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음>
농민신문
폴리스라인/ 정병삼
황사 덮인 아파트 뜰에 몸을 던진 사내가
작업화를 신은 채 화단에 쓰러져 있다
선명한 폴리스라인
퇴근길을 적신다
가난한 별들이 칸칸마다 길을 잃는다
적막한 현관문은 사막의 입구였을까
매일 밤 모래언덕을
서성거린 발자국
먼지만 남기고 떠나는 사이렌 소리
붉은 스프레이가 죽음을 증언할 때
모두들 문을 닫고서
또 다시 뜰을 밟고
정병삼 : 1968년 전남 나주 출생. 시조동인 시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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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수도꼭지를 틀다/ 이종현
내딛은 발걸음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하루를 씻기 위해 손잡이를 돌린다
꼭지는 냉수가 직수 온수는 침묵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길들여진 버릇이
흔적을 받아 들고 햇살을 가늠하다
조각난 풍경을 쥐고 씻어내는 저물녘
물방울 젖어 드는 눈금을 가늠하고
기울기 묻어나는 시간을 색칠한다
눅눅히 젖은 하루해 이불 덮어 재운다
이종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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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염낭거미/ 김미진
허공에 그물 던지던 아버지는 어부였다
명주실로 목숨 기워 물살을 끌어당기면
나선형 하늘이 깨져
금 간 꿈이 만져졌다
숨비소리 들려주던 어머니 먼저 보내고
날마다 내장 뽑아 벼랑에 오를 때면
바다에 뜬 집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투망질을 할수록 세상은 징소리 같아
지나는 바람까지 물고 있는 지독한 허기
불안을 걸어둔 허공
자식들이 끈적인다
투명한 줄을 엮어 수의 짜던 아버지
시린 생이 뜬 바다는 팽팽하고 가파른데
새벽녘 거미줄에 걸린
저 금빛 이슬 한 방울
김미진 : 1961년 광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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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잔가지를 잘라내자 지저귐이 자라났다 / 백진주
푸른 비단 유리알 쌓아 올린 서늘함
그보다도 가벼이 차오르는 창공에
먹물이 가로지르고 또다시 퍼져간다
우짖는 새들은 여린 깃을 뽑아낸다
발톱이 달라붙고 날개가 물들어도
부리는 홀로 남은 채 울음을 쪼아먹는다
가지마다 걸린 것은 갇혀버린 울음소리
검고 푸른 공백마다 삶 하나가 들어있다
껍질은 투명하기에 깨어질 수 없는가
바람은 한 점 없고 공기는 침묵한다
비명의 무게만이 잎이 되어 매달릴 때
가지는 몸을 떨었다 오지 않는 계절처럼
백진주 : 2001년 경기도 김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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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새들도 허공에서 날개를 접는다/ 김미경
새들도
날아가다
날개를 접는다
어느 방향 어느 가지 붉은 발목 쉬어갈지
허공에
숨을 매단 채
날개 잠시 접는다
가다가
쉬어가도
멈추지를 않는다
부러진 발톱일랑 비바람에 뿌려주고
바람이
떠미는 대로
중심 죄어 다잡는다
들메끈 동여매고
드높이 치솟다가
길에서 길을 얻는 눈 밝은 새가 되어
아득한
고요 속으로
귀를 접고 떠간다
김미경 : 1966년 대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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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죽염에 관하여/ 황명숙
너는 화신이다 그 이름은 왕소금
토판에서 태어나 이곳까지 찾아온
짜증도 해맑게 삭인 육각형 얼굴이다
너는 구미호다 둔갑술의 귀재다
때로는 거센 파도 어느 날은 백합꽃
바다를 다 휩쓸고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너는 넉살 좋게 저토록 적막하여
유월 햇살 골계미 결정체의 숭고미
몸뚱이 불에 던지고 가면을 벗는다
너는 고요하게 왕대나무 방에 들어
아홉 날 동침 끝에 먹물 옷 걸치고
눈부신 가부좌 틀고 서럽도록 반짝인다
황명숙 :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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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련의 기억/ 유진수
봄날 햇살 아래 눈물처럼 쏟은 말들,
천천히 번져가다 물비늘처럼 글썽인다.
희미한 표정만 남긴 채 수척해진 문장들.
수런대던 그때로 하염없이 돌아가서
두어 대 솟은 꽃순 차랑차랑 만난다면,
밝고도 환한 눈길로 글을 다시 쓰리라.
흰 빛깔 떨군 꽃이 하늘로 돌아간 후,
뜨락에 젖어있던 별빛 같은 글자들이
눈부신 백련의 말씀으로 살아나던 그 순간.
유진수 : 1996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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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사유의 독법/ 김원화
티끌도 숨죽인
그 고요에 들었다
미동조차 소음이라
배낭 깊이 질러 넣고
내밀한 그 미소* 당겨
새기듯 필사해 본다
당겼다 밀었다 말걸다 침묵하다 그 시선 머문 곳 내 눈길 얹어 보니
생각에 잠기는 시간, 순간 속에 가득하다
기쁜 우리 젊은 날 바람 속 거친 숨결
손끝에서 발끝까지 너 하나로 벅찼던 거
그게 다
내 안에 있는데
괜찮다, 꽃이 못 돼도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반가사유상
김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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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오아시스 편의점/ 김미진
사장님 호출문자 자라목이 나온다
후루룩 컵라면에 삼각김밥 먹는 저녁
진열대 위 상품으로 흔들리는 긱잡* 인생
비상구 더듬으며 사막을 걸어간다
신기루 만지다가 소소초에 찔리는 손
웅크린 낙타의 등에 달빛만 부서진다
수십 장 입사원서 흩날리는 모래바람
사구에 처박혀도 오아시스 향해 걷고
울음을 널어 말리며 유통기한 늘려간다
*긱잡(gig job); 필요할 때마다 계약직, 임시직을 하는 사람
김미진 : 1961년 광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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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도배를 하면서/ 권영하
악착같이 붙어 있는 낡은 벽을 뜯어내고
벽지를 살살 풀어 재단해 붙여보면
꽃들은 뿌리내리며
벽에서 피어난다
때 묻고 해진 곳에 꽃밭을 만들려고
온몸에 풀을 발라 애면글면 오른다
흉터를 몰래 감싸고
생채기를 보듬으며
직벽도 척추 없이 단번에 기어올라
천장에 땀 흘리며 거꾸로 매달려도
서로를 응원하면서
깍지 끼고 버틴다
보일러를 높이거나 햇빛살 들이거나
실바람 끌어다가 방 안에 풀지 않아도
팽팽히 힘줄을 당겨
꽃동산을 만든다
권영하 : 1965년 경북 영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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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
마리오네트/ 김현장
실 하나 당겨보면 등 돌리는 사람 있다
마스크로 가려봐도 휑한 눈빛 흔들리고
비대면 차가운 거리 회전문은 돌아간다
백동백 무릎 꿇고 저 홀로 피어나
꽁꽁 언 유리창 너머 하얗게 뜬 얼음 얼굴
툰드라 이끼 파먹는 순록처럼 불안하다
관절마다 매달린 끈 조여오는 겨울 아침
숨죽인 채 늪 속으로 도시는 빠져들고
사람이 사라진 길에 빈 줄만 흔들린다
김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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