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명산 순례/휘슬러 산
대자연의 선율 품고 노래하는 산길 글·사진 이남기 사진작가·캐나다 통신원 boriwool@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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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쿠버에서 북으로 달려 휘슬러에 도착할 즈음에 만나게 되는 표지판. 시적인 이름을 가진 싱잉패스 또한 가리발디 주립공원에 속한다. |
휘슬러(Whistler)란 이름은 스키, 스노보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북미에선 첫째, 둘째로 꼽는 이름난 스키 리조트가 있는 곳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무대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연평균 강설량이 무려 9m를 넘는다.
굳이 인공으로 눈을 만들어 뿌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연설이 풍부하고 해발 2000m를 넘는 봉우리 또한 많으니 이만하면 천혜의 스키장 입지조건을 갖춘 것이 아니겠는가.
1960년대에 개발된 휘슬러 스키장에 이어 그 바로 옆에 있던 블랙콤(Blackcomb)까지 스키장으로 개발되어 대규모 리조트를 이루었다.
200여 개의 슬로프와 33개의 리프트가 그 규모를 대강이나마 짐작케 한다.
매년 2백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휘슬러를 찾는다고 한다.
겨울철이야 스키 인파로 만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요즘 같은 여름철 비수기에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것은 좀 뜻밖이었다.
그 대부분은 산악자전거(MTB)를 즐기는 마니아들로, 어디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두 바퀴에 의지해 그 가파른 길을 쏜살같이 내려 꽂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 혹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이한 MTB 상품도 눈길을 끈다.
가이드를 동반한 MTB 패키지 상품도 있고, 헬기를 타고 높은 지점으로 이동해 라이딩을 즐기는 헬리 바이크(Heli Bike)도 있다.
숙박 2일을 포함한 헬리 바이크가 1인당 375달러를 받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MTB를 즐기기 위해서만 이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휘슬러 빌리지(Whistler Village) 주변을 한가롭게 산책하며 여름휴가를 보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을 안에 있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망중한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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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잉패스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면 경사가 한결 완만한 오르내림이 시작된다. 자연스레 주변 풍경에 시선이 빼앗겨 발걸음이 자꾸 늦어진다. |
싱잉패스와 정상 잇는 9.5km 트레일
기왕에 휘슬러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1860년대 이곳을 탐사한 영국 해군이 스쿼미시를 지나 계곡을 오르면서 높은 산 하나를 발견한다.
그 산 이름을 런던(London)이라 붙였지만 얼마 지나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산에 많이 서식하는 땅굴다람쥐가 짝을 찾아 불어대는 소리가 꼭 휘파람 소리 같아 휘슬러란 이름을 얻게 된다.
산 이름과 더불어 마을 이름까지 함께 얻게 된 배경이다.
휘슬러 지역은 원래부터 살리시(Salish)란 원주민 부족이 수천 년간 사냥으로 생계를 잇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1910년대 알렉스(Alex)와 머틀(Myrtle)이란 젊은 부부가 알타 호숫가에 정착해 낚시꾼들을 위한 로지를 운영하면서부터 외부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동안은 도로가 없어 접근이 어려웠던 오지였다.
그 후 1965년 스키장으로 연결되는 99번 하이웨이가 건설되고 나서야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그 동안 리조트는 몇 번 들른 적이 있지만 휘슬러 산(Whistler Mountain·2160m)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다.
휘슬러란 단어 자체도 가슴을 뛰게 하지만 오늘 산행하려고 하는 뮤지컬 범프(Musical Bumps)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뮤지컬 범프란 이름에서부터 감미로운 음악이 절로 흘러나올 것 같지 않은가. 흔히 산에서 접하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산 자체가 하나의 음악인 곳을 우리는 걸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은 음악을 살포시 밟으며 산행을 하는 것이다.
통상 뮤지컬 범프라 하면 특정한 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싱잉패스(Singing Pass)에서부터 휘슬러 산 정상까지 9.5km 거리의 트레일을 말한다.
피치먼스 연봉(Fitzsimmons Ranges)의 서쪽 구간에 해당되는데, 그 안에 있는 봉우리나 계곡 대부분이 음악과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다.
고개를 지나는 바람 소리 때문에 ‘노래하는 고개’라 이름 붙여진 싱잉패스도 그렇고, 뮤지컬 범프 트레일에 있는 오보에 봉(Oboe Summit)과 플루트 봉(Flute Summit), 피콜로 봉(Piccolo Summit) 등 악기 이름을 딴 봉우리들도 그런 경우이다.
뮤지컬 범프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산행 기점에서 싱잉패스로 오르려면 하모니 계곡과 플루트 계곡, 오보에 계곡을 지나야 하고 마지막에는 멜로디 계곡(Melody Creek)을 따라야 한다.
이처럼 봉우리와 계곡마다 악기나 음악 용어를 쓰고 있어 음악과 담을 쌓은 사람일지라도 이곳에 들면 음악적 정취를 물씬 느낄 것 같다.
음악의 향기에 취해 걷는 산행이라면 아무리 걸어도 피곤을 모르리라. 산행 기점부터 싱잉패스까지가 11.5km, 싱잉패스에서 휘슬러 산 정상까지가 9.5km이니 도합 21km의 쉽지 않은 길이다.
등반 고도가 1300m나 되고 소요 시간도 7~8시간이 걸린다.
여름철 낮 길이를 생각하면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후 4시까지 휘슬러 정상에 도착해 리프트를 타야만 하산길 8km 거리를 단축할 수가 있다.
만약 운행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 기나긴 슬로프를 걸어 내려가야 한다.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는 두 다리에게 결정을 맡기는 게 상책이 아닌가 싶다.
휘슬러로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해 차 안에서 간략하게 오늘 산행 코스를 설명한다.
일행은 밴쿠버 원로산악인 강해강 선생 내외와 조명숙씨. 강 선생 내외는 꾸준히 산을 찾던 열성파였지만 부인의 무릎 통증 때문에 얼마간 산을 찾지 못했다가 오늘은 무릎 상태를 시험해 보겠다며 산행에 따라 나섰다.
혹 뒤떨어질 경우를 예상했는지 이웃에 사는 조명숙씨를 방패막이로 불러냈다.
모녀처럼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라니 서로 의지가 되리라. 강해강 선생은 10여 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음에도 꾸준히 산을 찾은 덕에 건강을 회복한 분이다.
지금은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산행 기점은 휘슬러 빌리지 안에 있는 버스 정류장. 산악자전거가 휙휙 내리 꽂히는 슬로프 옆을 따라 500m쯤 걸어 오르면 좁은 벌목도로를 만난다.
피치먼스 계곡을 따라 길을 4km 정도 걸어야 예전에 사용하던 원래의 산행 기점이 나온다.
지금은 차량을 통제하는 관계로 이 지루한 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여기서부턴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선다.
곧 가리발디 주립공원 경내로 들어서 몇 개의 계곡을 건넌 후 멜로디 계곡을 따라 꾸준히 고도를 올리면 싱잉패스에 다다른다.
싱잉패스까지는 숲 속 그늘을 지나기 때문에 햇빛을 가릴 수는 있지만 시야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싱잉패스는 지정학적으로 2개의 작은 산군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뮤지컬 범프가 속한 피치먼스 연봉과 그 반대편 스피어헤드 연봉(Spearhead Ranges)이 싱잉패스를 사이에 두고 나뉘는 것이다.
둘 다 설원과 빙하를 품고 있는 고산들로 그 위용이 만만치 않다.
뮤지컬 범프는 싱잉패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적설량이 엄청난 곳이라 한여름을 제외하곤 보통 트레일을 폐쇄한다.
그래서 눈이 녹아 없어지는 7월에서 9월까지가 이곳을 찾기엔 적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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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을 시작해 처음에는 산악자전거 트레일과 나란히 걷는다. 휘슬러는 겨울에는 스키와 스노보드로, 여름엔 산악자전거로 유명세를 떨치는 곳이다. |
휘슬러 빌리지의 그림 같은 파노라마
싱잉패스는 또한 늦은 여름에 온갖 야생화가 만발하는 산상화원으로 유명하다.
아직은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시기인지라 야생화가 그리 흔치 않지만, 8월 중순이면 자주색 루핀(Lupine)에 오렌지색 나리꽃, 붉은색 페인트브러시(Paintbrush)까지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능선을 덮을 것이다.
그때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다시 이곳을 찾아오자고 속으로 다짐해 본다.
뮤지컬 범프 트레일을 타고 오보에, 플루트, 피콜로 봉을 지나 휘슬러 정상으로 가는 여정은 땡볕 속임에도 그리 힘든 줄 모른다.
급하지 않은 오르내림 탓도 있지만 사방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절로 입이 벌어지는 멋진 풍경이 줄지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플루트 봉에서 내려다보는 치카무스(Cheakamus) 호수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검은 엄니’라 불리는 블랙터스크(Black Tusk·2315m)의 독특한 위용에 또 다시 넋을 잃는다.
사방을 둘러싼 설산들은 또 어떤가. 마치 누군가의 지휘에 따라 웅장한 합창곡을 부르는 듯한 이런 느낌은 나만의 환상은 아니리라. 휘슬러 정상으로 다가갈수록 길옆으로 엄청난 높이의 눈 제방이 다가온다.
사람 키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니 3~4m는 쌓여 있는 셈이다.
리틀 휘슬러(Little Whistler)에 있는 찻집에서 허브 차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중에는 가끔 이런 찻집을 만날 수가 있다.
산행을 하면서 산꼭대기 찻집에서 차 한 잔 즐길 수 있는 이 사람들의 여유 또한 부러워진다.
이제 정상까지는 30분 거리. 곤돌라 운행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휘슬러 정상에는 이눅슈크(Inukshuk)란 돌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북극해 연안에 사는 이누이트(Inuit)족의 조형물을 본 따 만든 것으로 2010년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 조망 또한 일품이다.
흰 봉우리와 울창한 숲, 골이 깊은 계곡과 옥빛 호수 등이 휘슬러 빌리지의 그림 같은 분위기와 합쳐져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역시 휘슬러는 이름값을 하는 곳이다.
<인포메이션>
뮤지컬 범프는 99번 하이웨이를 타고 휘슬러로 가야 한다.
휘슬러는 밴쿠버에서 북쪽으로 120km 가량 떨어져 있다.
차로 이동하면 약 2시간이 걸린다.
밴쿠버 시내나 공항에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서도 갈 수가 있다.
헬기나 수상비행기를 빌려 가는 사람도 있다.
밴쿠버 근교에선 가장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휘슬러 빌리지엔 115개의 호텔과 콘도, 민박집이 있어 5400개 이상의 객실을 제공한다.
연중 어느 때 가더라도 즐길 거리가 많은 곳이다.
차를 이용해 가는 경우는 밴쿠버에서 1번 하이웨이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다가 홀슈베이에서 99번 하이웨이로 갈아타야 한다.
주변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99번 하이웨이(Sea to Sky Highway)를 따라 올라가면 휘슬러 빌리지가 나타난다.
빌리지 안에 있는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휘슬러와 블랙콤 중간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걷는 것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곤돌라와 리프트를 타고 휘슬러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먼저 곤돌라를 타고 해발 1850m의 라운드하우스 로지(Roundhouse Lodge)까지 오른 후 거기서 스키 리프트로 갈아타고 정상(2160m)까지 오른다.
라운드하우스 로지뿐만 아니라 정상 주변에도 하이킹을 겸해 산책할 만한 곳이 많다.
곤돌라 운임은 성인 1인당 29.95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