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프린트가 유실되어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기억되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년)를,
고백하자면 나는 중학교 시절 동시상영 극장에 몰래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미성년자 입장 불가였지만 동시상영 극장이었고, 같이 상영하는 영화가 홍콩 무협영화여서 어찌어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몇몇 장면만 기억 속에 그림엽서처럼 남아 있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문정숙 신성일이 주연을 맡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두 번이나 더 리메이크 되었다.
김기영 감독은 김지미 이정길 주연의 [육체의 약속](1975년)으로,
김수용 감독은 김혜자 정동환 주연의 [만추](1981년)로 각각 리메이크했었는데,
한국영화를 시대별로 각각 대표하는 최고의 감독들이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영화들은 모두 색깔을 달리하면서 감독의 특징을 살려 강렬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 한 [만추]의 두 주인공은 현빈과 탕웨이다.
[만추]의 기본 줄거리는 비슷하다. 살인죄로 감옥에 수감중인 중년의 여인이 짧은 휴가를 얻어 고향을 방문하다가
낯선 젊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무대를 미국 시애틀로 옮겼다.
7년째 수감중인 애나(탕웨이)는 어머니의 부고로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시애틀로 가는 버스를 탄다.
그 버스에 올라탄 젊은 남자 훈(현빈)은 버스비가 없어 애나에게 빌리게 된다.
훈의 직업은 외로운 여성들을 에스코트 서비스하는, 일종의 향락산업 서비스 종사자다.
7년만에 세상에 나온 애나는 모든 것이 낯설다.
발길을 돌리려던 애나를 터미널에서 다시 만난 훈과 시애틀에서 짧은 날들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이유로 닫혀 있던 마음을 서로를 향해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 애나는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만추]는 배우의 감성을 극대화시켜 표현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이 여주인공에게 있음은,
그동안 주연을 맡았던 문정숙 김지미 김혜자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의 면면을 봐도 알 수가 있다.
탕웨이가 맡은 애나는 그동안 [만추]의 여주인공들에 비해 훨씬 젊다.
삶의 풍상을 모두 거친 중년의 여인이 아니라 훨씬 젊은 여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 주인공인 현빈의 캐릭터도 [만추]의 역대 남자 주인공들에 비해 훨씬 감각적으로 변모했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배우들의 섬세한 감성과 시애틀의 우울한 풍광을 극대화시키며
관객들을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인다. 탕웨이는 섬세한 감정선을 예민하게 표현하는 배우다.
[색.계]의 감각적인 배역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의 폭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추]의 여주인공들에 비해서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만추]에서 안개 등 이 영화의 배경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두 남녀의 감정 사이를 보일듯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표현한다.
멀리 있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안개는,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