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읍 본당의 전신이며 순교자들의 가족들이 지은 본당이다. 신성리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병인박해(1866년) 때였지만 첫 공소를 치른 것은 1893년 배재에 있던 죠조 신부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초창기의 한옥 형태 성당 건축으로서 종교적 가치가 있다.
병인박해 이후 정읍과 장성의 심산궁곡에는 상당수의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교우촌들은 순교자들의 가족이나 박해를 겪은 교우들이 형성한 공소들이었다. 정읍 신성리 본당은 1936년 정읍 본당의 전신이다.

1900년 이전의 정읍 지역에는 14개 정도의 공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신성리 신자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곳은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 성인과 함께 치명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로 신부, 장주기 요셉뿐 아니라 이들의 순교 사실을 교회에 증언한 황 마르타가 살고 있었던 마을이다.

1922년 4월 6일 황 마르타는 정식 증언자로서 치명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병인순교자시복재판기록 2차》 회차 34(5권 55~64쪽) 참조). 그는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로서, 그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가 직접 갈매못에서 치명 장면을 목격하고 와서 들려준 얘기를 증언하였다.

신성리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병인박해(1866년) 때였지만 첫 공소를 치룬 것은 1893년 배재에 있던 죠조(Joz e 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 시절이었다. 초대 본당 신부는 1903년 6월에 부임한 김승연(金承淵, 1874~1945,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김 신부의 재임 기간 동안 담당 구역에서 개신교와의 마찰과 이로 인한 한국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불신으로 주임 신부가 1907년에는 프랑스의 미알롱(Mialon, 孟錫浩, 1871~1937, 알로이시오) 신부로 교체되었다.

미알롱 신부는 이곳에 부임한 두 번째 신부로 16년간의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09년 봄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8칸의 기와집 성당과 4칸의 사제관(현 공소 강당)과 6칸의 회합실을 지었고 돌로 담을 쌓았다. 신성 공소는 1903년에 건축된 우리나라 초창기의 한옥 형태 성당 건축으로서 종교적 가치가 있다.
정읍시 문화재 자료 제180호이다. 페셀(Peschel, 白鶴老, 1887~1972, 필립보) 신부가 1924년 9월 26일 신성리 본당 신부로 부임한 후 신자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1931년 페셀 신부가 전출되고 고군삼(高君三, 베네딕토) 신부가 부임하였다. 고 신부는 본당 발전상 본당을 신성리에서 정읍읍내로 이전하였다. 이로써 신성리 본당 시대가 끝나고 정읍 본당 시대를 시작하였다.

▒ 황 마르타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된 황석두의 시신을 황석두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천일 요한이 4월 그믐에서 5월 초승 사이에 수습하여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 이장했는데(《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1차)》6권 1095쪽과 1111쪽), 황석두의 종조손인 황 마르타(황 안드레아의 딸)가 분명히 증언하기를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鴻山)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 신성리 공소
월성 마을 위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신성(新城)이란 지명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월애, 수랑메, 새터로 구성된 마을로 1882년(?)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전주 지방의 신자들 중 일부가 피난 온 것이라 한다.
신자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돌무더기가 지금도 남아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1903년 프랑스의 미알롱 신부가 부임하여 16년간의 포교 활동을 하면서 부근에 기와 굽는 공장을 설치하여 여덟 칸의 성당과 네 칸의 사제관을 짓고 아래쪽에는 여섯 칸의 사랑채를 건축하였다. 주변은 마치 석성과 같은 견고한 담장을 쌓았는데 당시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탄압하자 천주교 신자들이 관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성당 건물은 없어지고 사제관에 해당되는 건물을 성당으로 활용하여 일요일이면신자들이 모여 공소 예절을 드리고 있다. 사제관 왼쪽의 부속 건물은 사랑채 역할도 하고 외지에서 온 신자들의 숙소 역할도 했는데 6·25 전쟁 때 인민군 치안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폭격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채는 주민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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