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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5장 9-10절
(5) 제발 유명 설교자의 그럴듯한 설명에 속지 말라!
세계적인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서 5장 10절을 강해하면서 히브리서 7장 22-25절과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하여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 죄를 짓는다고 버림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고 변호해주시므로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확실하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로마서 강해 제2권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떤 일에도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의 저자는 7:22-25에서 이 점을 완벽하게 묘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러분은 이 말씀의 핵심을 깨달았습니까? 여러분은 '나의 죄가 용서받았고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주 좋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리로 다시 빠진다면 그 모든 것은 무효가 되고 내가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겠는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요한일성 1장에서 같은 것을 말하공 있습니다. 거기서 말씀은 본질적으로 여기서의 논증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와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러나 내가 죄에 빠지면 나는 사귐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반드시 죄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다시 요한일서 2장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1-2절) 여기에만 우리의 안전의 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기 위하여 죽으셨고 살아나시고 우리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서 대언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분들이 떨어져나가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논증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그럴듯하지요! 그래서 저는 더 화가 났습니다. 저명한 설교자의 말이 그럴듯하기까지 하니 목사와 신자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속겠습니까?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바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첫째, 로마서 5장 9-10절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더욱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문구가 보여주듯이 이 구절들은 심판 날 받게 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내세운 히브리서와 요한일서의 성구들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것들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언제든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고, 요한일서도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 짓는 죄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 죄를 지었을 때, 자백하면 예수님의 변호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신다는 내용일 뿐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풀리고 왜곡시켜서 마치 이 구절들이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말장난을 한 것입니다.
둘째, 로이드 존스의 단언은 특히 히브리서 7장 22-25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는 이 구절들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항상 있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 죄를 지어도 버림받지 않고 절대 안전하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미 설명해드린 대로 자백이 아니라 처음 믿을 때 받는 구원에 관해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로이드 존스가 단언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조금 다른 말이지만 어떤 학자들은 "온전히"라는 단어를 근거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쪽으로 몰아갑니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온전히" 구원하신다고 했으니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적인 편견 때문에 학자들이 자주 하는 전형적인 착각입니다.
"온전히"의 헬라어 "판텔레스"는 "온전한, 매우 완전한, 영원히"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처럼 부사적으로 쓰일 때는 "절대적으로 완전히, 충분히, 언제나, 영구히, 항상"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히"와 "언제나"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먼저, "언제나"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근거가 근접 문맥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7:23-25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보시다시피, 이 구절들은 "항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앞의 구절들까지 보면 그 점이 더 명확해집니다.
히브리서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브리서 7: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히브리서 7:21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정말로 "항상"(혹은 영원히)이 초점이지요! 그러므로 공동번역처럼 "언제나"로 번역해야 옳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자의 일을 하시니 당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23절에서 구약의 제사장들이 죽음 때문에 항상 있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계시므로 그 직분이 갈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5절의 "그러므로"가 보여주듯이, 바로 그것을 근거로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에 나오는 "이는"이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고, 그 안에 있는 "항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있다는 것이 어떻게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영원한 구원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이유라면 구약시대에도 제사장이 갈리긴 했어도 항상 있지 않았나요? 그것과 대조해서 말한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더구나, 이 구절은 로이드 존스의 주장과 달리 자백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구절입니다.
다음으로, "온전히"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판텔레스"라는 단어에 "온전히"라는 뜻이 있을 뿐 아니라, 11절과 19절 등 더 넓은 문맥을 보면 그런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슈라이너는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께서 영원한 제사장직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항상'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면, 그분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완전히'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 모두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히브리서 10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저는 "판텔레스"를 "언제나"로 번역해야 옳지만 개역개정처럼 "온전히"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전히"로 번역해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이 되진 않습니다.
본래 이 단어를 "온전히"로 번역하는 것은 제가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 전과 후에 "온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히브리서 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이 구절들에 보면 수수께끼 같은 "온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과연 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학자는 토머스 슈라이너입니다. 그는 "온전"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을 통해 기자는 종말론적 온전함은 율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최종적이고 온전한 죄 사함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 '제사장직, 제사, 속죄 등의 규례들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 앞에서 우리는 '온전함'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7:11).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9) 율법이 정한 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와 달리 '섬기는 자를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다.'(9:9) '온전하게 하다'라는 말은 여기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는 양심을 진실로 깨끗하게 하는 개념을 전달한다. 율법과 그것이 정하는 제사들은 그런 완전함을 이루지도 못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온전하게 하다'라는 말은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다. 율법과 그것이 정하는 제사들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7:19, 10:1; 참조. 7:11). 이런 제사들로는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9:9). 히브리서에서 완전은 죄가 정결하게 되고 제해지는 개념으로 양심이 더 이상 죄책으로 더럽혀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온전"은 온전한 죄 사함 즉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면 왜 온전이 이런 뜻일까요?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듯, 제사장들은 "해마다"(1절) 혹은 "매일"(11절)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의 제사로 백성들을 1절에 의하면 "온전케", 2절에 의하면 "죄를 정결케", 4절에 의하면 "죄를 없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모세의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물의 피는 죄를 온전히 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은 "그러나 히브리서 9장 13절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십시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즉 이런 제물로는 육체를 정결케 할 수 있을 뿐 속사람이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에서 계속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반대로, 14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몸이 아니라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 결과 양심에 거리낌없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온전"은 바로 온전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한 구원을 뜻합니다.
이상 설명해드린 것처럼, "온전"은 구약의 제물이 죄를 덮는 것과 대비되는 온전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한 구원을 뜻합니다. 때문에 25절의 "판텔레스"를 "온전히"로 번역해도 단지 구원을 뜻하고 궁극적인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그림자와 모형이 이루지 못한 속죄를 실체이신 예수님이 온전히 이룬 것을 뜻할 뿐, 구원의 '이미와 아직'의 구조와 다른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칼빈의 견인의 교리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 단어의 뜻이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는 "온전히" 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다른 구절들에 나오는 "온전"이라는 단어와 원어가 달랐습니다. 25절은 다른 구절들과 달리 "판텔레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석을 접고 다시 연구했던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에 근거해서, 이 단어를 다른 구절과 같은 뜻의 "온전히"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이 구절은 칼빈의 견인의 교리의 근거가 아닙니다.
한편, 진짜 문제는 히브리서 10장 14절입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판텔레스"를 "온전히"로 번역해도 견인의 교리와 무관하므로 문제가 안 되지만, "영원히"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죄를 없이 한다'는 독특한 표현이 수차례 나옵니다.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참 알쏭달쏭한 표현이지요! 이것은 죄 사함을 뜻할까요? 아니면 죄의 근절 즉 죄를 이기는 것을 뜻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일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원어를 찾아보았더니 "없이 한다"에 쓰인 헬라어가 세 가지입니다.
먼저, "아데테시스"(9:26)는 "제거, 옮김(이동)"을 뜻합니다.
또, "아파이레오"(10:4)도 "빼앗다, 베어버리다, 제거하다, 없애다"를 뜻합니다.
또한, "페리아이레오"(10:11)도 "제거하다, 없애다, 근절하다, 폐기하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나 곧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마하-씻다, 닦아내다, 제거하다, 근절하다)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나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페샤-반역, 범죄,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아데테시스"(9:26)-제거, 옮김, 이동)"(시103:12)와 같은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죄 사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장 9절과 26절을 비교해보면 "죄를 없이 한다"와 "온전"이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통해서도 그 둘이 같은 뜻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나아가서, 그 뒤에 보면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뜻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WBC주석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 구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15-18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를 통해 우리는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구약의 제물과 달리 예수님의 피는 죄를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하셨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해마다 그리고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는 영원한 효과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해마다 제사를 드린 것이 보여주듯 1년간 효과가 있었다면, 단 한 번의 속죄로 영원히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의롭다 함을 다시 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으면 배교하거나 타락해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의롭다 함의 효과가 영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장 4-6절과 달리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는 것 역시 칼빈의 견인의 교리의 근거가 아닙니다.
넷째, 로이드 존스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버림받지 않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그 구절은 빛 가운데 행하며 말씀대로 살다가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결코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죄의 종이 된 자들의 죄가 그들의 구원을 위협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음 구절을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3:7-10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피로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구원받았으니 죄를 짓고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천국에 간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로마서 6장 15-16절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처럼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도 그 이후 습관적인 죄를 짓고 "죄의 종"이 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다섯째, 로이드 존스는 히브리서 7장 22-25절과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항상 있는 대제사장과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버림받지 않고 안전하며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항상 있는 대제사장 또는 대언자가 계십니다. 그래서 우발적인 죄는 자백하면, 습관적인 죄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류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이 로이드 존스가 제시한 두 구절들이 나오는 성경에 각각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서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요한일서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이처럼 모든 죄가 다 자백하거나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즉 자백하거나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죄들이 있는가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아무리 자백하고 회개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히브리서 6장의 "다시"라는 말과 10장의 "자기를 거룩하게 한"이 시사하듯이, 그리고 요한일서 5장의 경우 "형제가"라는 단어가 직접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를 받지는 않지만 그 구절을 해석해보면 그 죄를 지을 수 있는 자들 속에 믿는 자들이 포함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만 짓거나 구원받은 자들도 지을 수 있는 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항상 있는 대제사장과 대언자가 있으니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짓더라도 절대 버림받지 않고 안전하다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매우 편협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것이고, 미혹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유명세만 믿고 그런 엉터리 주장에 미혹되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