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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묵상글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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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 힘겹게 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부모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요한!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부모와 갈라서야 했던 외톨이였습니다.
뭇사람의 존경 받는 가문의 영광도
주님 섬기는 사제의 안정적인 지위도
당신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
하지만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니라
거친 광야가 당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여린 살갗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는 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요,
단지 성긴 낙타털옷만이
당신을 거칠게 보듬을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맛난 살코기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포도주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호사 일뿐
메뚜기와 들꿀에 당신은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 생각을 펼치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에
당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탐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들에게
위선과 가식을 옷 입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당신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애 첫 순간부터 평탄치 않은
비범한 당신의 삶의 여정에 이끌려
수많은 이들이 당신께 찾아와
살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오시기로 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당신께 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자리를 탐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당신께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살기 위해 당신을 찾은
무수한 이들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스스로를 죽이고 죽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탐한 부정한 압제자의
썩은 냄새 진동하는 흥겨운 술판의
싸구려 노리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당신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정의의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주님을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닮은 많은 이들을 통해서
오늘도 찬란히 부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의 추하고 속된 세상과의 단절을 본받아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의 비움을 본받아
주님으로 온 삶을 채울 수 있기를,
헛된 명예를 내던져버린 당신의 낮춤을 본받아
주님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들어 높이기를,
부정과 불의에 맞섰던 당신의 정의로움을 본받아
주님의 정의를 온 몸으로 당당히 선포하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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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처럼 되어라!
저는 외국을 많이 나갔지만 다 일 때문에 나갔고,
그래서 저 혼자 여행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를 안내해주는 사람 없이 여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안내자 없이 여행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왜 했냐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처음 드러내실 때도 저처럼 도움이 없으면 안 되기에
선구자요 증언자인 요한을 필요로 하셨던 것인지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의 필요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지요.
하느님께는 성인이 필요치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성인이 필요하지요.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왜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첫째는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겸손의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세례자 요한 정도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충분히 나댈 수도 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은 자기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명성이 자자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몰려와도
그는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주님 앞에 있습니다.
물론 그도 사람들 앞에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 있지 않았다고 함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셨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주님 앞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늘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높이 생각해도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자기를 자리매김했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맬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관해 얘기하면서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지 그 이상이 아니”라고 한 말 대로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지속적으로 가리키는 자 곧 주님의 증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겸손한 모범도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주님을 가리킴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가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그 역할이 더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가게 하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따라가게 하고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한 세례자 요한은,
그랬기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고, 우리에게는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칭송만 하면 주님께서 나무라실 겁니다.
그를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 따라가고,
그를 칭송만 하지 말고, 너희도 그처럼 되어라!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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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제 몸에 새겨진 당신 소유의 이름을 드러내주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고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소서.
오늘, 제 삶안에서 당신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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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요한이라는 이름은“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예수’곧‘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이름과 함께 쓰여야 문장이 완성됩니다. 즉“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될 때 그분의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나는 목소리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막의 목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신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낸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목소리가 되어 용감하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곧 자기 신랑에게서 빛을 받으며 그분이 커지도록 작아져야 하는 신비의 교회입니다...요한은 우리를 위해, 교회를 위해 언제나 말씀에 봉사하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교회의 모델입니다.”우리도 요한처럼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하느님의 뜻에 의심을 품어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겪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을 속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더 커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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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사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프로였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사건, 우리가 외면하였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프로였습니다. 1992년에 첫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어느덧 31년이 되었습니다. 진행자로는 ‘문성근, 박원홍, 오세훈, 정진영, 박상원’ 씨가 있었고, 2008년부터는 김상중 씨가 15년 째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저도 관심이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시청하였습니다. “경찰과 검찰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하면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곤 했습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 전례 중, 탄생일을 기념하는 인물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탄생보다도 부활이 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보통의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경우 특별히 탄생일을 대축일로 기념하는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우리의 구원의 역사 안에 깊은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첫 번째 덕목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반성 없이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계획안에,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준비하시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활동하시기에 앞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요구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6월 24일이고,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인 6월 24일은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에는 낮이 가장 깁니다. 그리고 낮의 길이는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인 12월 25일은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에는 밤이 가장 깁니다. 그리고 낮이 길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면서 낮은 짧아지기 시작하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면서 낮은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탄생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청하였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오시다니요?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도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데서 우리를 찾아 오셨네.” 어르신들께서 ‘이름 값’을 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함께하는 공동체와 조직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때로 ‘갑’질을 해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지닌 천사입니다. 성모님께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요셉 성인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저의 세례명이 가진 뜻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며 저의 이름값을 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매일 복음 묵상도 계속 전하고, 제게 주어진 직무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영광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공경하는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이와 같은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하느님께 드릴 줄 알아야합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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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신(神)의 한 수(手)”이다
-성소, 주님과의 관계, 훈련-
참 사람되기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이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한마디로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인생 폐인이,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들어도 순수와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고 시적 감성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시편 8장은 온통 하느님과 인간, 우주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합니다. 교황님도 얼마전 천문학자들 모임에서 결코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라 강조하셨습니다. 역시 여기 수도원에서 26년전 쓴 “아침”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새롭다 놀랍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 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놀라운 좋은 아침일 수 있겠다’-1997.8.16
배밭사이 배봉지 흰별들 가득 달린 별밭사이를 걸을 때마다 놀라움, 새로움의 감각을, 원초의 순수를 회복하려 노력합니다.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세상도, 수도원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내적성장과 성숙을 통해 참나가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한국적 수도생활의 토착화로 시작된 단순소박한 수도승 생활이었습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는 좌식이었고 참으로 최소한의 필요로 시작한 편안한 고향집같은 수도원 환경이었습니다. 이젠 수도원 성전내 수도자의 자리도 어제 저녁기도부터는 의자에 앉는 좌석으로 바뀌었습니다. 1987년 수도원 개원후 36년만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과거 넓은 공간의 성전은 이제 의자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런 시대적 추세라지만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젠 큰 절만 하는 것만 남았네요.”
“그것도 언제 없어질지 모릅니다.”
원장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아마 머지 않아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 제대 앞에 큰절하는 관행도 사라질 것입니다. 수도원의 쓰레기들은 또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이런 추세라면 세상이 온통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도 사람도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수도원 앞에는 거대한 별내신도시가 들어서 상전벽해가 되었고 그나마 원형의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수도원뿐입니다. 며칠전 읽은 탈성장, “포스트 자본주의를 고민하자”라는 제하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녹색성장, 지속 가능한 성장만이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은 환상일뿐입니다. 수백년간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자본주의가 추구해온 성장지상주의 탓에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존폐 기로에 몰렸습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나 자본주의하에서 탈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인류가 계속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단순소박한 삶의 양식을 어떻게 지녀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영적혁명이, 내적혁명이, 의식의 변화가 절박한 시절입니다. 병자들이, 특히 정신질환자들이 넘쳐 납니다.
어제 공부하며 깨달은 소시오패스와 아이코패스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일종의 괴물같은 인간입니다. 둘다 공통적 특징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며 공감, 배려, 존중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더욱 늘어날 이런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심신미약이나 심신상실이 아닙니다. 인지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양심이 없어서입니다. 이같은 기질은 타고나더라도 어릴 때 부모의 훈육등을 통해 충분히 누를 수 있습니다. 조현병은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으니까 사회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할 경우 재발률이 90%에 달하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치료가 잘 안됩니다. 타고난 부분이 나쁜 데다 입원해도 큰 의미가 없어서 교도소에 수감하는 게 낫습니다.”
아, 정말 사람되기 힘든 세상입니다. 얼핏 분별이 안되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에 속한 이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나 가정의 부모가, 배우자가 된다 할 때 그 피해는 얼마나 크겠는지요.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온전한 참사람으로 살기위해 신앙생활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길을, 나를 잃어 버리면 누구나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미사중 면면을 살펴보며 한분한분이 영적전쟁에 백전노장의 믿음의 용사요 신의 한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신의 한 수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고 여기 수도자들이 그러하고 엊그제부터 저에게 물리치료를 해준, 20년간 수도원을 노동으로 도운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 박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가 그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의 한수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나의 성인으로 살기위해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되어 시종일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세례자 요한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 말고는 유일합니다.
첫째, 성소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적 무명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성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은 물론 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정말 이런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래야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나의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이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습니다. 이래야 자존감 높은 정신 건강, 영혼 건강의 삶에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139장도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존재임을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때로 삶의 허무와 허망함에 좌절도 있겠지만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곧장 일어나 주님을 붙잡을 것입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좌우명처럼 늘 되뇌이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없는 성 요한 세례자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인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여 평생 닮아갈 때 참나의 성인이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떠나버리면 참나의 상실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깊어가는 관계와 더불어 온유와 겸손입니다. 다음 제2독서중 바오로를 통해 소개되는 성 요한 세례자의 겸손한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처럼 주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겸손과 순수, 지혜의 은총이요, 주님 앞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 정신건강, 영혼건강의 삶이겠습니다. 영혼건강, 정신건강의 명약 넷이 희망, 기쁨, 감사, 평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은 영적훈련으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은총도 함께갑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을 위해 한결같은 치열한 영적훈련은 필수입니다. 이래야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습니다. 유비무환, 평상시 영적훈련을 통한 예방이 처방보다 백배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탄생한 요한 세례자 작명 과정을 통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의 영적훈련이 참 인상적입니다. 잠시의 불신으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 인내와 기다림의 영적 훈련중에 귀는 활짝 열려 경청의 사람, 관상의 사람으로 변모했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감사에 벅차 하느님을 찬비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성무일도시 끝무렵에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경청도 순종도 찬미도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이런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웠을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어떻게 얻는 아들인데, 참으로 한결같은 영적훈련의 모범된 삶을 통해 성 요한 세례자를 교육했을 것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광야는 그대로 영적훈련장이였음을 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을 기초로 삼아 영적훈련에 전념했기에 굳센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품위의 존재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삶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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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축일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요한 세례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파견되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실 것을 미리 알렸던 분입니다. 또한 물로 세례를 베풀고 그로써 사람들을 준비시킨 인물입니다.
주님 역시 요한 세례자를 아끼기며 ‘여자에게서 태어날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세례자 축일을 기념하고 또 그 삶을 묵상하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사명이 있었고, 바오로 사도도 그 사명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은 존재합니다.
한 가정 안에서, 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그 사명을 실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명을 실현할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처음도 사랑으로 마지막도 사랑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도 배려로 마지막도 배려로 끝나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명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의 욕심이나 혹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실현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요한 세례자와 같은 사명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주님을 알도록 도울 것이며 누군가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모여 하늘나라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시원한 맛, 즐거운 맛
사실 시원한 지금의 계절이 시원한 바람은 아닙니다.
푹푹 찌는 여름이지요.
그런데 보기만 해도 시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화도로 라이딩을 오는 바이커들입니다.
지금 묵상 글을 쓰는 이 늦은 시간에도
강화대교를 지나가는 바이크 소리가 들립니다.
상상만 해도 시원합니다.
바람을 가르는 맛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바이커들은 그 맛에 바이크를 탈것입니다.
시원한 맛, 즐거운 맛.
저도 가끔 이 맛을 느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안에서 이 맛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픔이 위로받았을 때 시원한 맛을.
기도의 응답이 확실히 다가왔을 때 즐거운 맛을.
오늘도 저 바이커들처럼
우리도 시원한 맛, 즐거운 맛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 안에서, 침묵 안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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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형제님께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아이템이었고,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확신과 달리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경험 삼아 방향을 바꿔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그는 과거의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지우고 싶은 과거라면서 그때의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 실패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 실패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말이지요.
종종 과거의 일 때문에 지금 힘들다는 분을 만납니다. 과거 있었던 부모의 학대가 떠올려서 괴롭다고 말하고, 친구의 배신으로 지금 자신이 이렇다면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는 그 일이 지우고 싶은 시간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지금을 잘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을 잘 사는 사람은 과거 탓, 남 탓을 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과 사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면서 감사해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각자는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도 있고 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수렁에 빠졌어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과거의 일과 사람에 집착합니까? 지금 부정적 감정 안에 빠져들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부정적 감정 속에 빠져나가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불신이 생긴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부정적 마음보다 긍정적인 마음을, 미움과 질투보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는 천사가 전해준 잉태 소식을 믿지 않았지요.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에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에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불만보다 하느님께서 최고의 것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뜻을 따랐기에 다시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은 광야에서 지내며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특히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면서 겸손의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예언자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과거 탓, 남 탓하는 모습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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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갈 길은 내가 찾아 얻어야 한다(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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