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연정을 본 우리는 큰 기대를 갖고 금시당(今是堂)으로 향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금시당은 밀양 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특히 금시당 앞에 있는 매화나무는 특별히 ‘금시매(今是梅)’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금시당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담장을 따라 돌면서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다. 금시당 앞에 서 있는 금시매는 분홍빛과 흰빛을 같이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막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금시당(今是堂) 앞의 ‘금시매(今是梅)
금시당(今是堂)이란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내용 중 ‘覺今是而昨非’ 중에서 ‘今是’를 취한 것이라 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늘은 잘한 일이요. 벼슬살이에 얽매였던 지난날은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금시당 이광진(今是堂 李光軫)은 1546년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 성균관 전적을 거쳐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그후 낙향하여 이곳에 금시당을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전한다. 금시당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나무 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보니 금시당 이광진이 직접 심은 것이다. 안내문을 토대로 계산해 보니, 수령이 450년이나 된 고목이었다.
금시당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곳에는 원래 백곡서원(栢谷書院)이 있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백곡서원은 월연 이태(月淵 李台), 금시당 이광진(今是堂 李光軫) 등 여주이씨가 자랑하는 다섯 분을 모시고 있었다. 밀양 답사를 통해서 새삼 느낀 것은, 밀양은 안동(安東) 못지않은 유향(儒鄕)이라는 사실이었다. 곳곳에 서원이 있었고, 곳곳에 유서 깊은 고가(古家)가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내력을 가진 고목(古木)들이 밀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밀양의 유서 깊은 유적들은 대개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과 관련이 있었다. 금시당 앞에도 밀양강이 휘돌아 나가는데, 강물로 인한 토양의 유실을 막기 위해 옹벽을 설치한 것이 보였다.
‣ 금시당을 보고 난 후 답사 일정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영남루를 보고 난 후 점심을 먹자는 의견이 많았다. 영남루(嶺南樓) 주변에는 주차 공간이 없다 하여 영남루에서 가까운 강변에 봉고 버스를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하였다.
유모차와 사람이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으로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오르니 웅장한 모습의 영남루가 보인다. 영남루를 올라가는 중앙 계단은 막아 놓았는데, 처마 위에는 교남명루‘(嶠南名樓)’, ‘영남루(嶺南樓)’, ‘강좌웅부(江左雄府)’라 적힌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어 밀양 영남루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양 영남루 모습
밀양 영남루 현판
안내문을 읽어보니, 영남루가 있던 이 자리에는 신라 때 세워졌던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밀양 군수 김주(金湊)가 폐사된 절터 위에 누각을 신축하고 영남루라 이름지었다. 조선 세조 때 강숙경(姜淑卿)이 크게 중수하였고, 중종 때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가 다시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때 심흥(沈興)이 다시 중건하였고, 순조 때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하면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능파각(凌波閣)을 통해 영남루에 올랐다. 아름드리 기둥이 떠받치는 영남루의 천정은 매우 높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寒氣)를 느끼게 한다. 영남루에는 목은(牧隱)과 퇴계(退溪) 등 선현들의 글이 20여점이나 걸려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1843년 당시 밀양부사 이인재(李寅在)의 11살 아들인 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7세였던 아들이 썼던 ‘영남루(嶺南樓)’ 현판이었다. 매우 큰 글씨인데, 힘차고 짜임새가 있어 7세 아동의 글씨라고 보기 어려웠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대들보와 도리, 서까래가 그대로 다 보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양쪽의 충량(衝樑)이었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몸체를 표현하기 위하여 아래로 휘어진 목재를 사용하였다. 영남루와 같은 높은 건물이 아니라면 저런 형태의 충량을 설치하지는 못한다. 창방 위에는 다양한 형태의 화반(花盤)이 장혀를 받치고 있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모습은 활짝 피지 않은 연꽃봉우리가 화병(花甁)에 꽂혀 양쪽으로 늘어진 모습이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화반은 密陽鄕校의 누각인 풍화루(風化樓)에서도 볼 수 있어서 밀양 고건축의 지역적 특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승천하는 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남루 동편의 충량
천정에 조각된 용머리(龍頭)를 보는데, 같이 답사를 하셨던 어느 분이 영남루 천정에 있는 용의 수가 얼마냐는 질문을 던진다. 헤아려보니 열이었다. 그런데 그림으로 표현된 용이 하나 더 있다고 말씀하신다. 살펴보니 추녀 밑에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사신도는 일반인들에게는 고구려 고분벽화로 유명한데, 사신(四神)은 도교에 뿌리를 둔 사방신(四方神)으로 청룡, 주작, 백호, 현무를 말한다.
우리 일행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영남루 마루바닥에 앉아 송강 정만호 선생님과 백송현 선생님의 창을 들었다. 우리 전통 문화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배우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러움과 존경의 마음이 일어난다.
‣ 병원을 경영하시는 이장희 원장님은 우리 답사 모임에 가장 열성적인 분이다. 옛날 대학병원 레지던트 시절에 밀양에 파견되어 근무하신 적이 있다고 하신다. 그 당시의 경험과 유교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밀양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주셨다. 이원장님은 원래 밀양이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고장인데, 그 중에서 최고는 설봉돼지국밥이라고 추천한다. 우리는 봉고를 타고 설봉돼지국밥집으로 이동하여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만족스럽다.
‣ 향교(鄕校)는 말 그대로 국가에서 지방에 설치한 학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설치되어 유학 교육에서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여 왔다. 향교의 위상과 기능이 조선시대보다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지방의 많은 향교는 지방 유림의 구심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밀양향교는 임란 이후인 1602년에 지어졌다. 밀양은 안동과 더불어 二大 儒鄕이라 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바로 지어졌다는 것은 당시 밀양 유림의 힘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1820년에 다시 건물을 옮긴다. 당시 밀양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는 것은 대성전 영역의 지형이 낮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향교의 건물 배치는 前學後廟의 형태가 많다. 그러나 밀양향교는 서쪽에 대성전이, 동쪽에 명륜당이 위치한다. 향교에 들어갔을 때, 향교 일을 보시는 어르신이 계셔서 간단한 설명도 들었다. 대성전 앞 안내문에 있는 文廟 配享 人物을 보면서,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정치와 붕당, 학맥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박약회 소답사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할 문묘 배향 인물의 결정이 정파와 학파의 이해득실에 많이 좌우되었음을 느낀다. 조선 중기에는 영남의 사림파 인물이, 후기에는 경기와 충청 지방의 인물이 많이 배향되었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영남 사현의 문묘 배향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되었다.
밀양향교 대성전 앞에 서 있는 문향배향인물 배치도
3월 말, 조선일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고운 최치원의 초상화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초상화는 원래 경남 쌍계사(雙磎寺)에서 제작된 것인데, X선 투과를 하니, 덧칠된 부분 밑에 숨겨진 그림이 발견되었다. 덧칠된 그림에는 화병과 서적을 쌓아놓은 모습인데, 그 밑그림에는 동자승이 숨어있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누군가가 덮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대구 박약회 홈페이지에 있는 고려대 김언종 교수의 글을 보면, 율곡 이이도 말년까지 불교적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고운이나 최치원은 모두 문묘 배향 당시에, 불교와 관련된 점 때문에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던 분들이다.
어떤 사회건 사상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유림에서도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숭모(崇慕)하면서 다른 사상에 배타적인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와 당․송(唐․宋) 시대에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면 어떻게 공자와 주자 같은 위대한 선생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대성전 앞에는 붉은 동백꽃이 피어있었다. 이 꽃을 보면 유행가 ‘울릉도 트위스트’가 생각난다. 강렬한 빛깔의 동백꽃은 어여쁜 아가씨의 붉은 입술처럼 매혹적이다. 나의 이런 선입견 때문이겠지만, 동백은 향교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성전 앞에 동백꽃이 피어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자, 옆에 있던 이한방 교수님은 ‘동백꽃은 꽃잎이 통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선비들의 모임 명칭도 ‘동백회’로 정할 정도로 선비들이 사랑하는 꽃이니, 향교 안에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밀양향교 대성전 앞에 피어있는 매혹적인 븕은 동백
향교를 나오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겨 정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를 다시 살펴보았다. 장주초석(長柱礎石)이 기둥을 받치고 있다. 혜산서원 앞에 있던 格齋先生神道碑閣에도 장주초석이 있었다. 사명당의 표충비각(表忠碑閣)에도 장주초석이 있었다. 비바람으로부터 기둥을 보호하기에는 유용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이렇게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 창방(昌防) 위에서 장혀(長舌)를 떠받치고 있는 화반(花盤)은 영남루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첫댓글 배선생님~
한옥의 구조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학후묘가 아닌곳에는 서울의 성균관, 대구, 경주향교도 있음을 봤읍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유교 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