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25일 송두환 특별검사가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광빈 특검보, 송두환 특별검사, 김종훈 특검보. ⓒ 주간현대 유장훈
노무현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국회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되어 좌지우지했다.
취임 당일인 2월 25일부터 국회는 한나라당이 제안한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검법안)을 둘러싸고 여야간에 의견 차이로 본회의조차 열지 못했다. 이튿날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특검법안을 변칙 처리하여 노무현 정권에 파상적인 공세를 취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송두환의 특별검사팀이 구성되어 4월 중순부터 70일간 수사가 진행되고, 김대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남북 관계가 샅샅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핵심 측근인 임동원ㆍ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과 박지원 전청와대 비서실장이 구속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년 6월13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로써 한때 전ㆍ현직 대통령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되고, DJ지지층에서 노무현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북 송금 의혹사건으로 기소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현대사옥에서 투신자살하여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6대 대선 과정에서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 6ㆍ15남북정상회담 전후로 청와대ㆍ국정원ㆍ현대그룹이 공모해 거액을 북한에 송금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한나라당이 특검 구성안을 제기하여 특검이 구성되었다. 특검 결과 대북송금 5억 달러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현대그룹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이슈가 된 배경에 의문이 따랐다. 특검의 수사관 중 한 명이었던 김승교 변호사는 대북송금 배경과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북송금 의혹의 최초 폭로자가 미국이며 이 폭로로부터 특검이 시작됐다는 사실입니다. (…) 이 폭로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미국의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당시 코앞에 닥친 한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대선에 개입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주석 14)
대선 직전에 김대중 정부의 큰 업적으로 꼽히는 대북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미국이 제기하고, 이것을 <월간조선>이 대서특필하면서 한나라당이 이슈화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북문제에 진보적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고 미국 부시 정부가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당선되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정부에서 특검이 구성되어 김대중 정부의 대북사업 관련 핵심 인사들이 속속 구속된 것이다. (주석 15)
특검을 통해서 각종 의혹과 정치공세의 내용이 대부분 허위로 드러냈다.
특검의 김승교 변호사는 뒷날 “수사 결과 발표와 달리 언론은 대체로 특검팀이 대북송금을 정상회담 대가로 결론 내린 것처럼 단정적으로 보도해 많은 사람들이 정상회담 대가로 이해하는 듯 하다.”며 왜곡 보도한 일부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수사결과대로 ‘송금이 정상회담과 연관성이 있다’는 정도를 넘어 ‘정상회담 대가’로 보기는 어려우며 ‘정책적 차원의 대북지원금’정도로 보는 게 무난하다.’고 말했다. (주석 16)그런데도 족벌신문들은 김대중이 서거한 뒤에도 이 사건을 ‘5억 달러 퍼주기’로 왜곡 보도를 그치지 않았다.
노무현이 특검을 받아들인 것과 관련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 새정부 출범과 때를 같이하여 제기한 한나라당과의 관계 정상화 △ 전 정부와의 차별성 △ 새정부의 대북관계를 지연시키려는 미국측의 작용 △ 이 기회에 이른바 ‘대북송금’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지적되었다.
2003년 3월 16일 오전 10시경 서울 대치동 대북송금 특검 사무실에 소환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사건으로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김대중 측과 그의 지지세력으로부터 ‘배신감’을 갖게 하고, 대북 관계를 풀어가는 데도 상당기간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노무현의 얘기를 통해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자.
취임식 바로 다음날 여의도에서 ‘고약한 선물’이 왔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던 한나라당이 ‘대북송금특검법안’을 단독처리해 정부로 보낸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때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몰래 북으로 보낸 것이 문제였다. 박지원 청와대비서실장이 산업은행을 통해 그 돈을 송금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청와대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이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지만 나는 특검법안을 수용했다. (주석 17)
노무현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이유를 뒷날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주셔야 했다.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역사 앞에 부끄럼이 없다. 법 위반은 작은 것이고 남북관계는 큰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참모가 대통령 모르게 한 일까지 ‘통치행위론’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석 18)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승계하겠다고 다짐해왔던 노무현에게 대북송금 특검 문제는 두 진영 사이에 감정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그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노무현의 의견을 더 들어보자.
송두환 특검은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 문제만 정확하게 수사했다. 다른 것은 손대지 않아 남북관계에도 큰 타격은 없었다. 박지원 실장을 비롯해서 유죄 선고를 받은 모든 관련자들을 형이 확정되자마자 사면했다. 나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결과도 가장 바람직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실장에게도 전후 사정을 다 설명해드렸다. 김 대통령도 처음에는 서운해하셨지만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나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이간시키려 했다.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주석 19)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97265
첫댓글 한나라당이 자민련과 함께 대북송금 특별법을 발의한날이
노무현의 취임식 바로 다음날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그걸 막을수있다고 생각한다는것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는것..
어리석죠.
장기적으로 봐서 무엇이 김대중과 남북관계에 득이 되는가.
한국정치 지형에서는상식이죠
김갑수님의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해서 들어보길 권합니다.
http://www.podbbang.com/ch/7730
대선정국에서 bbk수사에 대해서 아무리 임기말이라도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힘이 없나 합리적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정도 해소가 되는 군요!
"대북송금특검은 미국 래리닉시의 미의회조사보고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3월 25일자 위 보고서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대북비밀송금 의혹이 발설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월간조선 2002년 5월호가 이 내용을 보도하고, 2002년 9월 한나라당의 엄호성, 이성헌, 김문수 의원 등이 이 의혹을 국회에서 폭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확대 ?증폭 되어 결국 특검법의 공포로 이어졌던 것이다."- 대북송금특검 담당수사관 김승교 변호사의 증언
감사합니다...
김통보다 노통을 더 존경하는 이유,,,
쌀국과 관계를 보면,,,알 것 같기도...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대북송금특검 수용을 물고 늘어지는 사림이 있다는 것이 서글프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