞서, 사도들의 보고와 예수님께 몰려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많은 군중 때문에 음식을 먹고 쉴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끝까지 찾아 갈 태세입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들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을 향해 있던 간절한 마음, 그들의 이 간절한 마음이 그들의 발과 시선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군중의 모습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간절함'입니다. 믿고자 하는 간절함,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간절함,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부활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의 이 간절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간절한 마음이 있는 곳에 당신 자신도 함께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지도자들의 말을 잘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히브13,17)
나는 사목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히브리서의 이 말씀 안에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친목이 우선이 아닌 우리의 구원에 우선적 목적을 두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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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마르 6, 32)
외딴곳으로
떠나보내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외딴곳의 휴식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남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외딴곳의
기도와
휴식입니다.
외딴곳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쉬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더더욱
행복해야 합니다.
조용히
분주했던 일상을
내려놓고
휴식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아쉬움과
부족함까지
주님께 내어드리는
휴식입니다.
주님과 마주 앉을
나눔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도
휴식을 통해
내어줄 수 있을 때
더더욱 행복합니다.
외딴곳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더 뜨겁게
만납니다.
떠남이
만남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기쁜 만남은
이와 같이
쉬어가는
이들의 것입니다.
외딴곳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생활을
떠받치는
휴식입니다.
쓰러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휴식을 통해
찬미 받으소서!
더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도록
생명을 힘차게
불어넣어
주시는 외딴곳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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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故 맹상학 마르첼리노 신부님]
<내가 사랑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람처럼 홀연히 이 세상에 왔다가 구름처럼 하느님 품으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씀처럼 천년을 하루같이 사시는 그분 속으로 홀로 걸어 들어갑니다.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마음 때문에' 두렵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믿고 섬기고 사랑했던 그분을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마음 덕분에' 설렙니다.
사제는 '사랑에 빚진 자'라고 했죠. 하느님 사랑에 빚지고 부모님 사랑에 빚지고 세상 사람들 사랑에 빚만 진 한 사제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글을 남깁니다.
이 세상에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마리아! 불교도였던 어머니! 자식들이 사제품을 받지 못할까봐 낯선 종교에, 낯선 기도문, 낯선 세례명을 십자가처럼 평생 걸머진 사랑 많은 나의 어머니! 천주교 신부 되면 마누라 없이 평생 혼자 살아갈 것이 걱정되셔서 뒤돌아 눈물을 훔치시던 호수 같은 우리 어머니!
남편 요셉을 성요셉축일에 하늘로 먼저 보내시고 홀로 밤을 지새우셨던 어머니! 그래도 아버지 곁에 묏자리를 사놓으셨다고 죽어서도 남편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마냥 소녀처럼 행복해 하셨던 우리 어머니! 평생 쌓아둔 중압감을 못 이겨 중풍까지 끌어안고 휠체어에 앉아 홀로 집에서 수도자처럼 수행생활을 하고 계신 어머니 마리아!
어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지혜로운 며느리와 토끼 같은 손자ㆍ손녀를 품에 못 안겨드려서 미안합니다. 외로워하시는 어머니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간간이 드리는 용돈, 생활비로 스스로 아들 노릇 다했다고 자족했던 이 불효 자식을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어머니! 바람이 찹니다. 몸 건강하세요! 이제 둘째 아들, 둘째 신부(神父)는 먼저 떠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셔요! 언젠가 형님신부님이 아버지 장례미사 강론 때 이야기한 것처럼 어머니가 힘들 때마다 천사가 돼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 곁에 머무를 겁니다.
어머니가 외로울 때면 어머니 꿈속에 나타날게요. 우리 아주 가끔씩 꿀같은 데이트를 해요! 어머니 덕분에 이 아름다운 세상 잘 쉬다 갑니다.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하고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 엄니! 행복하세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주님 안에서….
제가 평생 섬겼던 주님은 아무 것도 없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제 사제관을 뒤져보면 남은 것이 많이 나올 겁니다. 하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교회가 허락한다면 화장해서 뿌려주십시오.
사제품을 받고 첫 사순시기 때 장기기증을 서약했습니다. 쓸 수 있는 장기는 필요한 사람에게 주시고 각막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선물해주십시오. 2명에게 각막을 선물 해줄 수 있다 해서 사제로 사는 동안 세상에 더러운 것보다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많이 많이 보려고 노력했으니, 제 각막을 갖게 되는 사람은 여생 동안 사랑스럽고 행복한 것만 바라보길 원합니다.
끝으로 행여 이 부족한 사제로 말미암아 상처 받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수행이 부족해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더 나누면서 살지 못하고, 더 용서하며 살지 못하고, 더 겸손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며 살지 못해서 나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교회의 종으로 살게 해주셔서…. 사는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하늘나라 가서 하늘 아버지 만나면 청하고픈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하느님 사제로 살고 싶습니다." (2023년 01월)
※ 맹상학 마르첼리노 신부님은 69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2023년 1월31일 선종하셨습니다. 위의 글은 선종하시기 며칠 전에 남긴 것입니다. 故 맹상학 마르첼리노 신부님의 평화로운 안식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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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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