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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동요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2:1-5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기독교는 종말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역사의 종말이 오고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영생과 영멸의 길로 나누어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종말론입니다.
또 하나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역사의 종말 뿐 아니라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씀그대로 개인의 종말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종말론은 두 가지로 결론지어질 수 있는데, 먼저는 이 세상의 삶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다음 세상, 내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신앙의 핵심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였으니 너희는 그것에 신경 쓰지 말고 너희에게 맡겨준 사명에 충실 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보면, 종말에 관한 우리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종말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둘째,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날을 잘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종말을 잘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종말을 위한 올바른 준비의 삶입니까? 아니면 종말과 관련 없는 삶입니까?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보낼 때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재림에 관한 문제로 홍역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는 주님께서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셨던 주님은 오지 않고 고난과 핍박은 계속 되었고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하는 복된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슬프게 했고 당황하게 했던 것입니다.(살전 4:13)
아울러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게을리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해 바울 사도가 편지를 보냈던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에 관한 문제는 2절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이들의 문제는 주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에 동요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이미 주의 날이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들에게 큰 동요를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은 데살로니가 전서 4:17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자기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고 그 날이 오면 주님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된다고 믿었는데 이런 경험이 없이 벌써 재림이 임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동요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올바른 재림신앙과 종말신앙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잘못된 재림신앙이 우리를 얼마나 혼란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재림 신앙은 무엇일까요?
첫째, 종말관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살후 2:2).
2절에 보면, ‘마음이 흔들리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거듭해서 종말에 관한 말을 하였고 편지를 통해서도 종말에 관한 필요한 것들을 다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그 교인들은 쉽게 동요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수많은 잘못된 종말론이 회자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종말에 관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꼭 믿고 종말신앙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잘못된 종말론에 식상한 나머지 종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종말신앙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무관심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저 현실에서 어떻게 잘 살고 평안하게 살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만 신경을 씁니다.
예수 믿는 목적도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평안히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고 그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개인과 역사의 종말이 있고 그 종말을 잘 준비하며 살아가는 종말신앙입니다.
내세를 부인하고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고 현재의 행복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잘못된 종말관입니다.
또한 우리를 잘못 유혹하고 있는 대표적인 종말론이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시한부 종말론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심지어 주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날과 그 때를 아신다. 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재림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시한부 종말론은 절대 성경적인 것이 아닌 잘못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시한부 종말론이 다미 선교회에서 주장했던 ‘1992년 10월 28일 재림설’ 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흔들리고 넘어져서 삶을 포기하고 재림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으로 판명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유혹에 현혹되어 삶을 포기하고 재림을 기다린다고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시한부 종말론’이 아니라 ‘조건부 종말론’이 등장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천지에서 주장하고 있는 조건부 종말론은 ‘신천지 교인들이 14만 4천명을 채우면 죽지 않고 육체영생하며 순교자들과 신일합일이 되어 왕 노릇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넘어가 신천지 교인들이 마치 성과급처럼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천지교인들이 10만을 넘어서자 다급해진 관계자들은 ‘신실한 14만 4천명을 채우면’으로 ‘신실한’을 추가해서 계속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14만 4천명은 상징수로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신천지는 자기들 교인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차면 신일합일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 잘못된 거짓 주장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최종적인 계시로서 어떠한 것도 새로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외에 어떤 개인이 새롭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나 주장에 절대로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와 장소를 확정해서 주장하면 그것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극단적 종말론 자들은 기독교 2천년 동안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 나타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잘못된 종말론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아울러 정말 종말론에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아도 안 됩니다.
올바른 종말 신앙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사도 바울은 흔들리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할 때면 당연히 천국과 지옥을 말하고 주님의 심판을 말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이 두려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종말에 대한 소망은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날이며 가장 좋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을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구원받은 우리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아가는 삶의 첫걸음을 내 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날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으며 그 날보다 더 좋은 소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종말에 대한 생각이 여러분을 두렵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종말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이유는 것은 그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나도 모르게 주님이 임하여 내가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된 이상,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한 이상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고, 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깨어 있어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종말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대신에 동요와 두려움을 주는 종말관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건전하지 못하거나 옳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잘못된 이단이나 종말론 자들이 성도들을 동요하게 하고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시한을 정하여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은 모든 재산을 다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니 여러분의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다 하나님께 헌금해서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유혹해서 그것을 착복하는 잘못된 종말론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림은 좋은 일입니다.
종말은 우리에게 가장 복된 자리에 들어가는 첫걸음입니다.
그 날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욱 기대하고 더욱 감사하며 더욱 행복해하는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말은 두려움의 메시지가 아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일상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2절에 보면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자들은 종말을 기대하며 살았던 사람들 중에 자기의 일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텐데 왜 굳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많은 잘못된 종말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말을 위해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특별한 삶은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일상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업이나 직장 사업 등 일상을 포기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헤어져서 믿는 자들만의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재산을 다 헌납해서 하늘에 상급을 더 많이 쌓아야 하고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이 다 잘못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특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일을 포기하고 함께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재림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주야로 수고하며 일하며 살았습니다.
즉 자신에게 맡겨진 이방 선교를 하는 일에 충실했으며, 또한 일상생활에 충실했습니다.
바울은 일반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삶을 살도록 ‘본’을 보인 것입니다(살후 3:7-9).
이런 면에서 일상생활로부터의 이탈을 요구하는 모든 종말관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을 대비한 건전한 삶은 현재 일상생활에 충실하면서, 믿음으로 깨어 있으며, 위로와 소망의 종말관을 지니고 사는 것인 줄 믿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합니다.
성경은 예수의 재림과 종말을 위해 오늘 어떤 특별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로 내일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항상 깨어 있으며, 마치 종말이 없는 것처럼 오늘의 일상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