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르피낭 8 - 카스티예 전망대에 올라 조망후 민속박물관을 구경하다!
2026년 5월 14일 페르피낭 시내를 걸어서 구시가지 성문인 카스티예문 Le Castillet 으로 들어가
페르피낭 대성당 (Cathédrale) 을 보고는.... 골목길을 걸어서 호텔 팜스에 도착하니 문은
11에나 연다고 하고, 자연사 박물관도 개점 시간은 11시 (6월 1일 부터는 10시 반) 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잠깐 망설이다가 성문 카스티예 Le Castillet 부터 먼저 보기로 하고 되돌아 오다가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시청사가 어디냐고 물으니 이 할머니가 앞장을
서면서 중간에 보이는 건물들까지 여행 가이드 처럼 설명하는게 여간 친절한게 아닙니다.
그 중에 골목길에 걸린 국기 3개를 설명하는데....하나는 프랑스 국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 지방을 뜻하는 국기이며 다른 하나는 카탈루냐를 상징한다는
데.... 그러니까 여기 페르피낭은 한때는 스페인 카탈루냐에 속했나 봅니다?
그러고는 시청사 앞에 까지 와서는 할머니는 여기라고 말하고는 또 대성당으로 가는
길도 알려주는데.... 우리가 거긴 좀 전에 보았다고 하니 구경 잘하라면서
돌아서 가기에 “메르씨 보쿠 (Merci beaucoup 멸치볶음?)” 라고 인사를 합니다.
바르셀로나가 번잡한 대도시인데 비해 페르피낭은 사람이 적어 한적하니 천천히 걸으며.... 햇살이 어깨에
부숴지는걸 느끼면서 알록달록 예쁘게 색칠된 개성있는 건물이며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구경하기 좋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바다로 가는 것도 좋으니.... 페르피낭 근처에는 해변이 Torreilles- Plage 등 5개가 있으며
또 해변가에 있는 Alle des Arts 에 가거나 또는 연꽃이 피는 정원인 Jardin Exotique de
Ponteilla 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우린 오늘 기차를 타고 스페인의 지로나로 가야 하는지라 시내만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스타벅스는 페르피낭 시내에는 단 한 곳만 영업을 한다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체인숍 보다는 그냥 개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골목길을 걸어서 페르피낭 시청사를 구경하다가.... 문득 미술평론가 이은화씨가 동아
일보 이은화의 미술시간 칼럼에 쓴 “ 왕의 여자가 된다는 것 ”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역사 속 여느 왕들 처럼 프랑스 루이 15세도 왕비 외에 정부를 여럿 뒀다. 그중 퐁파두르
부인은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20년간 왕의 공식 정부로
지냈다. 대체 그녀에겐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왕의 여자로 있었던 걸까?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 부인’ 에서 그 답을 유추해 볼수 있을 것 같다.
부셰는 루이 15세의 수석 궁정 화가로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일곱점 이상
그렸다. 그림에는 초록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묘사돼 있다.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파리의 부유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야망 덕에 1745년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 (?) 로 임명됐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그녀는 왕비였던 마리아 레슈친스카 보다 궁정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영리했다 . 외모는 한순간임을 알기에 지성과 교양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그림에서 손에 책을 든 것도 자신의 지적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실제로도 그녀는 3,500권 이상의 책을 보유한 개인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그림 오른쪽의 깃펜은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후원을, 왼쪽 하단에 있는 건축 도면은 건축에
대한 후원을 암시한다. 부인 발치에 앉아있는 개는 그녀의 반려견 미미로, 루이 15세에 대한
충성심과 충실함을 상징한다. 개 옆에 있는 두 송이의 장미는 왕과 퐁파두르 부인과의 사랑을 의미한다.
화가는 후원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이며 충직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를
표현했다. 부인의 초상화를 계속 그릴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퐁파두르 부인은 부셰 같은 예술가
들을 후원해 화려하고 장식적인 로코코 예술을 꽃피웠다. 비록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로코코의 여왕이 됐다.
시청사를 구경하고는 걸어서 인포메이션 센타에 왔는데.... 센타 맞은편에 벤치가 있어 앉아서 쉬니 왠 집시
여자가 와서는 불룩 나온 자기 배를 가리키며 "Baby" 라고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가르킵니다?
이 여자가 지금 뭘 요구하는 것일까요? 나 보고 옆으로 조금 당겨서 비키면 자기가 내 옆에 앉겠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그럼 붙어 앉아서 소매치기 기회라도 노리느 것인가 싶어
쿨하게 일어서며 독차지 하고 앉아서 편히 쉬라고 말하는데, 물론 저 배는 가짜가 분명해 보입니다?
구시가지 Vieille Ville 는 반경 500미터로 그 입구인 카스티예문 (페랄저택) (Castillet)
은 14세기에 만들어진 성벽 일부이자 요새로 보루는 20세기 초에 파괴 되었습니다.
윤서원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조선일보에 “ 어제의 숙적이 오늘의 동지... 공통의
적 나타나면 뭉쳤죠 ”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강도 관세 정책으로 인해 수백년간 이어져 온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경제와 안보, 인권 등을 두고 대립해온 유럽 국가들과 중국 사이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데, 시진핑
주석은 "중국과 EU (유럽연합) 가 미국의 괴롭힘을 함께 막아내야 한다" 고 말했어요.
EU 역시 중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으니 7월엔 중국과 유럽연합이 정상회담도 가질 예정이랍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대립해 온 국가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을 맞잡는 일은 세계사
에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공통의 적 앞에선 오랜 적대 관계를 뒤로하고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는 혈맹이 된 경우도 많았죠. 오늘은 역사 속의 '앙숙 동맹' 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6세기초 서유럽의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스위스에서 출발한 귀족 가문으로, 정략결혼을 통해 카를 5세는
권세가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스페인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등을 겸했지요.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꼈고, 1525년엔 카를 5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세력
과 싸우다가 국왕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겪습니다. 굴욕을
당한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에 맞설 강력한 동맹을 찾았으니 이슬람 오스만 제국 이었습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을 무너뜨린뒤 발칸 반도를 정복하며 유럽을 위협했죠. 이런 상황에서 프랑수아 1세가 오스만
제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술레이만은 프랑스 제안을 반겼으니 1536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랑스· 오스만 동맹은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벌인 전쟁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프랑스를 지원해 1543년 니스를 포위합니다.
전쟁중 오스만 함대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 툴롱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기독교 국가가
이슬람 국가의 군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으니..... 오스만 제국은 이 동맹을 통해 지중해 서부까지 영향력을 넓힙니다.
양국은 약 260년 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했어요. 1798년 나폴레옹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이집트를 침공하며 동맹이 깨지게 됩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는 프랑스의 적이었던 영국과 연합하게 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 후반까지 오랜시간 '숙적'
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중세시대 부터 수차례 전쟁을 벌였지요. 대표적으로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100년 넘게 이어진 백년전쟁(1337~1453) 은 양국 간 깊은 적대감을 남겼습니다.
19세기 들어서도 양국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식민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무력 충돌 직전까지 치닫기도 했었죠.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의 세력 구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독일이 급속히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입니다.
독일은 해군력을 키우며 영국을 위협했고 대륙에서는 프랑스와 국경에서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이에 오랜
적대 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을 모색하게 됩니다. 1904년 양국은 '영불
협상' 을 체결해 식민지 갈등을 해소합니다. 영국은 이집트에 대해 프랑스는 모로코에 권리를 갖기로 합니다.
같은 해에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을 맺어 필리핀은 미국이 차지하고 조선은 일본이 차지
하기로 갈라 먹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바다를 건너와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바로 미국은 서울주재 공사관을 철수하니 눈치를 보던 영국과 프랑스등 여러나라들도 이를 따랐습니다?
러시아도 이 흐름에 합류했습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뒤 외교적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으니,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할 새로운 동맹을 원했어요. 이에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영러협상' 을 맺어 페르시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등 분쟁 지역에서 활동을 조정하고 갈등을 정리합니다.
이로써 프랑스· 영국· 러시아 세 나라가 연결되면서 '삼국 협상' 이 탄생했습니다. 삼국
협상의 출발은 공식적인 군사동맹은 아니었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했을때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상대로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적인 동맹이 맺어진 경우도 있으니 20세기 나치 독일과 소련은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적대 관계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는 공산주의를 '인류의 적' 으로 규정하고
독일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어요. 스탈린의 소련 또한 나치와 파시즘을
부정했는데 1939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벌어지니 '독소불가침조약' 이 체결된 것입니다.
이 조약 이면에는 비밀리에 체결된 의정서가 있었으니, 독일과 소련은 동유럽을 서로 나누기로
합의했고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소련도 2주 뒤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이 '앙숙 동맹' 은 오래가지 않았으니 독소불가침조약은 히틀러가 프랑스 방향의 '서부
전선' 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맺은 일시적 합의라 히틀러는 2년후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연합국편에 서서 독일과 치열한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국가간 동맹에는 이념이나 원칙 보다 눈앞의 이해관계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는걸 보여줍니다.
드디어 카스티예에 도착하는데 성문 (Castillet) 은 파괴되었지만 큰 카스티예와 작은 카스티예는
철거되지 않고 보존된지라 이후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붉은 벽돌의 탑으로 종루의
돔 형태의 지붕은 동방적인 외관이라는 평을 받으며 내부는 민족 정통예술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우리 부부는 조금 기다려서 11시 정까이 되니 문이 열리는지라 2유로를 내고 입장해 아주 비좁은 계
단을 올라가는데... 소라나 고둥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140개의 계단을 올라 탑의 꼭대기에 섭니다.
여기 탑 위에서는 360도 파노라마가 가능하니 붉은 지붕을 이고 선 패르피낭 시내를
내려다 보는데.... 우리가 걸어왔던 운하변의 경치를 다시 찬찬히 살펴 봅니다.
내려오면서 보니 여러층에서 층마다 가득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마치 민속 박물관에라도 들어온 듯 해서 찬찬히 살펴 봅니다.
전시품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동아일보 우경임 논설위원이 횡설수설 칼럼에
쓴 루이비통 꺽은 48년 명품 수선 공방 이란 기사가 떠오릅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는 1978년부터 48년간 명품 수선을 해 온 작은 공방이 있다.
이곳에선 낡은 ‘에루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제품을
새것 처럼 복원해 주거나 쓸 만한 가죽을 잘라내 작은 가방이나 지갑을 만들어 준다.
1980년대 봉제공장에서 기술을 익혔다는 경력 35년 장인들의 솜씨가 입소문을 타면서 옷장
속에 고이 모셔뒀던 명품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사별한 남편이 사준
가방, 어머니가 물려주신 가방, 첫 월급으로 산 지갑등 애틋한 사연이 있는 수선 요청이 많다.
2022년 루이비통이 공방을 운영하는 이경한씨를 상대로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씨는
보통 10만∼70만원씩을 받고 루이비통 가방을 해체한뒤 원단과 금속 부품을 활용해
새로운 디자인의 가방, 지갑을 만들었다. 루이비통은 리폼 제품에 자사 로고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상표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500만원 상당의 손해 배상도 청구했다.
리폼 업체가 한둘이 아닌데 왜 이씨의 공방만 소송을 당했을까. 이 씨가 직접 밝힌 사정은
이렇다. 2022년 루이비통은 법무법인을 통해 국내 명품 리폼 업체들에
“리폼이 적발되면 법적 소송을 하겠다” 며 앞으로 중단하겠다는 확약서를 받았다고 한다.
겁에 질린 소상공인들은 도장을 찍었지만 이씨만 이를 거절했다. 이씨는 한 유튜브에 출연해 “리폼
을 해서 파는 것도 아니고 소비자가 맡기면 기술을 제공할 뿐인데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고 했다. 소송 비용 부담에도 자칫 수선업체가 줄도산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버텼다.
1, 2심에선 이 씨가 졌다. 리폼 제품도 독립된 교환가치를 지닌 상표법상 ‘상품’ 에 해당한다고 법원은 봤다.
판결이 알려지자 비싼 가격에 비해 부실한 사후서비스 (AS) 가 불만이던 소비자들은 뿔이
났다. 명품을 AS 맡기면 본국으로 보내야 한다며 수개월을 기다리라 하기 일쑤다. 그 비용도 상당하다.
그러면서 ‘내돈내산’ 리폼까지 안 된다니 수백만원짜리를 버리란 말이냐는 항변이다. ‘자동차
튜닝도 금지하나’ ‘옷 줄여서 아이 입히면 불법이냐’ 등 냉소적 반응이 쏟아졌다.
중국 짝퉁 시장은 방치하면서 한국에선 영세 소상공인에게까지 쩨쩨하게 군다는 불만도 있다.
대법원은 다르게 봤다. 리폼 제품이 개인적 용도로만 사용되는 한 상표권 침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고 26일 원심을 파기했다. 리폼은 개성을 표현하거나 재활용 등을
통해 제품 수명을 연장하는 행위이므로 소유권 행사 및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원 순환이라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고이고이 아껴 쓰는
소비자,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고친 장인에게 죄를 묻는 건 상식적으로 아니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