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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 사랑의 빛
로마서 13:8-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2주일이다. 가을이다. ‘땅으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이 있다.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이다. 모든 교회는 공통적으로 네 개의 기둥을 가진다. 하나(Una)의 교회, 거룩(Sancta)한 교회, 보편적인(Catholica) 교회, 사도적인(Apostolica) 교회다. 뿌리가 같다. 모교회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교회이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같은 고백을 한다. 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한 책인 성경을 배우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세례, 성찬, 성직을 통해 같은 제도를 유지한다.
‘하나의 교회’는 일치와 연합을 의미한다. 다양한 교파로 나뉜 모습이지만, 서로 연합하는 교회이다. WCC는 세계를 대표하는 교회협의체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이단이 출몰했지만 교회가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로 연합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제도와 성격, 스타일과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도 공통분모를 유지한다.
언어와 민족이 다르고, 신앙적 경험에서 차이가 있으며, 때론 박해의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의 일치를 이룰 수 있었을까? 일치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 외에는 따로 설명할 길이 없다.
교회가 규모의 차이, 역사의 길이, 공동체의 형편과 상관없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얼마나 소중한가?
1)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권면한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마라, 사랑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라.
본문에서 두 가지 빚/빛을 말한다. ‘사랑의 빚’과 ‘사랑의 빛’이다. 발음이 같아서 구별하기 어렵다. 빚과 빛은 천양지차이지만, 사랑이란 단어와 함께 하니 두 가지 모두 숭고하고 거룩하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가운데 큰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한다. 그 중에는 교회 건축하느라 많은 빚을 졌다. 대형교회일수록 규모가 훨씬 크다. 안부를 물을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
“날마다 빚 가운데로 걸어간다.” 여기에서 빚/빛은 부채를 뜻한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본문에서 지금까지의 말한 모든 권면을 종합한다. 그는 “율법 없이 책임적인 윤리적 행위가 가능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한다. ‘사랑은 율법을 이룬다’는 것이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교회의 네 가지 기둥 위에 씌울 지붕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브랜드는 사랑이다. 누구든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사랑의 율법’이라고 부르며, 또 요한서신은 하나님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사랑의 계명은 율법의 완성으로,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의 정신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랑은 실천사항이 아닌 진리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만민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셨다. 이것은 진리이다.
과연 사랑 없이 이 세상이란 시스템이 온전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가족공동체, 신앙공동체는 사랑으로만 지탱이 가능한 법이다.
사랑이란 말이 홍수처럼 넘쳐난다. 사랑의 언어는 하루에도 수없이 듣고, 노래하고, 인용된다. 그런데 사랑은 누구나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사람에게 가장 결핍한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마치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속담처럼, 가슴에 와 닿는 사랑을 찾아보기란 정말 쉽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2천 년을 한결같이 지속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가장 제일 좋은 은사를 사랑이라고 하였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리고 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권면한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대한 영웅이나, 순교자, 이 시대의 성인들, 천사표 같은 인물들의 독보적인 몫이 아니다. 사랑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통 사람을 가장 사랑하신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보통사람이 가장 많다”는 말도 있다.
6.25 전쟁 직후 한 나환자촌을 방문한 미국 관광단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곳에 선교사로 파송된 한 미국인 간호사가 나병환자의 상처를 싸매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백만불을 준다 해도 저 일은 할 수 없네.”
그 말을 들은 간호사는 이렇게 응수하였다. “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에 이 일을 합니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은 빚을 져도 괜찮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창고는 무한하다.
2)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에 이어서 바울은 말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
그리스도인의 삶은 빚을 진 과거가 아닌, 장차 미래의 빛에 의해 조명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리켜 ‘그날의 빛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금 현실을 진지하게 살아가되, 미래의 빛 가운데 살라고 한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응시하는 희망의 시야를 지녔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렇게 권면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그리스도인은 주님에 대한 희망을 고대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생애를 바꿀 일대 전환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한다. 갑옷은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입는 무장복이다. 전쟁이 막상 닥칠 때 준비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먹고 사는 일만 전쟁터가 아니다. 영적 전쟁을 위해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여전히 어둠을 틈타는 삶이 있다. 어둠은 평화를 거부하고, 불화를 만든다. 어둠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쌓이게 한다. 그러니 어둠의 일, 즉 죄의 열매를 버리고, 빛의 갑옷, 곧 사랑의 힘을 얻으라는 말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예수의 빛, 사랑의 빛 가운데에서 행해야 한다.
지금 밤이 깊으면 그만큼 새벽도 가깝다. 복음서에 따르면 당시 밤의 길이는, 일하는 시간과 똑같이 12시간이다. 밤은 크게 4등분해서 ‘저녁, 밤중, 닭 울 때, 새벽’(막 13:35)으로 나누는데, 곰곰이 그 의미를 따져보았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밤에 절망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구원과 이 시대의 구원에 대해 보다 절박한 심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의 주제가 그렇다.
네 믿음의 길에서 구원의 확신으로 살아라. 믿음을 지닌 만큼 진실하게 실천하며 살아라.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사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3)
바울은 구체적인 방법을 권면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
단정하다는 것은 헬라어 ‘유스케몬’인데, 좋은 모양, 행실, 태도 즉 반듯한 삶의 본보기를 말한다. 누구나 보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고, 진실하다. 겉과 속이 똑같으며, 부지런한 삶의 태도를 말한다.
면접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런 모습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은 이런 바른 외관, 태도, 말 습관을 정성껏 연습한다. 심지어 학원에 가서 훈련받기도 한다. 좋은 면접위원이란 겉과 속을 구별하는 사람일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밤과 낮, 즉 환경과 상황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어둠의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하기를, 방탕, 음란, 미움 이 세 가지라고 한다.
어둠의 유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도처에 널려 있다. 아차하면 지뢰밭이다. 세상적인 즐거움, 불의한 삶은 우리가 주님을 향하는 데 치명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세 가지를 두 가지씩 짝을 지어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2).
이것들은 당시 이방 사람들의 부도덕한 도덕적 문란에 대한 지적이지만, 오늘에도 크게 만연되어 있기에 우리 시대에도 적절한 권면이다.
이것이 남들과 비교되는 특별한 일인가? 전혀 아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유별난 신앙태도, 거창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 삶의 기본기, 상식적인 태도를 권면하는 것이다. 구원의 때를 의식하고 산다면 특별한 일보다 가장 올바른 삶을 살라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란 우리 마음의 창을 계속 닦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색동교회 톨레레게의 말씀이다. 어거스틴이 톨레레게(‘집어 들고 읽어라’)는 음성을 듣고 선택한 성경 구절이 로마서 13장의 말씀이다. 어거스틴은 대단한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감짝 놀랠 예언의 말씀, 은밀한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어거스틴이 위대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씀을 듣고 삶을 고쳤다는 사실이다. 평소에 몰랐을까? 당대의 지식인이고, 교양인인데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기에, 그가 오랜 방황을 끝낼 수 있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어거스틴은 자신에게 육적인 삶이 있듯, 영적인 삶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듯이, 종말의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옷은 누구나 입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랑의 빛 가운데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결정권을 맡긴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순간순간 종말의 때를 산다. 언제나 나를 깨어 있게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말씀 가운데 묵상과 성찰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는 늘 나를 깨어 있게 한다.
랍비 휴고 그린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이야기다. 1944년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하루는 함께 갇혀 있던 아버지가 자신과 친구 몇몇을 수용소 건물 한 구석에 모이게 하였다.
아버지는 그날이 유대인의 성전축제일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였다. 이방인에게 빼앗겼던 성전 예배를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빛의 축제’였다. 8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 기간 중 매일 하나의 촛불을 더하여 축제 마지막 날에는 모두 8개의 촛불이 밝혀지게 된다. 아버지는 진흙 주발을 내놓더니 수용소에서 구경하기 힘든 버터를 녹여 심지를 적시고 촛불을 대신하여 불을 켰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낭비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아버지는 가만히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 있어. 하지만 희망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단다.” 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이었다.
사랑의 빚을 두려워 말라. 사랑의 빛으로 나아가라.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희망을 가져라. 내 삶의 긍정적 변화를 꿈꾸라. 변화를 신뢰하고, 때를 놓치지 말라.
사랑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용서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따듯한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놓치지 마라.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행여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단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이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을 사모하며, 사랑의 빛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