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구간 : 솔고개(36번도로)-261.5m-255.7m-282.8m-378.4m-발치-460.2m-성재-남산(금봉산,636m)-마즈막재-계명산(775m)-419.6m-
244.9m-금릉배수지-광명산(148.6m)-대문산 탄금대
산행일자 : 2015. 3.7
참 가 자 : 자룡님,이용주
산행시간 : 08:40 - 18:15 (9시간35분)
교 통 편 : 갈때 ; 동서울-충주-222번버스(08시,용천1리,윗가리내,솔치재), 올때 : 탄금대-택시-충주-강남터미널
' 작년 1구간하고 오랜만에 계명지맥 마무리 하러 충주로 기온은 산행하기 좋은데 시야는 흐려 아쉬움
' 길은좋은데 업다운이 심하고 음지로는 낙엽밑으로 빙판이 있어 조심하며 진행
' 평소 가보고 싶은 탄금대를 돌아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보기도하고
' 충주 터미널내 한식당에서 인당 4000원하는 부페로 지난 1구간에 이여 식사 시간절약하며 양 조절 가능하니 마음에 듬
▲ 솔고개-사진의 시계표시가 두시간정도 틀림
222번 버스로 30분소요 용천1리(윗가리내)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솔고개,좌측펜스끝나는 곳에서 오름
▲ 초반 과수원이 계속됨
▲ 255.7m삼각점
▲ 282.8m
▲ 460.2m
▲ 경기화학 광업소
좌측으로오름
▲ 성재
한 어머님이 굿을하고 계시는데 무슨 사연이기에..., 마음으로 기원하며 지나감
▲ 임도따라 오르는데 음지에 있는 빙판길이 새로워
▲ 충주산성
▲ 멀리 월악산이 보이고
▲ 대간라인 뒤는 주흘산
▲ 계명산
▲ 마즈막재
원래 이름은 심항산(心項山) 또는 오동산(梧桐山)·계족산(鷄足山)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무성했기 때문에 오동산이라 했고,
백제시대에 지네[百足蟲]가 많아 퇴치하기 위하여 닭을 한 무리 방목하니 백족충이 없어져서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1958년에 계명산(鷄鳴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부대산,주봉산라인
▲ 지나온 남산
▲충주시내
▲ 지맥 끝머리가 저멀리
▲ 뒷골목산 약수터
▲ 419.6m
▲ 244.9m
▲ 우측도로로
▲ 중원골프연습장지나, 길건너 효성교회 성결교회지나 여성문화회관 바로전에서 좌로
▲ 좌측 계명산, 우측이 남산
우측으로 잘지은 집을 지나 산소오르는 길 따라 능선으로 오름
▲ 광명산(148.6m)
▲ 좌측에서 파라다이스 웨딩홀로 나옴
▲ ▼ 충주 세계 무술 박물관
▲ 지금부터 탄금대내에서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이라고불리워 오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곳이다.
지금부터 1400여년전(AD 536년경) 신라 진흥왕때에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라고 불리워졌다. 우륵선생은 가야국 가슬왕
당시의 사람으로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며 신라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는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선생은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두대라고 한다.
탄금대에는 현재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탄금대기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이 있고 조각공원과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근 탄금대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삼국시대 백제세력에 의해 축조된 토성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탄금정
2층 누각형태인 탄금정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로 본래 충주관아 내 연못에 천운정이란 정자가 있던 것을 사직산에 지건되었다가,
1955년 다시 이 자리로 이건되었는데, 목조로 된 정자가 낡고 헐어 지금 이 정자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쪽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탄금대에서도 가장 절경인 열두 대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은 질펀하게 호반이 되어 물안개를 일으키고, 서번 박재륜 선생의 글에
죽사 박충식선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기"비가 외롭게 서 있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조총으로 무장된 십수만의 왜적을 창과 활로 무장한 훈련되지 않은 팔천 군사와 함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면 배수진 전법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곳 열두 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47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순절한 곳이다.
부여의 낙화암이 금강변에 있듯이 탄금대 열두대가 남한강변에서 분위기를 갖게 한다. 열두 대란 가야금이 12현 열두줄이기에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또다른 하나는 신립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대(절벽)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이 곳 열두대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콘크리트 계단을 12단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달천와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계명지맥 끝
첫댓글 탄금대에서 바라본 달천과남한강의 노을빛이 아름답습니다
계명산엔 닭의울음소리가 ?
성재의 굿당이 기억에 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계명산에는 간 기억이 있는데...기록이 없으니....
이제 남녁 이외에는 기억속에나 있을 뿐입니다.
구경 잘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탄금대는 국토종주 자전거길 걸어가다 한 번은 밤에, 한 번에 이른 아침에 봐서 기억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