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德川)은 방장산(方丈山.지리산) 산중에 있다. 남명(南冥) 조(曺.조식)선생이 여기서 태어나(실제는 삼가 토동에서 출생) 도(道)를 강론하셨고, 여기서 세상을 떠나 묻히고 향사(享祀)를 받으시니, 세상에서 특별한 구역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단구(丹丘.단성)의 관아에서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번암의 아버지가 단성현감으로 있었음). 골짜기 입구에는 ‘입덕문(入德門)’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서 있었고, 계곡의 물은 두 산봉우리 사이로 날듯이 울며 흐르는데, 깊고 아득하여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으니, 처음 이르렀을 때부터 이미 상쾌한 기운을 느꼈다. 석문(石門)을 지나 얼마쯤 가자 홀연 큰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바둑판처럼 평평한 그곳에는 벼, 기장, 뽕, 삼 등이 뒤덮였고, 높은 봉우리가 사방으로 에워싸 마치 부채가 펼쳐지고 휘장이 두른 듯하였다. 개천은 헤엄치는 용처럼 구불구불 흘러서 들판을 다 통과한 뒤에야 굽이쳐 석문을 빠져나갔다. 서원(지금의 덕천서원) 건물이 들판 중간에 자리 잡고 개천을 굽어보았는데, 규모가 크고 위엄이 있었다. 서원 밖에는 정자가 날개를 펼친 새처럼 솟아 있었는데 ‘취성정(醉醒亭)’과 ‘세심정(洗心亭)’이라 하였다. 개천이 정자 아래에 이르러 푸르고 깨끗한 물이 깊고 넓게 펼쳐졌다. 노니는 물고기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아래로 가라앉기도 하였는데, 난간에 기대어 서서 보면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곳을 즐기다가 시를 읊조리며 돌아왔다. 그 뒤로 40년 동안 그곳의 수석(水石)과 연하(煙霞)가 때때로 나의 꿈속에 들어오곤 하였다.
올해 겨울 진양(晉陽.진주)에 사는 조군 문연(趙君文然.조휘진)이 죽주(竹州.경기도 안성)의 분암(墳菴.재실)으로 나를 방문하였다. 내가 문연과 작별한 지 거의 10년이나 되었는데도 문연은 풍채가 더 충실해지고 모발은 더 검어진 것 같았다. 내가 농담으로,
“군은 방장산에서 나는 금광초(金光草)의 싹을 먹은 것이 아니오? 어찌 이토록 늙지 않았단 말이요.” 하자, 군이 웃으며,
“어찌 그렇겠습니까. 내가 몇 년 전부터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입덕문 안으로 몸을 이끌고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서원 건물의 옆이지요. 한가로운 삶에 특별한 일이 없어 날마다 지팡이 하나 짚은 채 작은아이를 이끌고 삼강 팔조(三綱八條.대학장구의 삼강령 팔조목)의 담장을 따라 거닐다가 물가의 정자에서 쉽니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 날마다 밥상에 올려 먹고 안석에 기대어 잠이 들면 백사장의 물새들이 때로 가까이로 다가오곤 하지요. 회목(檜木)과 잣나무가 우뚝이 서서 엄숙하게 남명과 수우당(守愚堂.최영경)의 풍모를 흠모하고, 인간 세상과 일천 겹으로 막혔으니 무릉도원을 찾는 어부의 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심간(心肝)을 태워 버리고 사람의 기혈(氣血)을 소진시킨다는 영욕(榮辱)과 득실(得失)이 귀에 들어올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잊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인(古人.소동파)이 ‘이렇게 70년을 살다 보면, 문득 140년인 셈이 되리라[若活七十年 便是百四十].’라고 했으니,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찌 몇 줄기의 금광초 싹을 먹은 사람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양장판(羊脹阪.험한 비탈길)을 밟고 구당협(瞿塘峽.협곡)을 건너 두려워 떨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처지이다. 문연의 말을 듣고 문연의 지혜로움을 알고 보니, 나보다 30리의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로다.” 하였다.
註: 조휘진(趙輝晉 1729~1796)이 《조씨십충록(趙氏十忠錄)》의 서문을 번암에게 부탁하러 왔다가 돌아갈 때 번암이 지어 준 것으로 조휘진의 문집인 《동와유집(東窩遺集)》 에도 수록되어 있다. 조휘진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문연(文然), 호는 동와(東窩)ㆍ선암거사(仙巖居士)이고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후손으로 진주(晉州)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