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블 클 릭
처음 올리는 글입니다. 많이들 읽어주세요~~~
정명우는 처음 주소를 받아들었을 때부터 우선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걱
정이었다.
'XX군XX면XX리'라고 명시돼 있는 행정구역상 주소는 그곳 주민들에게조
차 생소한 이름이었다. 오히려 주민들 대부분이 XX마을이라고 알고있는
곳이었다. 국도를 벗어나 비포장 도로를 두 시간 여 달려 겨우 그 마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시야로 들어오는 풍경의 대부분은 논과 밭인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집들은 거의 양옥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독 그
집만이 아직 개량되지 않은 체로의 모습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여러
집들을 거쳐 처음 그 집을 대했을 때는 유난히 표시가 나는 합성사진 같
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아니, 달리 생각해 보면 이곳 풍경과는 너무 잘
어울려 쉽사리 찾지 못하게 일부러 그렇게 지어 놓은 집이란 생각도 든
다. 이 집을 밖에서 본다면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마당 안은 어떤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집 앞으로 나 있는 좁은 숲길이 그 집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고, 그 주위는 온통 잡풀과 고목들로 뒤섞여 있어 다른 방
향에서는 접근 할 수조차 없었다. 담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온통 넝쿨들
을 둘러쓰고 있어서 마당 안은 도통 보이지 않고, 다만 지붕이 보이지 않
는 것으로 미루어 단층 건물이려니 하는 짐작만을 할 수 있었다. 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낡은 철 대문은 본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
을 정도로 심하게 부식되어 있다.
'여기가 맞나? 7...2...9...번지 김...현...수... 제대로 찾아온 것 같
군.'
거의 지워져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씌여진 문패를 열심히 들여다보
던 정명우는 다소 안심하는 눈치다. 이제 그를 만날 궁리를 한다. 이런
재래식 주택이라면 마당이 상당히 넓을 것이다. 그렇다면 밖에서 불러 봤
자 꽤 큰 소리가 아니면 방안까지 들리긴 어려울 테고 그렇다면 문을 열
고 들어가 불러야 할 텐데 녹 투성이의 이 철대문을 밀고 들어가기엔 꺼
림직하다. 가뜩이나 이곳을 찾아오면서 뽀얗게 먼지를 덮어쓴 구두와 바
지단을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밖에서 부르기로 결심했는지 헛
기침을 한번 한다. 두 손을 나팔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아 쥐고 부르는
시늉을 하다가 문틈으로 길게 내민 전선을 발견한다. 그 끝에는 벨이 곡
예를 하듯 매달려 있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려는 듯 하다. 벨을 누른
다. 의외로 벨 소리가 커서인지 흠칫 놀라한다. 잠시 뒤 안에서 끼이익-
하는 낡은 문소리를 내며 그가 고개를 내민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 '김태원'이란 분을 찾아왔습니다."
"예 제가 '김태원'입니다만..."
이 실장과 동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어뵈는 그를 보고서
는 의아해 한다. 모르는 사람이 그를 본다면 작게 봐도 육십대 초반이라
고 여길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정명우'라고 합니다. '이재훈' 실장님 아시죠? 예
전에 함께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 이재훈 실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
입니다."
하면서 명함을 전한다. 명함에는 '샤인 시스템 대리 정명우' 라고 적혀
있다.
"아... 그렇구만요."
"우선 들어가십시다. 오랫만에 오신 손님인데... 죄송합니다. 저 혼자 사
는 집이라 누추해서..."
정명우는 혹시 녹가루가 그의 검은 색 양복 위로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
면서 몸을 옆으로 뉘여 문을 통과한다. 집안은 온통 잡초 투성이였다. 도
대체 사람 사는 집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수선한 분위기가 절
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나무 판자 몇 개로 대충
못박아 지어 놓은 상자가 하나 보이고 거기엔 사람을 보고도 귀찮다는
듯 외면해 버리는 늙은 개 한 마리가 주름 투성이인 채 엎디여 있다. 왠
지 구부정한 그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놈은 작년에 저희 집 식구가 됐죠. 차에 부딪혀 길가에 버려진 놈을
제가 치료해주면서 키우게 됐습니다. 사고후유증인지 사람이 와도 저렇
게 멀거니 보고만 있답니다. 혼자 사는 처지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좀 적적했는데 그래도 저놈이 있으니 좀 낫습니다. 벽보고 중얼거리는
거 보단 나으니까요. 자 이쪽입니다..."
하면서 그가 안내하는 곳은 뒷뜰 쪽으로 나 있는 마루로 통하는 문이었
다. 마루를 통해 들어서면 양쪽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마주보며 위치해 있
고 안방문을 통해 들어서면 안방에서 다시 부엌으로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문, 그리고 마루에서 앞마당으로 향해 나 있는 샤시로 짜여진 유리문
이 있긴 하지만 이미 그 문들은 문의 역할을 상실 한 지 오래였고, 겨우
칸막이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문틈과 손잡이
에 몇 겹으로 쌓여있는 먼지들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근데 어쩌지요? 이 집에선 손님 대접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뭐 변변
히 차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내놓은 건 찌그러진 양은 접시에 담긴 삶은 고구마 몇 개와 보리차
였다.
"근데...실장이라고 했던가요?... 헛헛, 그 친구 출세했구먼. 하긴 똑똑
한 친구였으니까... 나랑 대학 동창이라오. 그쪽 말대로 둘이 한때는 같
이 일했던 적도 있었죠."
"작년 말에 저희 프로그램 개발실 실장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랬군요, 그건 그렇고...이 먼 곳까지, 그것도 부하직원을 보낼 정도
면 안부는 아닐테고, 오신 용건이 있을 테지요?"
"예...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얘기는 회사 기밀에 해당하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을 믿고 드리는 얘기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
다. 선생님도 아시겠습니다만 저희회사 주력 소프트웨어가 워드프로세서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희 회사에선 올해 새롭게 내놓을 버전에 음성 입ㆍ
출력기능을 첨가할 예정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자판으로 입력하던 방식을 대신해 음성으로 입력시키
고, 자판으로 입력하는 동시에 음성으로 출력이 되는 기능입니다. 하지
만 '속삭임'이란 이름으로 추진되던 이 프로젝트가 경쟁사인 진영 소프
트 쪽으로 흘려졌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 해 이내로 계획했던
이 프로젝트의 기한을 대폭 축소시켜 상반기 내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무리하고, 늦어도 하반기 초엔 제품으로 출시하라는 상부의 지시
가 내려졌습니다. 처음엔 실장님을 비롯한 개발실 직원들 모두가 무리라
며 이 지시에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신빙성 있는 정보이고, 또
한 이 프로젝트를 경쟁사 측에서 먼저 제품으로 출시할 경우 저희로선 상
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저희 회사에서 이 프로
젝트에 투자한 금액을 고려해 볼 때 회사의 존패 여부가 달린 문제라 결
국은 상부 지시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단, 무제한의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지요. 프로젝트
가 노출되었다면 회사 내부에 의해서일텐데 그걸 가려내는 일 조차 쉽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경쟁사 측에서 그 제품을 먼저 출시하고 저희 회사가 최악의 상태
에 놓인다면 그땐 누군지 알 수 있겠지요. 스카웃 형식으로 경쟁사 측으
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그땐 저희가 그 누군가를 밝
혀 낸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결국 저희 개발실에선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이 바로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입니
다. 사실 그 동안 저희 개발실에선 그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데 보단 선
생님의 거처를 알아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한 게 사실 입니다. 예전
에 선생님께서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설계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
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었다고... 그래서 저희
가 그 동안 추진해온 프로젝트를 선생님께 일임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실
장님께서 그만큼 선생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증거이고, 외부인에게 의뢰함
으로써 더 이상의 정보 누출은 막겠다는 생각이신가 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일 의뢰를 하러 온 셈이군요..."
"쉽게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김태원은 잠시 먼 데를 보다가 방안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담배갑을
집어든다.
"담배 하시겠소?"
"전 괜찮습니다."
김태원은 담배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삼켰다가 뱉어 내고는 한참이나
담배 연기만을 바라보고 있다. 타고남은 재가 점점 길어져 담배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다.
"보아하니 그쪽도 프로그래머 인 것 같은데 제가 질문하나 하지요. 상식
적인 질문입니다만 왜 그 직업을 택했습니까?"
"예? 선생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좀 의외입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인 질문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도 느끼시겠지만, 우선 사회 통념상 인정해 주는 직업이고, 남들
보다 앞서 갈 수 있으니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
론 그에 따른 경제적 보상도 충분히 뒷받침되니까요."
"남들보다 앞서간다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앞서가면 그만큼 끝도 일찍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전 그 끝이
란 게 없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끝에 다다랐다면 더 이상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없겠지요. 프로그램이란 건 발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
이고, 그 영역 또한 무궁무궁하지 않습니까?"
"그 영역 중의 일부가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능가했다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 설 곳은 어디일까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얘기하나 하지요. 지금 이 얘기는 그냥 흘러들으셔도 좋습니다. 그
냥 뭐 나름대로 가치 있는 얘기라 생각되시면 기억하셔도 좋고요... 어쨌
거나 뭐 좋습니다, 부탁하신 데 대한 대답은 그 다음에 하지요."
......................
사무실 안은 온통 어둠이다.
벽에 걸린 야광 벽걸이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알리며 희미하게 빛나고있고 사무실 한 켠에 자리잡은 컴퓨터 모니터가 조명 구실을 톡톡히 해 내
며 이 곳이 사무실이란 걸 알 수 있게 비스듬히 사무실을 비춰내고 있
다. 그리고 그 빛에 의지해 그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작
업중이다. 그는 몇 달 전 '거북선'이란 프로젝트의 프로그램 설계를 의
뢰 받았고, 지금 그는 그 일의 마무리작업에 열중이다. 그는 목뒤가 뻣뻣
해 옴을 느끼며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뗀다. 안경을 벗고는 콧등 근처를
주무르며 서너 번 크게 눈을 껌벅인다. 목을 뒤로 젖히며 주위를 둘러본
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바퀴가 달린 회전 의자를 한껏 뒤로 밀어내
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벽쪽으로 다가가 사무실 형광등의 스위치
를 켠다. 눈부심을 느끼며 미간을 좁힌다. 사무실 한켠에 놓여있는 커피
메이커에서 커피를 한 컵 가득 부어내고는 한 모금 유난히 큰 소리를 내
며 꿀꺽 삼킨다. 그날 따라 커피가 쓰게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뜨거워서
인지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며 커피잔을 그대로 내려놓는다. 그는 다시 컴
퓨터 앞에 앉는다. 그가 강의하는 K대 학생들의 레포트를 이메일로 접수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메일 창이 열리자마자 모니터가 깜박이
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란 메시지가 띄워진다. 그가 편지 읽기를 클릭
하자 편지의 내용을 미처 보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진다.
"축하합니다. 귀하께서는 저희 라이트 이벤트에서 마련한 사은 행사에 당
첨되셨습니다. 저희 라이트 이벤트사는 그 동안 선남 선녀들에게 건전한
만남의 장소를 마련해 주고 다양한 이벤트로써 수십 커플을 탄생시켜 왔
습니다. 그 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귀하를 위해 조그만 행운을 마련했
습니다. 이번 이벤트의 특징은 컴퓨터 추첨에 의해 당선된 귀하께 저희
이벤트를 제공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벤트의 내용은 저희가 보유하고 있
는 미혼 여성들의 신상 데이터를 귀하의 신상 데이터와 비교하여 가장 성
공 확률이 높은 여성 한 분을 선정하여 온라인 상에서 만나실 수 있는 자
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특별 이벤트인 만큼 참가비는 무료입니다. 지금
그 분은 저희 라이트 이벤트의 99번 대화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
금 즉시 라이트 이벤트사의 99번 대화방을 두드리십시요. 참고로 대화방
은 비공개이며 비밀번호는 귀하의 영문 이니셜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시
간 되시길 빌겠습니다."
그는 의자를 당겨 앉고는 안경을 고쳐쓴다. 그리고 안에서 작은 흥분 같
은 것이 이는 것을 느끼며 메일 끝에 적혀 있는 IP주소를 한 자, 한 자
천천히 입력해 넣는다. 잠시 뒤 라이트 이벤트라는 회사로고가 보이고 그
는 대화방을 클릭한다.
99번 대화방을 찾아 메일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영문 이니셜 K-T-W를 차
례로 입력해 넣고 잠시 기다린다. 이윽고 대화방의 창이 열리고 잠시동
안 푸른 색 배경화면만이 모니터를 통해 빛을 뿌려대고 있다.
"저...김태원님 맞나요?"
"예, 제가 김태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전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아 예...오래 기다리셨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첨엔 좀 망설였습니다.
또 무슨 광고를 할려는 건 아닌가 해서요... 요즘 스팸 메일이 문제잖아
요."
"그러시군요... 저도 첨엔 회사측의 제의를 받고 망설였어요. 하지만 회
사 이미지도 좋고, 무엇보다 공인된 회사라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죠."
공인된 회사라... 그는 이벤트 회사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라
이트 이벤트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공인된 회사라
는 건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실례가 안된다면 성함을 여
쭤봐도 될까요?"
"제 이름은 김성희예요. 근데 태원님은 무슨 일 하세요?"
"아 예...전 프로그램 설계사입니다. 그냥 쉽게 프로그래머라고 이해하시
면 될 겁니다. 그리고 가끔 대학에 강의도 나가지요."
"직업이 두 개나 되세요? 바쁘시겠네요."
"일 욕심이 많아서 일이 생기면 하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죠. 그걸 남이
하는 걸 못 봐요.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바쁜거야 뭐 다 마찬가지 아니
겠습니까? 성희님은 직업이...?
"예, 전 교사예요. 음악을 가르치고 있죠. 언제부터 그 일을 하셨어요?"
"저 같은 경우엔 일찍부터 이 일을 하게 돼 있었죠. 중ㆍ고등학교 시절부
터 컴퓨터를 끼고 살았어요. 그리고 대학 진학할 때 전공도 그쪽을 택해
서 박사학위도 그쪽에서 받았고...프로그래머란 직업은 대학 졸업하자마
자 가졌었구요 강사는 박사 학위 받고부터였지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성공했다는 것 모두
가 부러워요. 게다가 전 컴퓨터는 이제 막 초보티를 벗은 정도라..."
"누구에게나 다 자기가 못하는 걸 하는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좋아서 이 길을 택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란 직업
은 무지 재미없는 직업입니다. 실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땐 여러 명이 파
트 별로 나누어 작업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할당된 부분을 프로그래밍 할
땐 어디에 쓰이는 건지도 모르고 단순 노동을 할 때가 많죠. 저야말로 성
희님이 부럽군요. 매일 학생들과 지내시면 마음도 젊어 지시겠고... 더군
다나 음악과 함께 지내시니..."
"태원님 음악 좋아하세요?"
"한때는 열광적으로 좋아했었죠. 요즘엔 바쁘다보니 음악을 찾아서 듣긴
어렵더군요. 이래뵈도 전 힙합 세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이던가
요,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그룹이 힙합이란 걸 처음 시도하면서 우리나라
에도 힙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죠. 음악 뿐 아니라 거리의 패션
그리고 기성세대에 반대하는 사고방식에 까지도요... 그런 기억이 나는군
요. 그땐 한창 학생들에게 춤바람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공부 안 하
는 학생들에게 뭔가 할 일을 줬다는데 대해선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자칫 그 때문에 공부에 소홀해질까봐 학교측에선 상당히 고심했
던 걸로 기억합니다. 봄 소풍 때 '우리 반의 서태지'로 뜬 애가 있었어
요. 그때 벌써 나이트 클럽을 드나들던 애였는데, 반 대항 장기자랑 시
간에 그 애 춤으로 우리 반이 일등을 했었죠. 소풍 다음날 부터 춤을 가
르쳐달라던 애들의 빗발치는 요구 때문에 춤 강의도 하게되었죠. 그래서
수업 마치고 쉬는 시간마다 대 여섯명이 죽 교실 뒤에 서서 열심히 춤연
습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던지 실내화 바닥이 다 달아버렸어요. 그러다가 한
번은 복도를 지나가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그 탈선(?)의 현장을 목격하신
거예요. 결국 줄줄이 끌려가서 엄청 맞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지금 생각
해보니 남들은 갖지 못한 학창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라 더욱 값어치를 느
낍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발끝이 근질거리죠. 아마 그때 선생님께
들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엄청난 춤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
튼 전 학창시절에 음악과 함께 살았습니다."
"와 대단하시네요. 저한테도 그런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전 내성적인 편이라 활동적인 건 잘 하지 못해요. 그래도 직장생
활 하면서 지금은 많이 바뀐 편이죠. 지금의 제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다면 저도 그런 추억을 가질 수 있을텐데요... 누굴 가르치는 직업을 갖
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닮은 점이 많은 것 같군
요."
"정말 그렇군요."
"박사 학위까지 받으셨는데 그쪽에서 그 정도 성공하셨으면 남다른 노력
도 많이 하셨겠어요. 그 얘기 좀 해 주세요. 공부 안 하는 우리 애들에
게 좀 들려주게요."
"남다른 노력이랄 것 까진 없구요 전 시험 때마다 시력을 갈고 닦고, 공
부 잘 하는 친구들과 시험기간에만 유난히 친하게 지냈죠, 하하... 농담
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엔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사실 전 그리 유능한 프로그래머는 못되었습니
다. 그냥 선배들이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하는 마당쇠 스타일이었죠. 그
당시 선배들은 항상 심플한 유저 인터페이스를 강조했어요. 가끔 좀 치장
을 할라치면 야단까지 맞았습니다. 치장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실을 기하
라고...그 영향으로 저도 그 당시 프로그램 설계에 있어서 유저 인터페이
스의 설계에는 좀 등한시한 게 사실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박사 학위
를 받고 처음으로 강단에 서면서 강의를 맡았던 과목이 OS에 관한 것이었
습니다. 그때 한창 윈도우가 부흥할 때라 윈도우에 대한 강의에 중점을
두었는데, 그때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그 시기에 그런 강의를 맡았다는
것 자체가 제겐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선배들을 비롯
한 많은 동료들이 아직까지 심플한 유저 인터페이스만을 고집할 때, 그
때 그 강의의 영향으로 이미 전 그 반대편에 서서 많은 시도들을 하고 있
었으니까요. 제가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머의 길에서 성공이란 걸 하게 된
건 그런 시도들이 모여서 일겁니다. 그렇게 일하는 재미에 빠져 살다 보
니 이렇게 나이가 먹도록 혼자 살게 되었죠. 장가 갈 생각이 없는 건 아
닙니다. 선도 몇 번 봤죠. 하지만 선이란 게 그렇더군요. 선이란 게 어차
피 제 삼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만큼, 제 삼자가 어떤 기준이란
걸 만들어 놓고 상대를 찾기 때문에 이루어지긴 어렵더군요.
제가 만약 연애 결혼을 한다면 기준이란 게 나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기 때문에 상대는 어느 정도 공부를 했고, 재산은 어느 정도이고, 집안
은 어떻고...뭐 이따위 기준은 만들 필요가 없겠지요. 그저 서로 사랑하
고 날 이해해 줄 수 있으면 되니까... 선이란 게 이를테면 한쪽이 가진
데이터를 비교해서 그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링크시
켜주는 거, 뭐 그런 식의 생각이 들더군요. 예를 들자면 아무리 좋은 음
질의 음악파일을 갖고 있어도 워드 프로세서에서 실행해 봤자 실행이 안
되는 것이랄까...? "
"선이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링크시켜주는거라...? 역시 프로그래머 다운
생각이시네요."
"제가 처음 여기에 오기 전에 망설였던 이유중의 하나도 그런 것들이죠.
지금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저를 이해해 주는 여자
를 만나면 당장이라도 결혼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프로그래머다운 생
각이라...그거 꽤 중독성이 있는 거죠. 오래 컴퓨터를 사용하다보면 가
끔 실제 생활과 컴퓨터 안의 생활에 혼란이 오더군요.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컴퓨터상의 처리 방식이 떠오르지요. 방금 말했던 선에 대한 생각이
라든지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습관적으로 머릿속에선 프로그램
을 설계하고 있죠. 또, 가끔 사무실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면 윈도우에서
사용되는 '찾기'라는 기능이 떠오른다든지, 뭘 손으로 베껴 써야 할 일
이 생기면 '복사하기'란 기능이 떠오른다든지 뭐 이런 것들이죠... 한때
는 이게 병적인 증세가 아닌가 걱정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
도 잠시,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 이내 묻혀버리고 말죠. 하하...이
런 얘기까지 하다니...성희님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어머 그러세요? 저도 태원님에게 점점 호감이 가기 시작했는걸요."
"하하...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인가 봅니다. 몇 달 동안 맡아 왔던 프
로젝트도 거의 마무리지어졌고 성희님 같은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거기도 혹시 창이 있나요?"
"아 예. 물론 있고 말구요. 여긴 전망이 꽤 좋은 곳입니다. 20층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이죠."
"곧 날이 밝으려나봐요. 새벽의 푸른빛은 왠지 가슴을 설레이게 해요.
참 오늘이 토요일인 거 아세요?"
"그런가요? 요즘 일 마무리단계라 좀 바빠서 날짜 가는 줄을 모르겠군
요."
"하시던 일 거의 마무리 하셨다는데, 오늘 혹시 시간 낼 수 있으세요?"
"시간이요? 물론이죠."
"그럼 오늘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럼 언제가 좋을까요?"
"제가 연락처를 드릴께요. 오후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이건 제 핸드폰 번
호인데요
...XXX-XXX-XXXX.... 적으셨나요?"
"아 예... 그럼 제가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오후에 연락을 드리지요."
"그러세요. 전 이만 가봐야 할까봐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예,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전화기를 찾는다. 문득 그녀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해준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세 번 정도 들었을 때 저쪽에서 목소리가 전해온다.
"여보세요?"
"김성희씨 되십니까? 저 김태원입니다."
"아 예 김태원씨... 방금 라이트 이벤트사 대화방에서 채팅하셨지요?"
"예? 예..."
"어떠셨어요?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김태원씨가 방금 채팅하신 내용들
은 저희 회사에서 출품 예정인 채팅 전문 프로그램 '파트너'의 데모 버전
이었습니다. 방대한 데이터와 최대한 인간에 가까운 대화를 할 수 있도
록 고도의 알고리즘을 이용해 만든 프로그램으로 어떠한 대화도 가능하다
고 저흰 자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홍보기간이라서 정품을 주문하시면
3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 하실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시진 않을 겁니다. 그럼, 구입하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 한 개피를
천천히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고 깊이 한 모금 들이마신다. 담배 한 개피
가 모두 타들어갈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수화기는 그대로 손끝에서 미끄러져 내팽개쳐진 채 아직도 무언가를 옹알
거리고 있다.
얼마 뒤 담배 불이 꺼지자 그는 한 쪽 입 꼬리를 올려 피식- 웃기 시작한
다.
'그게 프로그램이었단 말이야...'
잠시 뒤 한껏 목을 젖히며 안에서 참았던 분비물을 토해내듯이 웃어 제낀
다. 웃음소리는 한없이 그의 입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와 온 방안을 메운
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흘흘흘-하며 괴음이 섞인 소리로 변한다. 한참 뒤
에 웃음이 멎을 무렵 그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그리고
워드 프로세서 창을 띄운다.'재훈아, 미안하지만 내가 부탁 하나 해야겠
다. 내가 그 동안 맡아온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거북선이라고... 그걸
네가 좀 마무리 해 줘. 내가 얘기 해 놨으니까 아마 내게 의뢰한 회사측
에서 곧 연락이 올 거야. 어렵진 않을 거야. 잠깐 마무리하고 테스트만
해 보면 되거든. 난 이제 사무실에 못 나올 거야. 내게 일이 좀 생겼거
든. 프로그램은 거북선이란 폴더 안에 있고 잘 마무리해서 그 회사에
보내면 돼.'
메일 창을 띄워놓고는 회사측의 E-메일 주소를 입력한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 맡기신 거북선 프로젝트는 제가 더 이상 할 수
가 없게 됐습니다. 대신프로그래머 한 명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일하는 이재훈이란 친구인데 그 친구라면 별 무리없이 거북선 프로젝트
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계약금은 날이 밝는 데로, 아니, 지금 즉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그는 메일을 보내고 사무실의 물건 하나 하나를 가지런히 챙기기 시작한
다.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사무실 문을 나선다. 문 옆에 걸려있는 거울
에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반백의 머리칼에 주름 투성이에다 등이 굽어있
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의 기도를 통해 후욱-하고 밀려 들어온다. 반
대편 도로에서 달려오던 자동차가 한 줌의 빛을 확 뿌리고 달아난다. 잠
시 아찔해하며 그대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그때 난 뭐랄까, 과녁으로 세워져 있던 음료수 캔 하나가 정확히 명중되
어 내용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명중이라는 기쁨
도 잠시 내용물이 바닥으로 다 흘러내릴 때 쯤엔 왠지 허전함 같은 게
저 밑에서부터 밀려오는 걸 느낄 수가 있었지.-
.......................
"어떻소, 꽤 재밌는 얘기지 않았소? 이재훈 그 친구한테 직접 해 주고 싶
은 얘기였는데 좀 아쉽군요. 참, 여기 오신 용건이...?"
"저희 속삭임 프로젝트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네...그러셨지요. 죄송하군요. 보시다시피 전 이렇게 살고 있습니
다. 바빠서 다른 데 손 쓸 겨를이 없군요. 이제 곧 논에 약도 치러 가야
하고, 갔다와선 누렁이 저녁밥도 줘야 하고... 일부러 이 먼 곳까지 찾
아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다른 길을 찾아보시죠."
정명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숲길을 거
의 빠져나올때 쯤 그는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젠장 벌써 노망이 들었군!'
그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버튼
을 누른다.
"실장님, 저 정 대리입니다. 집은 찾았지만 이미 김 선생님은 안 계십니
다.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주제넘게 이런 얘기를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그 동안 실장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직
장 상사로서 뿐 아니라 능력, 아니 실장님의 모든 것을 존경해 왔다고 해
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분명 실장님의 오판
인 것 같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좀 들어봤습니다만 듣고 난 지금
솔직히 그 동안 김 선생님께 투자한 비용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
다. 속히 다른 조취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카페 게시글
소설
단편
더블클릭
문자향
추천 0
조회 55
02.02.03 23:40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