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국전쟁' 개봉 다이어리 16편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여성의 대변자 이승만'
영화 '건국전쟁'이 4.10총선 한복판에 돌풍으로 등장했다. 2021년 처음 '이승만'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 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달려 들어 '그거 하면 다친다'고 하던 때와 비교하면 불과 3년 만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2024년 2월 14일 현재 누적 관객수는 38만 명을 넘어섰다.
하루 종일 울려 대는 휴대폰, 확인해 보기가 겁날 정도로 몰려 드는 문자들, 인터뷰 요청에다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일까지 아마 태어나서 이렇게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낸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 수록 오늘도 쓴다. 이 자체가 분명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 영화를 만들면서 울었어요?"
관객들중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흠치며 마지막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본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울고,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울었다. 그게 궁금했는지 어제는 어떤 기자가 물었다. "왜 영화를 만들면서 울었어요?"
글쎄... 이유가 뭐였을까? 기억 나는 대로 더듬어 보면 한 열 번은 되는 것 같다. 미안해서 울었고, 거짓에 침묵한 나 자신이 비겁해서 울었고, 그냥 이웃집 할아버지 같아 보여서 울었고, 그의 순수한 애국심에 감동해서 울었다. 그중에서 크게 울었던 순간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최초로 여자 아이들만의 학교를 만들 때의 이야기였다.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의 백성은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서 하와이까지 건너왔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망망대해 태평양을 건너 온 것이다. 봉건적 유습과 가부장제로 가득했던 조선의 아버지들에게 딸 아이는 사실 별로 쓸모가 없었다. 하루 종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교육 같은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 조선 아이처럼 생긴 여자 아이가 길에 버려진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이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제대로 글이나 언어조차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런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는 사실이다. 여자 아이를 노예처럼 미국인들에게 팔아버리는 조선의 아버지들도 있었다. 인륜을 무시할 정도로 고통스런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먹을 게 넘쳐 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상상도 안 가는 일일 것이다.
노예처럼 팔려갈 운명에 놓인 그 여자 아이를 맨 몸으로 들이닥쳐 주먹 다툼까지 벌이면서 호텔에서 구출한 사람 역시 이승만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그냥 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을 텐데, 이승만에게는 한 명의 조그만 여자 아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약한 자, 힘 없는자, 가난한 자, 그리고 여성들을 위해 그는 살았다. 그것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여자 아이들만으로 구성된 학교를 처음 만든 이유였다. 그것도 다같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숙학교였다. 먹고 살 걱정 때문에 여자 아이들 교육은 늘 뒷전에 미뤄두었던 조선의 아버지들을 설득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들을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그렇게 교육을 해야 했다.
그의 행적을 잘 아는 이승만 전문가들은 그 하나하나의 사연과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정말 눈물 나는 이야기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승만은 자신의 일기에 '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계집아이들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처음으로 모든 여성에게도 남성들과 차별 없이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치 하늘의 선물처럼 여성들의 투표권이 부여됐다. 서구 선진국들에서조차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던 시절 이야기다.
1949년 토지개혁 또한 근본적으로는 힘 없고 가난한 소작농들을 위한 파격적인 조치였다. 여타의 다른 나라들에서 아직도 토지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 이 개혁적 조치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그때 토지개혁이 이뤄지지 않고 땅을 가진 지주들이 지금까지 토지의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극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비정상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것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국민이 가장 행복한 때는 현명하고 유능하며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났을 때이다'
그런 존재를 70년 동안 우리는 정반대의 존재로 믿고 살았다. 권력자를 위해 정치를 했고, 돈 있는 자들만을 위해 정책을 만들었으며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자기 이익만 추구했던 존재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 입장에서는 미안할 수밖에...
이승만의 삶에는 늘 약한 자, 가난한 자, 힘 없는 자들이 함께 했다. 그가 권력을 독점했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강한 권력을 행사할 때는 늘 강한 자, 돈 많은 자, 힘 있는 자들과 맞설 때였다. 후대 역사가들은 1952년 전쟁 중 피란 도시 부산에서 있었던 이승만 정부의 개헌을 발췌개헌이라 비아냥거리지만 정작 그때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뽑는 직선제를 얻어낼 수 있었다. 국민에게 국가와 정부를 구성한 힘을 준 것이다. 그것보다 민주적인 것이 또 어딨을까?
그래서 나는 정말 미안했다. 그를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욕했던 지난 수십 년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것이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이 눈물을 흘렸던 이유였던 것 같다.
이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는 단지 영화를 넘어 하나의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되고 있다. 지금 영화관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도중에 객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뜨거나, 눈을 감고 아예 잠을 자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가족이나 회사 상사의 권유로 극장에는 왔지만, 차마 영화를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래서 스크린 앞에서 눈을 감는다. 극장 밖으로 나가 서성거리기도 한다. 대부분 민주당을 지지했거나 좌파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다.
부디 그들이 용기를 내길 바란다. 용기를 내서 사실과 진실의 역사 앞에 마주하기 바란다. 만약 그들이 선택이 힘 없는 자, 약한 자, 가난한 자이었다면, 그건 이승만의 삶이기도 했다. 가장 빈곤했던 시대를 가장 진보적으로 살았던 사람, 그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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