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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라고 불렀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때 아브라함의 눈에 보인 것은 세 사람이었다. 즉시 그들에게 달려나가 몸을 땅에 굽히고 '주여'라고 부르며 자신을 종이라 칭하며 스스로 낮추었다. 종이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종이라고 칭하며 주라고 부르는 것은 최상의 존대일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보고 맞이한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을 맞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부르는 '주'의 히브리어 뜻은 '인간의 또는 신적인 의미에서의 주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체의 주인을 의미할 수도 있고 영혼의 주인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부른 '주'의 의미는 영의 주인이라기 보다는 육신의 주인을 의미하며 스스로를 낮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고 하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을까? '나타나다'의 히브리어 의미는 '경험하다, 증명되다' 등의 뜻이므로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사람들로 인해 여호와께서 경험되어지고 증명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창18:1-3)
2 히브리 기자는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세사람에게 '주'라고 부른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정확히 이렇게 행한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 하듯 아브라함은 정성을 다했고 그 상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골3:23)
또한 히브리 기자는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롯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은 여호와라고 말하는데 왜 히브리서에서는 천사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해석하기 어려워한다. 또는 몸으로 오신 예슈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 기자는 분명하게 천사라고 말하고 있다. '천사'의 헬라어 뜻은 '사자, 천사, 목사'등의 의미이다. 또한 히브리어 뜻은 '선지자, 제사장, 교사, 특사, 천사'등의 의미로 하늘에 속한 천사도 될 수 있지만 메신저로서 온 사람의 의미가 많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맞이한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으로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교사일 수도 있다. (히13:2)
3 섬기는데 진심이었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발을 씻을 물을 가져다 드리고 피곤한 몸을 쉬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빵을 가져다 드릴테니 마음을 기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급히 장막으로 가 사라에게 급히 빵을 만들라고 명하고 가축떼로 달려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급히 요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요리한 송아지 고기와 버터와 우유를 가져가 그들을 대접하고 자신은 그들 옆에 서있었다. 이 모습을 통해 얼마나 아브라함이 나그네 세사람을 진심으로 섬겼는지 볼 수 있다. 진정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다. 분명 이 모습은 세사람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정말 하늘에 있는 천사라면 또는 여호와시라면 발을 씻는 것 먹는 것등이 필요할까? 아브라함은 주라고 불렀지만 사람처럼 대하였다. 생각해봐야 한다.(창18:4-8)
4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역시 너무나 극진한 대우를 받은 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원했다.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아들을 낳게 될 거라고 축복했다. 만약 사라가 이들 중 한 사람은 여호와이시고 이들이 하늘의 천사라고 생각했다면 결코 웃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통해 사라도 이들을 하늘에 천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로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사라가 '내 주인도 늙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인'은 아브라함이 세사람을 부른 '아도나이'와 같은 단어이다. (창18:9-12)
5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심지어 사라는 자신이 웃은 것에 대해 부인했다. 여호와시라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그분 앞에서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어찌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발뺌할 수 있겠는가? 사라는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여호와 앞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앞에서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자기도 모르게 부정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그런에 분명 말씀은 여호와께서 "왜 사라가 웃으며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라고 말하느냐"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덧붙이셨다. 그렇다면 사라가 정말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부인한 것일까? 속이는게 가능한가?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여호와께서 사라를 책망하신 후에 자신 스스로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어색하지 아니한가? 이 화법은 3인칭 화법이다. 만약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면 "나에게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치 제 삼자가 여호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창18:13-15)
6 1인칭 화법과 3인칭 화법은 다르다
보통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이 처럼 1인칭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자연스럽다.(슥8:6)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욥42:2),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32:17),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이와 같은 3인칭 화법은 여호와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제삼자가 여호와에 대해 고백할때 쓰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라가 웃으며 자신이 늙었다고 말했다는 것을 계시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전달하며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창18:13,14)
7. 3인칭 화법을 경계하는 이유가 있다.
만약 3인칭 화법으로 말하는 문화에서 산다면 그곳에서는 다양성이 자랄 수 없으며 발화의 주체가 불분명하므로 말의 책임감 또한 사라진다.
즉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임에도 누군가의 말을 전달하는 듯한 표현을 함으로써 창의성도 발현되기 어렵고 책임의 소재도 불분명해진다. 이러한 3인칭 화법 "내가 참 힘들어하더라구. 내가 그림을 그리더니 싫증을 내더라구" 이러한 간접적인 표현은 감정의 주체가 누군지, 감정과 행동에 대한 책임소재가 모호해진다. 3인칭 화법은 미성숙한 어린아이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다은이 졸려" "다은이 집에 가고 싶어"등이다. 성숙한 표현은 감정과 행동의 주체가 되어 책임을 지는 1인칭 화법이다.
여호와의 표현은 1인칭 나화법으로 하신다. "나는 너를 ~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출20:2,3) 정확히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1인칭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니다.
8. 1인칭과 3인칭이 섞여있는 화법을 쓰고 있다.
세사람이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할 때 아브라함도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아갔다. 이때 여호와께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1인칭 화법으로 말씀하셨다. 이곳에는 수많은 '나'가 나온다. 즉 일인칭 나화법으로 말씀하고있다. '내가 명하였고 내가 이루려 함이고 내가 내려가서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여기서 이상한 부분이 감지되는가? 분명 여호와께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래 나오는 수많은 '나'도 여호와일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신데 내려가서 봐야만 아는가? 만약 여호와시라면 보지 않고도 아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인데 내려가서 진짜인지 아닌지 봐야 알수 있다는 표현이 이상하다. 한가지 이야기 하면 여기 나오는 수많은 '나'는 히브리어에는 없다. 맨처럼 "내가 하려는 것을 숨기겠느냐"에만 '나'가 히브리어에도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은 나가 없는데 번역에서 넣은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면 "내가 너에게 숨기겠느냐"로 말씀하셔야 맞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도 아브라함에게 직접 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가 없이 이 말씀들을 다시 보면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아는데 그는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하여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짓음이 크고 죄악이 무겁다고 말씀하시니 내려가서 그러한지 아닌지 보고 알려 하노라'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이 말씀에서 '택하였나니'도 히브리어로 '알다'라는 단어이다. 이렇게 보면 이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려오셨다고 오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들이라고 볼 수 있다.(창18:16-22)
9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직접 항변하였는가?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시다니 부당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주께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는 없다. 이 말씀에서 뭔가 부자연 스러운 부분이 없는가? 이것도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하고있다면 표현이 어색한 부분이 있다. 바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라는 3인칭 화법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메신저에게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다니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 아브라함은 이 메신저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시면서 정의를 행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그러나 앞서 사라가 여호와께 직접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는 것이 어색한 것 처럼 아브라함이 직접 여호와께 정의를 운운하며 따지는 행동도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선지자나 메신저가 멸망을 예언했다면 여호와의 성품에 대해 말하며 항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창18:23-25)
10 여호와께서 길을 가셨다.
여호와께서 메신저를 통해 응답하시기를 의인 50명 심지어 20명만 있어도 그 도시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아브라함은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주인'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를 사용했다. 만약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였다면 '아도나이'보다는 '당신께'에 해당하는 단어가 어울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하실 모든 말을 마치시고 갈 길을 가셨다고 쓰고 있다. 여호와께서 '걸어가셨다 또는 떠나셨다'는 말씀도 부자연스럽다. 만약 여호와의 말씀을 가진 메신저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자신의 길을 갔다면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동등한 표현으로 아브라함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행동처럼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화자와 전달자가 섞여서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창18:26-33)
11 여호와를 대면한 모세는 나너화법을 쓰고 있다.
모세가 주의(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때 여호와께서 "너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보고 살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반석위에 서라고 말씀하시며 지나가실 때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고 손을 거두리니 너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라고 쓰고 있다. 즉 이렇게 대면하면 나와 너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가 이때 번역을 '주의 영광'이라고 했지만 원어는 '당신의 영광'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등은 보았다. 왜냐하면 그분의 얼굴을 보면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얼굴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어서 그분의 거룩함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내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경고하신 내용이다.(출33:18-23)
12 부지중에 하나님의 메신저를 맞이한 롯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두 천사를 맞이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 그들에게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주여'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하며 집에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갈길을 가라고 청하고 있다. 거리에서 밤을 새우겠다는 했으나 롯이 너무 간청하여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에 갔고 롯은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워 섬기는 모습이 나온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사람중 한사람이 아브라함과 머물렀고 그중 두 사람이 소돔으로 넘어 갔으며 그 두사람을 천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서 말한 거 처럼 천사의 뜻은 '선지자, 제사장, 교사, 특사, 천사 등의 메신저'라는 의미로 하늘에 있는 천사보다는 사람을 칭한다고 보는게 상황으로봐도 더 알맞다. 두 사람을 맞이한 롯은 결국 은혜를 입어 생명을 구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롯이 맞이하고 극진히 섬긴 것이다. 이러한 주께하듯 하는 섬김을 통해 우린 심판중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다.(창19:1-3)
13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
아브라함은 영원한 듯한 제사장을 만났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자였다. 셈은 영원한 제사장은 아니었으나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셈은 항상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은 것에 비해 600살을 살았다. 그런 셈에게 모든 것에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십일조의 기원이 되었다. 이처럼 사람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어 축복의 통로가 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히7:1-3)
# 노아의 홍수로 노아 이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리고 수명은 계속 짧아졌다. 아브라함이 56세였을 때 노아가 죽었으며 샘은 아브라함 죽은 후에도 살아 있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때도 살아 있었다. 아브라함이 볼 때 셈은 항상 살아있는 자였고 항상 제사장이었다. 영원한 제사장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항상 제사장이었다. 아브라함이 봤을 때 셈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족보도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아르박삿과 셀라와 에벨도 450세 정도를 살아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14 마침내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만난 여호와에 대해 읽으며 해석하기 어려워한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오신 여호와는 결코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은 천사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아브라함이 만났고 그들을 통해 여호와를 만나고 대면하였다면 1인칭과 3인칭이 섞여있는 이상한 화법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고 정의를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따지는 듯한 행동도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보인 행동이었다면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못보는 것이 아니라 (등은 보여주셨다) 당신의 거룩함으로 인해 죄인인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타나심만을 가지고 예슈아라고 단정하지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예슈아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슈아라고 말하는 이유가 단지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보이지 아니하는' 의 뜻은 '볼 수 없다'이다. (골1:15)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유는 죽기 때문이라고 앞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형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에서는 마침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더이상 부활한 우리에게 죄가 존재하지 않고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이다.(계22:3,4)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재작 문의
https://cafe.naver.com/freeflaging
#아브라함 #소돔과고모라 #세천사 #레올람토라
첫댓글 창18: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22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세사람 중에 둘은 천사고 한사람은 성육신전의 예수님
21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11: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하나님이 몰라서 보고자 한다는 표현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고자 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즉각 아브라함은 멸망할 성을 위하여 중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히브리서에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영접한 천사는 원어적으로 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로 천사도 사자고 예수님도 사자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사자이기도 하고 메신저 의미의 사자이기도 하죠
사자의 원어는 유다의 사자가 아니지만요
그래도 예수님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알고있는 히브리 기자는 그 사람들을 동일하게 천사들이라고 칭했고 심지어 그분중 한사람은 예수님이었다고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성육신 전에 예수님을 아브라함에게 보내셨다는 증거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여호와라고 분명히 써있는데 굳이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해야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고 하기에도 좀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