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문학 2023년 가을호에 실린 구경분 작가의 추모글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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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시로 김구연 선생님을 추억합니다
구경분
2023년 6월 12일 독서하시는 모습 그대로 이 세상 소풍을 마치신 김구연 선생님은 늘 건강하신 모습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어 아직도 건강하신 모습 그대로 우리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전화를 걸면 좋은 글 많이 쓰라고 다정히 대답해 주실 것만 같은, 자유공원 주변을 거닐다 보면 우연히 마주칠 것만도 같은, 그런 생각이 언뜻언뜻 생기는, 그래서 아직도 선생님께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내셨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 요즈음입니다.
눈에 뜨이지 않아 무관심했던 마음에 죄송한 마음조차 사치라는 생각을 하며 문득 선생님께서 그동안 보내주셨던 책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아동문학가님 중 김구연 선생님만큼 아름다운 동시를 쓰신 분이 또 계실까 싶도록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동시를 보며, 문득 젊은 후배 문인들에게 선생님 동시를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1942년생인 선생님은 1971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남들보다 젊은 나이에 문단에 나오셨습니다. 문단에 나온 지 3년 후엔 1974년에 첫 시집 『꽃불』로 제2회 새싹문학상을 수상하셨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76년에 동화집 『자라는 싹들』로 제9회 세종아동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2년 후인 1978년에 시집 『빨간댕기 산새』로 제13회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5년 동안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에서 가장 손꼽히는 상 셋을 내리받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흐름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창작활동과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으시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신 훌륭한 선배님이시지요. 동화도 많이 쓰시고 동시도 많이 쓰셨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동화보다 동시가 더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와의 이별 연습을 꿈에도 하지 않았던 김구연 선생님의 동시를 들고 나왔습니다. 너무 젊어서 아직 김구연 선생님을 아직 모른다거나 타 장르의 문인이어서 선생님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읽은 동시 중 아름다운 동시 몇 편을 뽑아 소개합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시에 따로 설명을 다는 것이 어쩌면 사족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45년 전에 출간된 선생님의 시집 『빨간댕기 산새』에서 몇 편의 시를 골라 보여드리겠습니다. 가끔은 어문 규정이 지금과 다른 것이 눈에 보입니다만 선생님의 의도를 살려 그대로 실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따로 있으되 부제로 '빨간댕시 산새'에 연번호를 붙여 쓴 시입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시들입니다. 45년을 거슬러 올라가 출간된 책입니다만 지금도 읽으며 가슴에 절절함이 새겨지는 것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선생님 마음을 담았을까 가히 짐작이 되는 작품들입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맑고 밝고 따스했던 김구연 선생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아가위
빨간댕기 산새 · 1
빨간
열매
아가위
한 개
따먹고
머리
꼭지
새빨간
산새
되었다.
빨간댕기
빨간댕기 산새 · 2
추수 끝낸 가을 들녘에
나갔다 보았다
빨간댕기
산새 한 마리.
동구밖 콩밭 도랑가
뽕나무 가지에
오무마니 앉아 있었다.
건너마을 청기와집 손주 딸
학질만 앓다 죽은
달순이.
댕기 곱게 들이고
대문간에 기대어 서서
지나 다니는 나를
말끄러미 자꾸만 쳐다보던
아, 빨간댕기
산새 한 마리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내 가슴 속에
빨간댕기 산새 · 4
너는
수천 수만이면서
오직 한 마리
내 가슴속에 산다.
어느 길목에선가 너는
나와 한 번쯤 만났을 듯도 싶은데
언제 보나 너는
아는 체 모르는 체
한결 같고나
언제나 너는 낯설고
언제나 또 너는 낯익은
아, 이름모를 한 마리 작은 산새여!
내게로 오렴
빨간댕기 산새 · 5
거리에서도
꿈속에서도
생각이 난다
머리꼭지 빨간 너.
잊을까
하면 할수록
새로워지는
너의 모습.
이리로 오렴
내게로 오렴
빨간댕기 산새.
너의 눈 속에서
빨간댕기 산새 · 10
내가 내 빈 가지에 날아와 앉기까지
나는 한 그루 이름 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내 가지에 날아와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함으로 해서
나에게 이름이 지어지고
얼었던 땅이 녹아 눈이 트이고 잎이 돋는
나는 한 그루 꽃나무가 되었다.
퍼내어도 내어도 마르지 않는
너의 눈 속에서 샘솟는 무한정한 따스함
알알이 내 정수리에 부어지고 박혀서
봄을 깨우고 기르는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느 때 어디서이든
들여다 보아도 보아도 지치지 않는
첫 새벽 산이슬 보다도 맑은 너의 눈속에서
나는 마냥 철없이 뛰노는 어린나무가 되어 버리고
오로지 세상은 너와 나
너와 나 하나뿐인걸
빨간댕기 산새.
귀여운 나의 새
빨간댕기 산새 · 12
나에겐 사랑하는 새 한 마리 있다네
이마꼭지 빨간 귀여운 나의 새.
맨 처음 나는 그 산새
노래소리에 반했었다네.
그런데 지금 나는
빨간댕기 그 산새 전부를 사랑하고 있다네.
나는 걸음마 못하는 한 그루 어린나무
산새 내 가지에 모물려 노래 부를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네.
날이 저물어 그 산새 제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나는 가고 싶어도 따라갈 수 없다네
속으로 울음소리 죽이고 혼자 운다네.
푸른 나무로 자라서
빨간댕기 산새 · 17
오랜
세월이
흐르더래도
내 가슴 속에
씨앗 하나 품고
흙에 묻히어
푸른 나무로 자라서
네가 즐겨 날아와 앉아
노래 부르게 하리
빨간댕기 산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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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분
1991년 《아동문학연구지》 동시로 등단. 동시집 『무당벌레』 외 동화집 8권, 시집 5권이 있음.
gbg5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