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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흥산성[聖興山城] 260m 충남 부여[扶餘]
산줄기 : 금북기맥원진지맥
들머리 : 임천면 임천면사무소
위 치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높 이 260m
[성흥산성 전경]
충남 부여군(扶餘郡) 임천면(林川面) 군사리(郡司里)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사적(史蹟) 제4호.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한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錦江)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이 성홍산성은 501년(동성왕 23)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성주(城周)는 약 600m, 성벽 높이는 3∼4m이고, 우물터가 3군데에 있고 건물터도 현존하고 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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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백加)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작성자 esuc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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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부여 성흥산성
[성흥산 고스락의 정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옛말처럼 비갠 아침녘 호남평야엔 안개가 자욱하다.
그러나 짙은 안개 속에서도 길은 어김없이 열려 있고 차는 어느덧 웅포대교를 지난다. 천릿길 금강이 후여후여 달려와 넓어질 대로 넓어진 채 흐르는 이 지점에서 강은 흐름을 잊어버린 듯 잔잔히 흐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 상류 쪽에서 새 몇 마리가 날아오르고 임천면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 성흥산성은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구름속에 숨어 있었다.
임천면 사무소 알에는 전 면장 아무개라고 쓰여진 비석들이 10여 개가 서 있다.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저 비들은 옛날 이곳 임천을 거쳐 갔던 현감이네, 군수네, 관찰사네 하는 위풍당당했던 사람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서 세웠던 것을 흉내내서 세운 것은 아닐까? 아니면 후임 면장이 전임 면장의 공덕비를 세워 주면 자기 것도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세웠을까? 물론 진정으로 임천면을 위해서 역사에 남을 일들을 했던 면장들의 공덕을 잊지 않기 위해서 영세불망비를 세웠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부질없는 물음을 던지며 구부러진 산길을 800여m 올랐을까. 성흥산성 아래 휴게소에 닿는다. 오늘 답사는 이석환 내외와 조용주씨 등 7명이다. 아직 산성 부근에 구름은 걷히지 않았지만 더 이상 비는 내릴 것 같지 않다. 우선 간식으로 과일과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산성 답사에 나선다.
산성 아래의 충렬사 앞마당에는 봄의 전령인 쑥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바위 사이를 헤집고 난 길을 따라 오르는데 추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난 푸른 이끼들이 바위를 덮고 있다. 봄이 무르익은 오월 중순쯤에는 눈부시게 희디흰 찔레꽃들이 그 진한 꽃내음을 바람에 전해줄 터인데 오늘은 봄바람만이 나그네의 마음을 휘젓고 지나갈 뿐이다.
[성벽밑에서 쳐다본 느티나무]
성흥산성의 문루가 있었을 성싶은 문을 지나면 우측으로 성벽은 휘돌아가고 좌측에는 500여 년은 되었음직한 잘 생긴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렇다. 언제나 산성 앞에 서면 시공을 뛰어넘어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그 시절 이 땅의 백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이 성을 쌓았을 것이다. 성은 세월의 질서에 부서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그 세월속에서 이끼 낀 옛 돌들이 새로 식구가 된 반듯한 새 돌들과 맞물린 채 질서 정연하게 쌓여져 있는 것이다.
성흥산성은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산성으로 둘레는 600m, 면적 12만 916제곱미터로 사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데뫼형 산성으로 남, 서, 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세 군데 및 토축보루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는 이 성에 관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4대 동성왕 23년(501) 조]에 '8월에 가림성(임천의 옛 이름)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성곽 중에서 쌓은 연대와 당시의 지명을 알려주는 하나뿐인 예로 귀중한 유적이다.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의 성벽 높이는 대개 3~4m이며, 일부는 석축, 일부는 토축으로 되어 있다. 안으로 흙을 다져 내탁을 하고 외면은 석축을 하였으므로 흙을 파낸 곳은 자연히 호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성벽의 석축 부분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그 기초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보다 약 1.5m 정도 앞의 부분까지 넓혀서 기초를 만들었고 토축부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식으로 축조하고 있다.
주문이었던 남문지의 너비는 4m이며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 남문지 앞에 있는 토성산에 둘레 약 200m의 토축보루가 있는데 이 토축보루에 부속된 소보루가 또 있다. 이와같은 대, 소성의 배치는 백제산성의 독특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성을 쌓은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았다. 그는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의 반란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장악한 진씨 귀족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다. 동성왕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손라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도읍지를 웅진으로 옮긴 뒤 나성을 축조하고 새로운 도읍의 면모를 갖추었다. 금강 남쪽의 웅진에 임류각이라는 정자를 지은 동성왕은 가림성, 우두성, 사현, 이산 등의 성을 쌓으며 신라나 고구려와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구러나 동성왕은 이 가림성을 축조한 뒤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명을 받아 이 성의 성주로 부임한 백가는 이 성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이 산성을 지키도록 보냈음에도 한직으로 보냈다는 생각으로 앙심을 품게 된다. 백가는 그 일이 못마땅해서 병이라 칭하고 사직하고 말았는데 동성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사냥을 좋아하던 동성왕이 그해 11월(음력) 사비서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포촌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백가는 이 때를 틈타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했다. 백가의 반란은 25대 무령왕이 즉위하자마자 보낸 해명에 의해 진압되었고 백가는 참형되어 백마강에 버려졌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성흥산성은 무왕의 아들 성왕이 도읍지를 부여로 옮긴 뒤에는 더욱 중요한 요새지로 자리잡았다.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나당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함락될 때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무렵 몇 날 며칠을 두고 깊은 안개가 가리우므로 수비장이 마음이 이상하게 설레어 하산해 보았더니 안개는 산성만 에워싸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말을 달려 부여에 다다르니 이미 왕성은 함락되었으므로 통분하여 자결하였다. 그러한 전설을 간직한 성흥산성은 그뒤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로 자리하기도 헸는데 그 때의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유인원 손인사가 말하기를, 부여풍을 공격할 때 모든 장수와 의논하매, 어느 장수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마땅히 먼저 이를 공격하여야 한다' 하니, 유인궤가 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치라 하였다. 가림성은 험준하고 견고하니, 이를 치려면 군사의 손상을 볼 것이요, 대치하고 있으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하여 드디어 주류성으로 달려갔다."
[유금필장군 사당]
그날의 역사가 세월 속에서 흐릿한 것처럼 안개는 자욱하고 산성 안에는 테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유검필의 사당이 있다.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 출신인 유검필은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유검필은 920년 3월 북쪽의 골암진이 여진족에게 침략 당하자 개정군 3000여 명을 거느리고 골암진의 동산에 성을 쌓은 후 여진족 추장 300여 명을 복종시켰다. 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후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여 후백제 군사 3천 여명을 무찔렀다.
조물성 전투에서는 계속 몰리고 있던 왕건을 도왔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고 있을 때 "신숭겸의 왼쪽 발 아래에 북두칠성 같은 사마귀가 있다"고 알려줘 시신을 찾기도 했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는 931년 그를 모함한 사람들 때문에 곡도(지금의 백령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왕건의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린 그는 운주성 싸움을 비롯한 나주 전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싸움에서 무패를 자랑했다.
그 무렵 백제와 싸움을 벌이기 위해 내려가던 유검필이 임천면을 지나던 중 임천지역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가엽게 여겨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그것을 감사하게 여긴 임천 사람들은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성흥산성 안에 유검필이 살아 있는데도 그의 사당을 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941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충절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994년(성종 12년)에는 태사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렇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역사이고 기록 또한 그들의 기록이다. 백제의 옛 땅이며 후백제의 땅 위에 살아 있는 고려 장군 유검필의 사당까지 세워진 것이다. 유검필의 사당에는 나자 둘, 여자 세 분이 모셔져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만감에 젖어 천천히 나무 숲길을 올라가자 금새 정상이다. 날이 맑은 날 이곳에 서면 금강을 건너 부여 일대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구름 속에서 산 아랫자락 그 어디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상 바로 아래 나뭇가지에는 누가 벗어 걸어 놓았는지 미국을 상징하는 푸르디푸른 청바지가 얹혀져 있다.
조용주씨는 아마도 어떤 사람이 최치원처럼 신선이 되기 위해 옷을 벗고 올라간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글쎄 이곳은 지리산도 아니고 임천의 뒷산에 불과할 뿐이다.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오솔길로 내려가자 오래된 성벽이 무너진 채 나타난다. 오랜 세월을 견디고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벽을 만지는 사이 꽃망울을 터뜨릴 듯 붉게 핀 진달래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봄이 성큼 다가왔구나. 그 날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듯이.
성흥산성을 보호해 주듯이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 아래에 서자 문득 멀리 띠를 두른 듯한 금강은 강경 웅포를 지나 서해바다로 들어가고 여정은 대조사로 이어진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로 성흥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조사는 <부여읍지>에 의하면 인도에 가서 범본을 갖고 백제로 돌아와 백제 불교의 방향 제시에 큰 역할을 하였던 고승 겸익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절 건물로는 용화보전과 오사채, 산신각 등이 있다. 우리가 절에 도착했을 때 스님은 절을 쓸고 있었고 한가족인 듯 싶은 몇 사람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편, 사적기를 참작하여 적은 현판에는 백제 성왕 5년(527) 담혜가 창건하고 고려 원종 때 진전장로가 중창한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절은 여러 창건설에서 6세기 초엽에 창건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의 하나임을 알 수가 있다.
법당 뒤에 있는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식과 규모로 볼 때 한눈에도 관촉사의 은진미륵이나 연산 개태사 삼존석불 그리고 홍성의 상하리 미륵불과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 관촉사 미륵보살의 부리부리한 눈과는 달리 온화한 눈빛을 띠고 있어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보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석불은 화강암을 찾아 조각한 것으로 높이가 10m에 이르며 둘레가 4.8m나 되어 몸체가 다소 둔중한 듯하지만 청아하고 차분한 맛이 있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 사각형의 보개를 두 개 올려 놓았는데 보개 네 귀퉁이에는 동령이 달려 있다. 석불 옆의 바위 위엔 500년 가까운 노송이 마치 푸른 용이 용틀임하듯 올라간 듯한 자세로 석불쪽으로 가지를 뻗어 우산처럼 가리어 있어 운치도 있으려니와 경건한 기분을 일깨우게 한다.
전설에 따르면 도승 겸임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아느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에 앉은 것을 보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석불로 변해 있었고 그래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조사 미륵보살입상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햇살은 부드럽게 온 대지를 에워싸고 있다.
성흥산성은 이제 구름 속에서 벗어나 있고 길은 장암면 장하리로 이어진다. 백마강이라 부르는 금강제방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언덕을 뒤로하고 서 있는 장하리 삼층석탑이 보인다. 멀리서 보아도 부여읍내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시키는 장하리 삼층석탑은 높이가 4.85m이며 보물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적인 균형미와 세련됨이 정림사탑과 비길 수야 없지만 작고 소담한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석탑 1층 몸돌에서 1931년에 범문다라니경조각과 은제합, 상아로 만든 불상이 발견되었고 1962년 해체 수리할 때에는 2층 몸돌 윗부분의 사리공에서 사리 41과가 들어있는 금동사리병이 발견되었다.
부여대교를 지나 들어선 나성의 나무숲에는 '산에 언덕에' 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궁남지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기만 했다. 이른 봄날이었다.
*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여행 버스가 06:30~18:30까지 40회 운행되며 요금은 9,400원. 부여에서 임천까지 07:05, 08:05, 09:05 매 시간별로 버스가 있으며 요금은 1,000원이다(041-835-3535).
*잘 데와 먹을 데
부여 일대에 장급여관이 많이 있으며 임천 소재지에도 여러 곳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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