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희 마태오 신부
주님 부활 대축일
사도행전 10,34ㄱ.37ㄴ-43 콜로새 3,1-4 요한 20,1-9
아직 깨닫지 못한 이의 달리기
이 글을 읽고 계실 우리 교우분들 중에는, 서로 ‘부활을 축하한다.’며 나누고 있을 인사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감정들을 스스로 지켜보며, ‘사순 시기를 제대로 보내야 부활을 기쁘게 맞이한다고들 하던데,
그러지 못한 내 탓인가.’ 하며 씁쓸해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부활은 신앙의 완성을 선포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 대신, 달려갈 목표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것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성경은 그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한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요한 20,9 참조)
심지어 같은 장면을 전하는 루카복음에 따르면, 사도들은 단순히 이해력이 떨어지는
수준조차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성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느껴졌다고 하니까요.(루카 24,10-11 참조)
하지만 신앙이 바닥을 드러낸 것 같은 오늘 이 순간이 찬란한 변화의 첫 시작이 됩니다.
제자들은 이제 곧 동료인 토마스에게 ‘주님을 뵈었소.’ 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며(부활 제2주),
예수님과 화해하여 용서를 받고(부활 제3주), 급기야는 공포에서 벗어나 집 밖으로 뛰쳐나가
박해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증거하며 부활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성령 강림 대축일)
이 드라마 같은 변화의 시작에는 ‘달리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전하는 여인들의
말을 전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재빨리 달려갑니다.
무덤까지 달리는 것은 굳이 사도라야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작은 일이 씨앗이 되어, 새로운 변화의
시작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두 사도가 유다인들에게 잡힐 것이 두려워, 끝까지 집 안에서 움직이기조차 거부했다면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무덤까지 달려가는 것밖에 없었지만, 제자들은 일단 최선을 다해 달리며
예수님의 소식에 호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식을 전달받고 출발선 상에 서 있는 사도와 같습니다.
벅찬 행복감이 마음에 차오르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며 그냥 집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일단 부활의 소식이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이제 남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서울대교구 최광희 마태오 신부
2024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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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주님 부활 대축일
사도행전 10,34ㄱ.37ㄴ-43 콜로새 3,1-4 요한 20,1-9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르 16,6)
+ 찬미예수님
주님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이,
떠났던 고향을 찾아갔던 제자들과 버렸던 배를 타고 그물을 다시 잡고 고기잡이를 하던 제자들
모두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고, 주님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는, 우리들의 공동체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의 행복한 삶의 실현입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이야기하며
죽음을 넘어 희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하고 행복한 삶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겨낸 승리입니다. 죽음의 사슬을 끊고 부활하시어 저승에서 승리하여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열린 새 하늘 새 땅에서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불의와 억울함에 대한 보상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주님의 모든 삶을
불의하고 억울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지프스의 신화보다 더 부조리하고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판도라 상자에 남아 있던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의 외침만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미움과 폭력과 죄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용서는 없고 죄만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놀라움에 부활주일의
새벽길을 달렸습니다.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달렸습니다.
다락방의 벽을 뚫고 나타나신 주님으로 제자들은 그 기쁨으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인사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샬롬’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동정녀의 잉태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도, 죽은 자의 부활도
가능케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기에 창조하시고,
마침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완성하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완성이심을 선언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계시 22,13)
주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뻐합시다.
주님의 부활을. 알렐루야!
2024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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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주님 부활 대축일
사도행전 10,34ㄱ.37ㄴ-43 콜로새 3,1-4 요한 20,1-9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온갖 어둠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기쁨이 가득한 오늘,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한 여자들을 묵상해봅시다.
그들이 어떤 계기로 부활을 깨달았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항상 느끼고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는 일념으로 무덤으로 갔습니다.
때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여서 사람들은 대부분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발걸음을 무덤으로 재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무덤 입구를 막은 “매우 큰 돌”(마르 16,4)을 굴려내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 문제도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 드릴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한 그들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사건을 접했습니다. 곧 걱정했던
큰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몹시 당황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요한 20,2 참조).
그래서 두려움에 더욱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성경은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였다.”(루카 24,5)고 말합니다.
선한 마음으로 힘차게 내디뎠던 그들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로 인해 그들은 완전히 용기를 잃고 마음과 몸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당황, 두려움, 멈춤 등의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천사는 주님의 부활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이러한 선포에도 그들은 아직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결정적으로 깨달았을 때는, 천사의 분부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루카 24,8) 때입니다. 천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라고 분부했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던 것입니다(루카 24,6-8 참조).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비로소 마음이 열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갖두려움을 이겨내고,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힘차게 내디디어
사도들과 다른 이들에게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억은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하는 힘이고, 아울러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된 삶을
다시 일깨우는 힘입니다.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이는 주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라는 뜻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 그분의 삶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미 행동하셨고, 지금도 행동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초대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미래의 희망에 마음을 활짝 열게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던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만약 이러한 기억이 없다면, 당황은 길을 잃게하고, 두려움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기괴한 환상마저 불러일으킵니다. 당황과 두려움은 하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차단하고,
우리의 지평을 어둡게 하고 희망을 꺾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고, 그것에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슬픔과 절망에 잠겨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참된 자유와 희망과 기쁨을 누리는 부활의 삶에서 아예 멀어집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는 그런 때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자마자
추격을 당했을 때,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여 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탈출 14,11)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더 낫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습니다.
이러한 힘겨운 시련이 반복될 때마다, 주님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억’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신명 4,9).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6,1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신명 8,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 10,32).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2티모 2,8).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셨던 사랑의 기적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억은 온갖 두려움을 몰아내어 우리를 다시 엄연한 현실로 돌아오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훌륭히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게’(2티모 4,7 참조) 합니다. 말하자면 부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삶에는 참으로 힘겨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발걸음도 어찌해야 할바를
몰라 중단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이 더욱더 막막하게
보이고 실낱같은 희망마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특히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고
행동하셨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면, 이웃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과 시련을 겪는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증언함으로써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어두운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극심한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연대와 형제애를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기억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성모님께서 우리의 기억에 함께해 주시길 빕니다.
2024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