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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大坪里)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법정리(里).
대평리의 동쪽은 마천산령(馬川山嶺)의 산줄기가 놓여 있으며, 서쪽은 구봉산(九峯山)[191m]에서 뻗어 나온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산지의 산기슭에 취락들이 들어서 있다. 산지 사이 중앙부를 칠곡군 지천면에서 발원한 하빈천이 흐르며, 하빈천의 충적 평야인 대평들이 하천 주변으로 펼쳐져 있다. 대평리는 남서쪽으로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남쪽으로 무등리 그리고 동·서·북의 삼면이 칠곡군 지천면과 접하고 있다.
본래 대구부 하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4.1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하북면의 대평동, 지산동 및 두천동을 병합하여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대평동이 되었다.
-1988.5.1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대평리가 되었다.
-1995.3.1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어,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대평리가 되었다.
들이 넓은 지역이다.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현재 알기가 어렵다. 대평리(大坪里)는 이 지역의 자연 마을에서 나온 명칭으로, 평탄하고 반듯한 지형에 마을이 있어 농사가 잘되고 평화(平和)로운 마을이라고 하여 처음에 대평(大平)이라고 하였다가, 그 후 한자를 대평(大坪)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대평, 두천, 모산(지산) 마을이 있다. 대평마을은 대평리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두천(豆川)마을은 마을 앞에 내가 있다하여 두천이라 이름 붙여졌다. 모산은 마을 앞에 두 개의 연못이 있다 하여 지산(池山)이라고도 부른다.
대평리는 하빈면의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대평 1리와 대평 2리 두 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2.9㎢이며, 총 188가구에 374명[남자 197명, 여자 177명, 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5.12.31 현재). 대평리 인구는 하빈면의 인구인 4,360명[외국인 제외]의 8.6%를 차지하고 있다. 대평리 앞으로 군도(郡道)가 통과하여 칠곡군 지천면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경부 고속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대평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시설 원예 농업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지역의 자연 마을 두천동(豆川洞)은 마을에서 콩 농사를 많이 지어 콩 두(豆) 자를 써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대평리의 「달성 하빈 들소리」는 대구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평리(大坪里)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에 위치한 리(里).
면의 남부에 위치하며 오십천이 흐흔다. 동북쪽에 간대산(干臺山:일명 將峙)이 있다. 남쪽에는 문필봉(文筆峯) 및 김령(金嶺)이 있다.
평지촌(平地村), 유곡(柳谷), 사무곡(士武谷)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이곳은 처음부터 대평(大坪:큰드루)이라 불리던 곳이다. 마을의 주요 유적지로는 정낭총과 석탑이 있다.
대평리(大坪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 있는 리(里).
넓이 10ha 이상의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으며 경치 좋은 넓은 들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장리, 배잔리, 대사리의 일부를 합쳐 대평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건너말, 닷절(대사), 배잔, 신론, 웃넝골 등이 있다. 대사리와 평장리의 지명을 합쳐서 대평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건너말은 닷절 건너쪽 마을을 말한다. 닷절은 큰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배잔은 대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중앙에 있는 산이 술잔 모양이라 붙인 지명이라 한다. 신론은 평론 남쪽의 새로 된 마을을 말한다. 웃넝골은 위쪽 마을을 뜻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펑리(大平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廣德面)에 있는 법정리(里).
동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의 원성리, 서쪽으로 광덕면 신덕리·원덕리, 남쪽으로 광덕면 원덕리, 북쪽으로 광덕면 신덕리·행정리 및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의 유천리와 이웃하고 있다. 대평리는 광덕면의 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국수봉을 뒤로한 평지에 자리하였으며 낮은 산지가 분포한다. 서부 지역은 해발 고도 200~300m의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고, 나머지 중부, 북부, 남부 및 동부 지역은 대부분이 해발 고도 100m 내외의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중부, 북부, 남부 및 동부 지역을 남서~북동 방향으로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지방 하천인 곡교천은 그 유역에 대상의 범람원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 북쪽에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다. 구릉성 산지의 완사면은 곳곳이 밭과 과수원으로 개발되어 있고, 범람원 평야의 대부분은 논으로 개발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천안군 원이면 대평리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인 천안군 원이면 대평원, 피덕리, 취성리를 통폐합하여 대평리라 칭하고 충청남도 천안군 광덕면 대평리라 하였다. 이때 천안군 원이면 대평리가 천안군 광덕면 대평리로 변경되면서 ‘대평리’라는 명칭이 그대로 유지된 데서 유래한다.
-1963년에 충청남도 천원군 광덕면 대평리로,
-1991년에 충청남도 천안군 광덕면 대평리로,
-1995년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대평리로,
-그리고 2008년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대평리로 각각 변경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대평(대평원), 창골, 피득이(피덕)마을 등이 있다. 대평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평평하고 넓은 들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창골마을의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청동기 시대의 구리창이 나왔다 하여 비롯되었다. 피득이 마을은 대평 남서쪽에 자리하는 마을이다.
면적은 3.85㎢로, 경지 면적은 논이 0.63㎢, 밭이 0.22㎢이며, 총 147가구에 296명[남자 153명, 여자 14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2.8.31 현재). 대평 1·2리의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대평 2리에 용원 레미콘 천안 아스콘, 새한 환경, 동화 농산 등의 기업체가 있다.
곡교천과 그 지류 유역 농경지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하천 주변 산기슭 완사면에서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국도 23호선이 남부, 중부 및 동부를 북동~남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고, 시도 23호선이 굴곡하면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두 도로는 대평리의 중부와 남부에서 연결되고 있다. 기타 도로들은 중서부를 지나면서 지방도와 시도에 연결되고 있다.
대평리(大坪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北面)에 있는 법정리(里).
동쪽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서쪽으로 북면 운용리·양곡리, 남쪽으로 양곡리, 북쪽으로 진천군 백곡면 및 입장면 도림리와 이웃하고 있다. 대평리는 북면의 북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목천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목천군 북면 대산리, 소평리, 대야리 및 곡간리를 통폐합하여 대평리를 개설하여 충청남도 천안군 북면에 편입하였다. 이때 통폐합 대상인 대산리, 소평리, 대야리 및 곡간리 중 대야리의 ‘대’ 자와 소평리의 ‘평’ 자를 따서 대평리(大坪里)라 부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3년에 충청남도 천원군 북면 대평리로,
-1991년에 충청남도 천안군 북면 대평리로,
-1995년에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대평리로,
-그리고 2008년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로 변경되었다.
비교적 평평한 지대이며 동쪽과 남쪽으로 약간의 산지가 있다.
북쪽과 동쪽 경계부는 대부분 해발 고도 300~400m의 비교적 높은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해발 고도 3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해발 고도 200여m 내외의 중앙부에는 비교적 완사면의 저평한 지형이 발달해 있다. 여기에 남서~북동 방향으로 평천천의 지류 소하천들을 중심으로 수지상(樹枝狀)의 하계망이 형성되어 있는데, 곡대천과 같은 소하천들은 대부분 구릉성 산지의 곡간을 흐르면서 충적지를 이루고 있다.
구릉성 산지의 완사면 곳곳은 밭과 과수원으로 개발되어 있고, 해발 고도 200여m 이하의 곡간 충적지의 대부분은 논으로 개발되어 있다. 곡대천 등 병천천의 지류 유역 농경지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하천 주변 산기슭 완사면에서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면적은 7.92㎢로, 이 중 경지 면적은 논이 0.57㎢, 밭이 0.48㎢이며, 총 114가구에 214명[남자 107명, 여자 10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2.8.31 현재).
대평 1·2리의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자연마을에는 밤나무골, 대골, 평전말, 깊은골, 싸리재, 개천골, 조비장골, 곡간리, 대야촌, 안각골(인각골), 노적골, 점말, 불부골, 챙경이골, 두루봉, 쇠죽곡, 중방박골, 대산, 조고리골, 지장골, 용어물, 가다골(가덕이)이 있다. 밤나무골은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개천골은 산이 둘러 있고 하늘만 보이는 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비장골은 마을 안에 비장을 지내던 조비장의 무덤이 있어서 유래한 명칭이고 곡간리는 곡간, 대야촌은 큰 대장간, 안각골은 안갓골, 안강골이라고도 부르는데 평전말 남쪽에 있으며 안씨의 강당터가 마을 안에 있어서 각각 붙여진 명칭이다. 가다골은 가덕동, 소평리, 가더기라고도 부르는데 평전말 옆에 있으며 장사를 지내기 전에 이곳에 시체를 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노적골은 놋그릇과 놋젓가락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부골은 철을 생산하기 위해 풀무하던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점말은 질그릇과 옹기를 생산하던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챙경이골은 공인(工人)들, 즉 장이들이 살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장골은 지장을 심었던 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곡간리(曲干里)는 마을이 산속 깊이 있어서 개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는데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할 당시 이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 곡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야촌(大冶村)은 댓골, 대야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철 일을 하던 큰 대장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루봉은 예전에 곡간이 사람들이 산제를 모시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갈월넘이는 진천군 갈월로 넘어가는 고개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타 도로들이 대평리의 곳곳을 지나고 있는데, 이 기타 도로들은 서쪽에 인접한 운용리의 동쪽 경계부를 굴곡하면서 남북 방향으로 지나는 국가 지원 지방도 57호선에 연결된다.
대평리 490번지에 천안시 동남구 보건소 위례 진료소가 있고, 대평 2리에 대평 광산이 있다. 유적으로 대평 2리에 국보 제209호 보협인 석탑(寶篋印石塔)이 출토된 대평리 사지가 있고, 사찰로 대평 1리에 운지암이 있다.
대평리(大坪里)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에 있는 리(里).
대부분의 지대가 비교적 완만한 구릉성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서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대평, 개미, 새터, 점골 마을 등이 있다. 대평 마을은 큰 들이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개미 마을은 가야산 이라고도 불리며 게봉산 밑에 위치한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새터 마을은 대평 북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워진 지명이며, 점골 마을은 사기점 있었다 하여 명명되었다.
대평리(大坪里)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에 있는 리(里).
본면의 북부에 위치한 평야지대의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대박, 종평, 주막께 등이 있다. 대박은 함박이라고도 부르며 함박산 밑이 되어 붙은 이름이다. 종평은 구시라고도 부르며 대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예전에 시장이었으며 앞에 큰 들이 있다. 주막께는 예전부터 주막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대박과 종평의 이름을 따서 대평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대평리(大坪里)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법정리(里).
남쪽으로는 정읍과 경계를 이루는 넓은 평야지대이며 북쪽으로는 원평천이 흐르고 벽골제와 가깝다. 남쪽으로 정읍과 경계를 이루는 평야 지역이다. 부량면 소재지이다.
조선 말기 김제군 부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장리·신평리·신정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평리라 하였다. 대장의 ‘대’자와 신평의 ‘평’자를 따서 대평리(大坪里)라 하였다.
-1995.1.1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부량면 대평리가 되었다.
면적은 3.27㎢이며, 총 149가구에 311명[남자 153명, 여자 1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09.9 현재). 경지 면적은 밭 0.02㎢, 논 2.85㎢이다.
국도 29호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주요 기관으로 부량면사무소와 벽량초등학교·우체국·보건지소·농협 등이 있다.
자연마을로 신평(新坪)·대장(大場)·신성(新成)·대신(大新) 등이 있다. 신평은 넓은 평야에 새로 생긴 들이라는 뜻으로 본래 새들이라고 부르던 것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새롭게 이름 붙인 것이다. 대장은 넓은 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큰 들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넓은 평야에 마을이 있고,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신성은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불무 명당이 있다 하여 불무재라고도 한다. 대신은 대평리 안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평리(大坪里)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리(里).
동락산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고도가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 곡성 수원지가 있어 수원은 풍부한 편이다.
자연마을은 대리, 마평 마을이 있다. 대리 마을은 대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마평 마을은 말처럼 생겼다 해서 마평 마을이라 불린다.
대평리(大坪里)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 있는 리(里).
동으로 위안리와 경계를 이루는 산악지역이다.
대양(大陽), 평촌(坪村), 신평(新坪)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대양은 마을 형성 당시에는 마을 이름을 따뜻한 햇빛이 하루 종일 비치는 마을이라하여 "양지뜸"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후부터 대양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평은 들 중앙에 생긴 마을이라 평촌마을에서 이주하여 형성한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평이라 이름 붙여졌다.
대평리(大坪里)
전라남도 순천시 월등면에 있는 리(里).
대부분 낮은 산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월룡천이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호아산이 있다. 화지앞들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둔터(둔대), 점등 등이 있다. 둔터는 옛날 군사가 주둔한 곳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점등은 점등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평리(大坪里)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에 있는 법정리(里).
운수면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면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한들[大坪]의 이름을 따서 대평이라 하였다.
가야산(伽倻山)의 남동 비탈면에서 발원한 대가천(大加川) 변에 형성된 충적 평야 지대이다. 산지지형이 많은데 마을은 골짜기나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대가천뿐만 아니라 태봉재와 칠령재 등에서 발원된 많은 계곡이 흐르는 지역이어서 충적지의 면적이 넓다. 대표적인 골짜기로 나망골·노시골·돌다리골·동골·망근점골·목골·배앗골·사붓골·서당골·울내리골·작은배앗골·절골·쪽짓골·칭이골·큰골·탈박골·태봉골·해무랑골 등이 있고, 가물넘들·도배미들·새들·앵글들·장댓들·한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고개로는 든봉재·칠령재·태봉재 등이 있다.
운수면에서 가장 넓은 마을로 운수면 북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말기 성주군 흑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06년(고종 43) 고령군에 편입하였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성동·내성동·평촌동을 병합하여 대평동이라 하고 운수면에 편입하였다.
-1988.5.1 운수면 대평리가 되었다
면적은 4.76㎢로 농지 82만 1000㎡, 임야 3.29㎢, 기타 65만 7000㎡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총 136세대에 242명(남자 118명, 여자 12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0.3 기준).
대평1리·대평2리로 이루어졌으며, 자연마을로는 흑수(黑水)·망건점·새터·가마골·대밭마 등이 있다.
대평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흑수는 옆으로는 대가천이 흐른다. 우물을 파면 돌이 검고 또한 물빛이 검어 흑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깥에 있는 큰 마을을 바깥흑수[外黑水], 골짜기 안쪽마을을 안흑수[內黑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흑수면과 흑수원이 있어서 대가천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다. 망건점은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망건을 팔던 곳이 있어 이름이 붙여졌으며 뒷산이 망건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또 이 마을에 금광이 있어 만금점이라고도 불린다. 새터는 안흑수와 바깥흑수 사이에 10여 농가가 살고 있는 마을인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 신기로 불린다.
가마골은 바깥흑수와 개울을 건너 이웃한 조그마한 마을로 골짜기 모양이 가마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물을 파면 가마 밑을 뚫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지 않았다고 한다. 바깥흑수와 가마골 사이에 있는 대밭마는 20여 세대의 농가가 있는데, 옛날 이곳 언덕에 대나무가 많아 붙인 이름이다. 달리 대밑·죽전(竹田)이라고도 한다.
군도 8호선이 안흑수에서 대밭마를 거쳐 성산면으로 연결되고, 국가지원지방도 67호선이 북동쪽으로 희봉재를 넘어 성주군으로 이어진다. 주산업은 벼농사와 한우 사육이며, 마늘도 많이 생산하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가마터인 고령 대평리 분청사기요지(高靈大坪里粉靑沙器窯址), 고령 대평리 석조여래입상(高靈大坪里石造如來立像), 1838년 세운 매국정, 1839년 세운 염수재(念修齋) 등이 있다. 대평리 석조여래입상은 과거에 이곳이 고려시대 절터였다는 추측을 하게 해준다.
대평리(大坪里)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에 있는 리(里).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작은 하천이 서편으로 흐른다. 큰 들이 있으므로 대평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한들, 못안, 유동, 웃마, 새마마을 등이 있다. 한들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대평리의 그것과 같다. 못안마을은 대평못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유동마을은 버드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웃마마을은 대평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새마마을은 대평 옆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대평리(大平里)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에 있는 법정리(里).
팔공산(八公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하나의 지맥이 중간에 갑자기 낮아졌다가 다시 높이 솟아 대왕산(大王山) 봉화산사(烽火山寺)의 산을 형성한다. 이 산맥이 또 남으로 뻗어 그 끝이 금호야산에 닿는 곳에 골짜기가 형성되고 그 끝에 큰 규모의 풍락 저수지[사일못]가 있다.
못 안에 평야지와 구릉이 있는데 이곳이 대평리이다. 평지에 자리하였으며 경지가 넓게 분포하는 농촌마을이다. 대평리는 청통면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평리는 조선 말 영천군 북습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에 영천군 산저면(山底面) 12개 동리, 영천군 북습면 35개 동리, 청하군 죽남면(竹南面) 하거동과 신녕군 아촌면(牙村面) 대평동 일부를 통폐합하여 영천군 청통면을 신설하였는데, 이때 대정동(大亭洞)과 평천동(平村洞)을 병합하여 대평동(大平洞)이라 하고 청통면에 편입되었다.
-1988.5.3 동(洞)을 이(里)로 바꾸면서 대평리가 되었고,
-1995.1.1 영천시·영천군 통합으로 영천시 청통면 대평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평촌동, 사랏골, 못골, 대정동, 장구동마을 등이 있다. 평촌동마을은 대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들가에 자리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랏골마을은 삼한 때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못골마을은 사일못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대정동마을은 평촌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밀양 박씨의 큰 정자가 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장구동마을은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대정동은 평촌동 서편에 위치하는 박씨(朴氏)가 주성을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로, 밀양 박씨 13대손 박일제(朴逸堤)가 건립한 대은정의 이름을 따서 대정이라 하였다. 평촌(平村)은 들판을 내려다보면 한눈에 바다와 같이 평평하게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평리의 면적은 3.9㎢이며, 인구는 130가구, 270명으로, 남자가 137명, 여자가 133명이다(2012년 3월 기준).
주민 편익 시설로는 대평리 경로당이 있다. 저수지인 풍락 저수지는 농림 수산 식품부가 추진하는 2012년도 농어촌 테마 공원 조성 사업에 선정되어 대규모 테마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지방도 909호선이 지나며, 역사적 유적으로는 정덕재(靜德齋)·상덕재(尙德齋)·대은정 등이 있다.
대평리(垈平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동남쪽에 있는 법정리(里).
마을 대부분의 지대가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북서쪽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다. 대평리는 거창 위천의 남부, 황강의 서부 지역으로 거창 위천과 황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거창 위천과 황강의 범람으로 인해 형성된 범람원으로 큰 평지[한들]가 발달한 곳이다. 위천 변의 자연 제방에는 취락이 입지하여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고 배후 습지는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대평리는 거창읍에서 위천의 남쪽과 황강의 서쪽에 발달한 범람원에 있는 마을이며, ‘한들 가운데 큰 마을’이라는 의미로 ‘대평리’라 하게 되었다. 대평리의 중동은 동류하는 거창 위천의 남쪽에 있어 아래내박이라고도 하였다.
대평리는 조선 시대 천외방(川外坊)의 중리(中里)였으나 이후 중동(中洞)이라 불리었다.
-1937년 거창면이 거창읍으로 승격되면서 거창면 중동에서 거창읍 중동으로 개칭되었다.
-1988.8.1부터 거창군 조례 제991호에 따라 대평리로 개칭하였다.
대평리는 중동 마을, 대평, 들성 마을, 밭들, 새동네, 또랑, 배나뭇골, 참나무징이 마을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또랑 마을은 마을 앞으로 도랑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배나뭇골 마을은 배나무가 많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참나무징이 마을은 참나무가 있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대평리는 1,719세대에 남자 2,071명, 여자 2,001명으로 총 4,072명이 거주하고 있다(2016년 5월 말 현재). 세대수는 1980년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평리의 동남쪽에 광주 대구 고속 도로의 거창 IC가 있어 외부와의 접근성이 용이하다. 대평리의 주요 시설로는 거창군 교육 지원청, 경남 도립 거창 대학교, 창남 초등학교 등의 교육 시설과 거창 소방서, 거창군 농업 기술 센터, 한국 전력 공사 거창 지점 등의 관공서가 있으며 거창 버스 터미널도 있다. 최근 조성된 거창 사과 테마파크 공원도 대평리 남쪽 정장리와의 경계부에 있다.
대평리(大坪里)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에 있는 리(里).
북쪽으로 태봉산(胎峯山)이 우산리(牛山里)와 경계(境界)하여 마을 뒤를 막아주고 서쪽으로는 대가저수지가 있어 마을 앞 고성평야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대가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마을 앞의 대평천과 함께 마을을 감싸고 앞뒤로 흘러 밤내(栗川)와 합류한다. 대평마을과 율촌마을로 나뉜다. 대평(大坪)은 넓은 들을 가진 동네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 있는 야산인 태봉산(胎峯山)에 대한 전설과 느티나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율촌(栗村)은 흔히 밤내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밤내는 율천(栗川)의 순수 우리말로서 옛날 고성천(율천) 가장자리에 밤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대평리(大坪里)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에 있는 법정리(里).
남강과 진양호로 둘러싸여 있고 대부분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대평면은 진주시의 서쪽에 위치하는 농촌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산청군 단성면, 서쪽으로는 진주시 수곡면, 남쪽으로는 진주시 내동면, 동쪽으로는 진주시 명석면·판문동이 접하고 있다.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 서면(西面)의 서신대리(西申大里), 침곡리(針谷里), 가을동리(加乙洞里), 대평리(大坪里)였던 것이 임진왜란 후에 대평리로 통합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면서 대평면(大坪面)으로 바뀌었다.
-1914.3.1에는 부령 제111호 (1913. 12. 29. 공포)에 의하여 대평면(大坪面), 신풍면(新豊面), 마동면(馬洞面), 침곡면(針谷面), 곤양군 곤명면 본촌동 일부를 통폐합하여 대평면(大坪面)이라 하고 그 속리를 대평리(大坪里), 신풍리(新豊里), 내촌리(內村里), 당촌리(堂村里), 하촌리(下村里), 상촌리(上村里) 등 6개 리로 하였다.
-1995.1.1 법률 제 4774호(1994. 8. 3.)에 의거 진양군에 속하였던 대평면이 도농 복합형 진주시로 통합되었다.
대평리는 예부터 깊은 골짜기 안에 맑은 물과 넓은 들이 있어 곡식과 채소들이 풍부하였으므로 ‘한들’, 혹은 ‘큰들’이라 불리었다.
진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평면은 진양호의 수몰 지역으로 하천 주변에 비교적 좁게 펼쳐진 범람원 지역을 제외하면 150~200m 정도의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현재 대평리 지역은 수몰에 따른 이주 단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마을로 고도가 비교적 낮은 저평한 지역을 이루고 있다. 진양호 상수원 보호구역 상류 지역으로 지역 개발이나 토지 이용이 다소 제한적이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과거에는 벼농사와 무농사가 대부분이었지만, 현재는 도시 근교형 시설 원예 농업이 발달해 있다.
남강댐 보강공사로 새로 조성된 대평리가 준도시 지역으로 조성되었다. 대평면의 중심지인 대평리는 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대평면사무소를 비롯한 행정 기관과 상업 기능이 위치하고 있다. 대평리는 진양호 순환도로를 통하여 시내 중심지에서 약 20㎞에 위치하고 있다.
대평리는 진주시 서부에 있는 대평면의 행정마을로 대평면사무소가 입지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어은, 대평, 옥방, 수시동 등이 있다. 어은(漁隱)은 댐수몰 이전에는 154호로 대평면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강가에는 수몽석이 즐비하게 깔려있어 경관이 좋을 뿐아니라 은어, 눈치, 치사어, 피라미 등 수십종의 민물고기가 숨어산다고 하 여 어은(漁隱)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대평(大坪)은 넓은 들이 있어 곡식과 채소들이 풍부하였으므로 한들, 혹은 큰들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투시동은 골의 모양이 선인독서지형(仙人牘書之形)으로 중국시인 자미(自美)두보(杜甫)가 이곳에 와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평리 옥방마을은 기원전 약 500년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 곳이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사 발굴된 옥방1호 주거지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 유적지에서는 가락바퀴, 그물추, 흙구슬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석기, 숫돌,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긴목항아리, 겹아가리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주요 기관으로는 한평초등학교, 수곡파출소 대평치안센터, 대평우체국, 북부농협 대평지점, 대평면 보건지소 등이 있다. 그리고 진양호 일주도로, 선사시대 유물전시관, 물안개공원, 고산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호), 동산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진주대평정용균효행문서 및 정려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1호), 망향비와 망향루 등 풍부한 관광 자원을 갖추고 있어 관광 명소로 부상할 전망이다. 문화재로 대평리 지석묘군, 옥방(玉房) 선사유적이 있다.
대평리(大坪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에 있는 법정리(里).
마을 뒤로 야반산[342m] 자락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양 옆 아래로는 인곡천과 덕곡천이 흐른다. 지산저수지가 있으며,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이다.
대평리의 북으로는 이목리, 서로는 덕곡리, 동으로는 인곡리, 남으로는 예곡리, 지산리가 있다.
진북면의 옛 이름은 진해현 북면이다. '여지도서'에는 방리 이름으로 처음 나오며 이후 지리지에도 확인된다. 1895년(고종 32)에 진주부 진해현 북면이었다가 1908년(순종 1)에 창원부 진북면이 되었다. 이후 1910년에 마산부 진북면이 되었고 1914년에 창원군 진북면이 되었으며 1995년에 마산시 진북면이 되었다. 진북면은 진해현의 진과 진해현의 북면을 각각 취해 만든 한자어 지명이다.
'경상도 읍지'에 나오는 대산리(大山里)는 지금 대평리(大坪里)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대산리가 '경상도 읍지'에서 진해현 북면에 속한 방리로 나오나 '영남 읍지'에서 대평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한국 지명 총람'에 대평리(大坪里)는 큰 들 가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평’은 ‘큰 들’을 뜻하는 ‘한 뫼’에 가까운 표기로 읽어야 한다. ‘한 뫼’의 ‘한’은 크다[大]의 뜻이고 뫼는 들[坪]을 뜻하는 표기로 볼 수 있다. 한편 대평리의 옛 이름인 대산리의 ‘대산’도 ‘한 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산’과 ‘대평’은 ‘한 뫼’를 나타낸 등가 표기이다. 대평 마을 동남쪽에 있는 들을 함들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한 뫼’에서 변이된 ‘함 뫼’가 ‘함 들’로 대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산리는 ‘큰 들에 있는 마을’이라는 생성 의미를 지니는 ‘한뫼 마을’을 차자한 지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대평 등이 있다. 대평은 본래 마을이 큰 들 가에 위치하여 대평이라 하였는데, 후에 대평리가 되었다. 대평리에는 지산 저수지가 있다.
마산 대평리 고분군은 대평리(大坪里) 대평 초등 학교를 에워싼 해발 50~60m의 구릉 일대에 있는 원삼국 시대와 가야 시대의 고분군이다. 주로 구릉의 남·서쪽에 입지하며 30여기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마산 대평리의 유물 산포지 및 조개 더미는 대평리 대평 초등학교를 에워싼 해발 50~60m의 구릉 일대에 있는 원삼국시대와 가야시대의 유물산포지이다. 주로 구릉의 북쪽에 위치하며 유물의 분포지가 매우 넓은 것으로 보아 당시의 집자리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산포지의 아래쪽에는 가야 시대 조개 더미[패총(貝塚)]가 있는데 조개 더미의 퇴적층에서 유물 산포지의 출토 유물과 동일한 유물이 발견된다.
대평리(大坪里)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에 있는 리(里).
마을 뒤쪽으로 산이 있고 앞쪽으로 유하천이 흐르는 농촌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한들, 양동, 샛터, 대평이 있다. 한들은 큰 들 가운데라는 뜻으로 한들이라고 불린다. 대평도 큰 들이라는 의미로 명명되었다. 양동은 고려, 조선 때에는 현청의 소재지였고 또한 양동면의 소재지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평리(大坪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리(里).
바다를 바라보는 평지에 자리한 해안지역으로, 수산업이 주로 행해지는 곳이다. 넓고 평평한 저지대에 자리했으므로 대평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대평, 알동네, 동동, 한밭마을 등이 있다. 대평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대평리의 그것과 같다. 알동네마을은 대평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동마을은 알동네 동쪽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한밭마을은 큰 밭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대평리(大平里)
자강도 우시군 북서부에 있는 리.
북쪽은 부흥리(富興里)·북하리(北下里)·오상리(吾上里), 동쪽은 우상리(雩上里), 남쪽은 평상리(平上里), 서쪽은 상평리(上坪里)·하평리(下坪里)와 접한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면이 폐지되면서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면 평장리와 운룡리가 합쳐져 신설한 우시군 대평리가 되었다. 이때 군과 함께 자강도에 이관되었다.
전반적인 지형은 저산성 산지로서 평균 높이는 230m이다. 리에서 가장 높은 산은 동부에 있는 도매봉(586m)이고 하천으로는 평장천이 흐른다. 산림은 리 면적의 68%를 차지하며 주요 수종은 참나무·피나무·자작나무 등이다.
경작지 가운데 논이 5.3%, 밭이 74.4%, 과수원이 6.6%, 뽕밭이 13.7%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쌀·콩 등이고 배·포도·자두 등의 과일도 많이 생산된다. 고등중학교, 인민학교와 같은 교육기관과 병원이 있다. 교통은 우룡령(473m)을 넘어 우시읍으로 가는 도로와 평안북도 벽동군 동주리로 가는 도로가 있다. 군소재지인 우시읍까지는 19㎞이다.
대평리(臺坪里)
평안북도 피현군의 남서부에 있는 리.
북쪽은 용유리(룡유리, 龍遊里)·피현읍, 동쪽은 동상리(東上里), 남쪽은 성동리(城東里), 서쪽은 용천군(룡천군) 쌍룡리(雙龍里)·학흥리(鶴興里)와 접한다. 용천군 동상면 대평동·상북동·봉곡동이 1949년 10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각각 리로 바뀌었고 1952년 12월 면이 폐지되면서 합쳐져 신설된 피현군 대평리가 되었다.
대부분 지역이 200m가 안 되는 구릉성 산지와 평야로 되어 있다. 산림은 리 면적의 60%를 차지하며 주로 소나무숲이다. 이밖에도 인공림으로 조성한 일본잎갈나무 숲, 아까시나무 숲, 밤나무 숲이 곳곳에 있다.
군에서 경작지가 많은 곳으로 경작지 중 밭이 60%, 논이 28%, 과수원이 8%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옥수수이며 군내에서 밀을 많이 재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리에는 고등중학교, 인민학교, 병원이 있다. 교통은 동부로는 성동리~대평리~피현읍 간 도로가 지난다. 군소재지인 피현읍까지는 5㎞이다.
대평리(大坪里)
평안남도 북창군 중부에 있는 리.
북쪽은 송림리(松林里)·풍곡노동자구와 접하며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북창노동자구, 남쪽과 서쪽은 용산리(룡산리, 龍山里)와 마주한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면이 폐지되면서 덕천군 잠도면 대평리 일부가 신설한 북창군 대평리가 되었다. 1967년 10월 일부 지역이 용산리와 양촌리에, 1990년 10월에는 일부 지역이 북창노동자구에 편입되었다.
대부분 지역은 대동강 유역의 충적지로 되어 있다. 중부에는 관투봉(395m)을 비롯한 낮은 산들이 있다. 산림은 리 면적의 약 42%를 차지한다. 경지면적에서 논이 약 9%, 밭이 약 91%를 차지한다. 밭농사로는 무·배추를 많이 재배한다. 대동강물은 공업용수와 관개용수로 이용된다. 리에는 고등중학교, 인민학교, 병원이 있고 군소재지인 북창읍까지는 6㎞이다.
대평리(大平里)
황해북도 서흥군의 동남부에 있는 리.
북쪽은 화봉리(花峰里)와 신계군 은점리(銀店里), 동쪽은 평산군 임산리(림산리, 林山里)와 와현리(臥峴里), 남쪽은 청포리(靑浦里)와 평산군 와현리, 서쪽은 양사리(楊沙里)·남한리(南漢里)와 접한다. 서흥군 매양면 대평리·월농리·녹안리가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면이 폐지되면서 합쳐져 대평리가 되었다. 1954년 10월 황해도가 황해남·북도로 분할되면서 황해북도에 속하였다.
지형은 멸악산맥에서 뻗어내린 지맥들에 고정산(438m), 황룡산(516m), 약대산(507m)을 비롯한 비교적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리의 중앙으로는 서흥강과 그 지류 월은천이 흐른다. 산림은 리 면적의 약 90%를 차지하며 주요 수종은 신갈나무·떡갈나무·소나무·잣나무이다.
경작지에서 밭이 68%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콩·쌀·팥·고구마이다. 특히 누에고치와 고기 생산은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리에는 고등중학교, 인민학교, 병원이 있다. 교통은 서흥~신계 간 도로가 있으며 군소재지인 서흥읍까지는 10㎞이다.
대평리(大坪里)
황해북도 신계군의 북서부에 있는 리.
북쪽은 수안군 철산리(鐵山里), 동쪽은 원교리(院橋里), 남동쪽과 남쪽은 지석리(支石里), 남서쪽은 사정리(沙井里), 서쪽은 대정리(大井里)와 접한다. 지명은 예부터 큰 벌, 큰 들판이라는 의미를 가진 ‘한두루’라 부르던 것을 한자 이름으로 옮긴 것이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면이 폐지되면서 적면 대평리 일부와 와화리 일부로 이루어진 신계군 적여면 대평리와 흑천리·승평리가 합쳐져 신계군 대평리가 되었다. 1954년 10월 황해도가 황해남·북도로 분할되면서 황해북도에 속하였다.
지형은 멸악산맥의 지맥에 솟아 있는 기대봉(331m)을 비롯한 낮은 산들이 리의 경계를 따라 둘러서 있고 가운데에는 평야와 구릉들이 있다. 동쪽 경계로는 예성강(례성강)이, 가운데로는 예성강의 지류 대평천·대정천이 흐르며 그 연안에는 대평평야·삿감평야가 펼쳐져 있다.
리 면적에서 산림은 약 50%를 차지하며 주요 수종은 떡갈나무·신갈나무·소나무이다. 경작지에서 밭이 82%를 차지하는 밭농사 중심 지역으로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콩·수수·팥·쌀·고구마이다. 또한 예로부터 크고 맛 좋은 배가 많이 생산되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리에는 고등중학교, 인민학교, 병원이 있고 군소재지인 신계읍까지는 2㎞이다.
대평리(大坪里)
황해북도 연산군의 남서부에 있는 리.
북쪽은 상곡리(祥谷里), 북동쪽은 연산읍·생금리(生金里), 남동쪽은 도치리(道峙里), 남쪽은 수안군 신대리(新垈里), 남서쪽은 연탄군의 오봉리(五峰里), 서쪽은 평양특별시 상원군 수산리(水山里)와 접한다. 지명은 상대리와 하대리, 평지원에서 ‘대’자와 ‘평’자를 딴 것이다.
수안군 연암면 양곡리·상대리·하대리가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면이 폐지되면서 통합되어 신설한 연산군 대평리가 되었다. 1954년 10월 황해도가 황해남·북도로 분할되면서 황해북도에 속하였다.
지형은 남쪽 경계로 뻗은 언진산맥에 시루봉(880m)이 솟아 있으며 서쪽 경계에는 대청산(873m)을 비롯하여 비교적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동쪽 경계로는 배미천이, 가운데로는 이 하천으로 흘러드는 대평천이 흐른다. 대평천의 하류에는 한국전쟁 후에 건설한 대평저수지가 있다.
산림은 리 면적의 86%를 차지하며 주요 수종은 떡갈나무·신갈나무·소나무이다. 경작지에서는 밭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콩·팥·쌀·고구마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꿀은 예부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리에는 고등중학교, 인민학교, 병원이 있고 군소재지인 연산읍까지는 7㎞이다.
대평리(大平里)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에 있던 행정구역.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과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편입·분리되었다.
금강 연안에 위치하여 대평평야가 넓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대평평야의 수해를 막기 위해여 세워진 대평제방이 있었다. 자연마을로는 구대평이 있었다. 구대평은 대평리의 본 마을로 금강 연안의 큰 들에 위치하여 대평이라 이름붙여졌다. 1910년에는 감성에 있는 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와 대평장이라 하였는데 1946년 큰 장마로 온 동네가 강으로 변하여 이재민들이 거의 용포리로 옮겨간 후에는 새로 지은 10호 정도만 살고 있어서 구대평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