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1일 차.이윽고 가파르게 경사진 언덕을 지나 머물러야 할 건물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길고양이가 주방 근처를 사뿐한 발걸음으로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우릴 보고는 화들짝 놀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건물 계단옆으로 오래된 싱크대에서 계수호스가 한 방울 한 방울 물을 떨어뜨리며 초를 셌다. 주방 이모들이 국거리와 반찬을 만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건물 아랫단 우측 구석으로 주방의 열기와 조합된 새하얀 연기가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커다란 스테인리스 굴을 빠져나갔다. 이곳은 서울 생활관과 다르게 주방과 생활실 층간이 서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2박 3일간 우리가 묵을 곳은 서울의 생활실과 다르게 정말 넓었다. 장판이 서울 생활실보다 좀 더 컸을뿐더러 창문도 제법 많아 송도 바다로부터 따라오는 신선하고 쾌적한 바닷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친구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토마토처럼 줄기차게 맺혔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같으면 친구보고 애늙은이라고 놀렸겠지만 애석하게 나도 그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세상살이 막바지에 놓인 사람처럼 몹시 지치고 피곤했다.생활관에 도착한 뒤, 우리는 장판에 노란 가방을 올려놓고 열을 맞추어 점심밥을 먹으러 큰 나무가 있는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참매미의 울음소리가 한적하게 그늘진 고목나무 밑으로 울려 퍼졌지만 수녀님은 개의치 않으셨고 경각심 한 숟갈 담긴 말로 주의 주셨다.주방에 들르려면 건물에서 아래의 회빛깔 시멘트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가끔 계단 양쪽에 있는 하늘색 난간에 엉덩이를 비스듬히 걸쳐 미끄럼틀 타듯 단번에 내려오는 걸 즐기기도 했다. 다치면 본인 손해이니 지양하는 쪽으로 계단만 이용했지만 인간은 본래 욕망의 존재로, 미끄럼틀보다 빠른 놀이기구 시승을 멈출 수 없었다.
"가다가 혹시나 형아들 볼 수 있으니깐, 지금 말고 이따 저녁에 같이 보러 가자. 알았지?"
나는 좋은 형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부산에서 하는 첫 식사라 그랬지만 몇 개월간 보지 못한 형들을 다시 볼 신명 나는 미래에 당연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어 "네!"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폐건물처럼 음침한 건물(구건물) 앞에 우직하게 서 있는 거대한 고목을 지나 돌담으로 열이 대충이나마 맞춰진 짧은 계단을 내딛으며 절반 이상 부식된 철조망을 짚고 내려왔다. 구리스가 제대로 발리지 않아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철문을 열고 허름한 건물과 비상구가 이어지는 다른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따스한 여름햇살을 받아 무성하게 자란 잡초밭이 보였다. 경당을 기준으로 잔디밭이 깔린 두 군데가 양방향으로 갈라져 있었고, 잔디 너머 울타리 안쪽으로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묘목이 군데군데 심어져 경당의 웅장함을 틔웠다. 빛바랜 성모상이 가련한 표정으로 두 손 모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경당 좌측에는 큰 돌들이 반듯하게 튀어나와 경당 앞부분을 예쁘게 장식했고, 그 옆으로 소나무 잔해로 더럽혀진 고인 물이 성수대 안에 조금 담겨 작은 생태계를 이루었다. 그 위로 금이 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의 시선이 식당으로 가는 길과 비슷한 방향을 향해있었다. 언덕 위 잔디밭의 경당에 압도되어 잠시 주춤거렸지만 배꼽시계는 짧은 틈조차 기다리지 않았다. 꼬르륵. 손님접대용 식당은 여자 생활관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식당에 가려면 방금 지나온 중학생 남자 건물을 지나쳐야 했다. 우리가 잠시 묵었던 건물로 시작해서 운동장과 거대한 고목을 지나 구건물을 지나쳐 송도가정(여자 생활관)이 보였다. 경당에서 잠시 넋을 놓다가 깜빡 정신 차리고는 앞서는 친구무리를 따라갔다. 그렇게 식당에 가던 중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형이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어, 야! 쟤 알리 아냐? 알리! 알리!!"
내 별명은 알리였다. 초코파이, 빠삐코, 비비빅, 알리바바 등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고 마음에 들었던 건 대뜸 나타난 형이 이름처럼 부른 별명이었다.알리는 영화 <천국의 계단>에서 나온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가족애가 담긴 감동실화 영화로 전 세계 형제자매와 부모들을 울린 위업을 남겼다. 가난한 동네에 살던 주인공 알리는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운동화를 잃었다. 일반적인 아이들은 운동화를 잃어버리면 부모님께 사달라고 조르는 게 당연했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인 두 남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몇 개월간 집세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남매는 어려서부터 일찍 철이 들었다. 집세 내기도 빠듯한 어른의 고충을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운동화를 사달라는 부탁을 속으로 곱씹기만 했지 뱉지는 못했다.알리는 연필 한 자루로 여동생과 거래했다. 연필을 받는 대신 자신의 신발을 빌려주기로 한 여동생 자라는 시간을 따로 정해 오빠와 운동화를 번갈아 신기로 하고 얼마 안 가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알리는 자라의 수업이 끝날 때마다 운동화를 빌리러 오는 게 미안했다. 그는 운동화가 무엇보다 정말 간절했다. 최근 열린 달리기 대회에서 3등에게만 상품으로 운동화가 주어진다는 걸 자라가 알리에게 알려줬고, 알리는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경기 당일, 알리는 자라에게 빌린 신발로 모래먼지 그득한 비포장 트랙을 달렸다. 알리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타깝게 1등을 하고 말았다. 알리는 달리면서 지각으로 혼났던 일들과, 여동생의 간절한 기도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우사인 볼트의 영혼이 깃들어 장딴지와 종아리에 열정이란 추친력을 한 통 주입했지만 알리는 오히려 슬픈 표정을 자아냈다. 대회가 끝난 뒤 알리는 집으로 오는 길에 여동생이 부른 강가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이 이룬 꿈과 가족의 우애가 상기된 물집 나고 흉 진 두 발을 졸졸 흐르는 여름물에 담갔다. 주홍색 금붕어는 얇고 부드러운 지느러미로 알리의 작은 두 발을 어루만져주었다. 소설 <주홍글씨>에 실린 가슴의 문양 A가 헤스터 프린 부인을 감싸 안은 것처럼 말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가는 아버지의 자전거에 새 운동화가 실린 채 영화는 막을 내렸다.진정한 '가족애'는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이 풍족하지 못해도 이와 같은 긍정적인 생활태도는 적어도 궁핍한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 아이들을 통해 인생에 대한 정직한 태도를 배웠다. 그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야 알리를 닮은 어린아이를 안아주었다.
나는 창밖에 고개를 빼들어 손을 흔들던 형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말없이 손만 덜렁 흔들기도 머쓱해서 "형! 나도 반가워!"라고 어색한 대답만 했다.
식당에 도착하고 나니 송도가정 1층 식당에 총 원장수녀님(왕엄마)이 계셨다. 이 수녀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우리가 속해있는 재단을 통틀어 최고봉 수녀님이시다. 검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동그란 안경을 걸친 데다 살짝 야윈 수녀님에게서 방금 지나친 경당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분의 사소한 태도에 깃들었음을 느꼈다. 마치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연상케 했다. 비록 왕엄마께서는 현재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당신의 존경스러운 자태는 늘 자녀들의 가슴깊이 활자와 언어와 목소리로 남아있다.문득 장례미사 때 마주친 수녀님의 영정사진이 떠올랐다. 항상 웃는 얼굴이셨고, 잔잔하고 고운 목소리로 이 먼 곳까지 잘 왔다며 어른스럽게 반겨주셨다. 수녀님이 이야기하시는 동안 우리는 교단에서 연설을 하는 교장선생님 앞에 따분하고 지루한 태도를 보이듯이 졸렸다. 단순히 어렸기에 가능했다. 머리가 굵어져 아예 부산으로 내려와 중·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살았을 적의 수녀님은 살벌하게 무서웠고, 그 위엄이 다른 수녀님들의 표정과 학생들의 고쳐진 자세만으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원장수녀님의 격려 담긴 훈화말씀이 끝나고 나서야 부산에서의 첫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한 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작게 잘린 진녹색 피망과 생양파가 달달한 케첩과 후추에 볶아져 만들어진 소시지 반찬, 채 썰기로 불리는 칼날타작을 두 번 나란히 겪은 쪽파와 당근이 밀집된 귀요미 계란말이, 시큼털털한 부산출신 김치, 앙증맞은 파편으로 덩그러니 식판 구석자리를 차지한 수박 두 조각, 여름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차가운 새침데기 귤... 탁구공을 못 본 지 오래되어 변종으로 변한 줄 알았으나 엄마 수녀님께서 분명 그것은 오렌지랬다... 아니, 한라봉이라고 하셨다. 제주도에서만 나는 희귀한 외국산 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수녀님께 다시 인사를 드렸다. 송도가정 로비로 나와 경당 위로 놓인 아스팔트로 이동할 즈음 짙은 황색 포장지로 감싸진 치즈 큐브 소시지를 까먹었다.
경당에서 대각 아래로, 송도가정에서 대각 위로 가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골고다 언덕이 생각나 비탈진 언덕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날 오전에 힘겹게 오르던 [예수님의 길]이 오른쪽으로 나 있었고, 두 갈래로 나눠진 왼쪽 길이 우리가 서 있는 위치였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잠시 경당에 머물렀다. 여름방학 숙제가 끝나고 생활실에서 빈둥빈둥 대거나 TV를 보던 형들은 송도가정 운동장(여고 운동장)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축구를 하러 갔다. 다른 몇몇 형들은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향했고, 십자가의 길 언덕 끝에 도착해야 볼 수 있는 천국의 계단 아래쪽으로 빠져나와 언덕길을 내려갔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면 우리가 생활했던 건물이 보였고, 운동장 위로 페인트가 다 벗겨진 두 개의 철봉골대와 거목 뒤로 길게 난 오름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 위로 여자 육상부생이 생활하는 건물과 모래사장 놀이터, 영유아 건물, 여고 운동장, 송도가정이 이어지는 가장 길쭉한 비탈길이 있었고, 그네와 미끄럼틀은 오름계단 옆을 장식한 잡초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삽화가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거목 주변 잡초에 붙은 무당벌레를 잡으러 주위를 쏘다녔다. 슬램덩크 채취가 강한 형들은 격리해제로 응집해 놓은 운동 에너지를 공에 발산하며 체육관으로 향하다 풀밭 위에 비의도적으로 공을 심었다. 언덕 아래로 공이 빠르게 튕겼다간 골고다 언덕을 이용하는 운전자들의 운명이 불시에 개입한 비틀림으로 급선회할 경우가 생기기에 형들은 갈랫길이 가까워지면 서둘러 다방면으로 까칠한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웠다.
삐죽빼죽 자란 따가운 잔디에 등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하나가 되어 온전한 평온을 느꼈고 여름방학은 천천히 자리를 옮기는 구름처럼 그 자리를 지나갔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로부터 마음속에 단조로운 평화가 찾아왔다.왕엄마는 그때 당시 두 발을 땅에 붙이고 계셨지만 지금은 구름 한 점이 되셨다. 성모님은 미리 알고 계셨던 걸까? 누워서 본 빛바랜 성모상은 아기 예수님을 차분한 표정으로 안고 계셨다. 나긋한 왕엄마의 웃음은 [소년의 집의 마더 테레사] 요안나 수녀님과 함께 아직까지도 어린 마음에 계셨다. 우리는 맑은 하늘을 감상했다.
'가지고자 하면 못 갖게 되고 못 가지는 상태이면 다 가진 상태가 된 것이리니.'우린 이미 세상을 가졌다. 마음에 빈틈없이 담아두었다. 슬픔과 기쁨, 미련과 시련, 안정과 불안, 그리고 평화.
우리는 몸에 구멍이 숭숭 난 담쟁이넝쿨과 커다란 거목의 서늘한 그늘을 지나 짐을 맡긴 거점으로 돌아왔다.날이 한적해서 그런지 졸음이 노곤하게 쏟아졌다. 친구들은 시원한 장판에 대자로 누워 낮잠을 청했다. 피아노 의자에 올라탄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깨너머의 친구들이 오븐 트레이에 담긴 쿠키 같아 남모르게 웃음 지어졌다. 음악 좋아하는 옆친구는 읽지도 못하는 악보를 읽는 척하며 뚱땅뚱땅 피아노를 쳤고, 창문 너머로 본 곤충 좋아하는 별명이 수수깡인 친구는 푸른 지붕 건물 앞 화단 아래로 줄지어 다니는 개미를 눈여겨보았다. 엉망인 피아노 선율을 따라 밖으로 나가서 친구 근처에 있는 화단에 다가섰다. 엉겅퀴에 앉아 깔따구를 사냥하는 1령 사마귀를 관찰했는데 어설픈 사냥으로 깔따구를 놓쳤고, 엉겅퀴에서 아래쪽 화단으로 떨어졌다.개미는 페로몬을 통해 집을 찾아 나선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허밍 망원경의 관점으로 보면 개미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쪼그려 앉아 작은 거인들의 행렬을 눈으로 열심히 좇다가 더위 때문인지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어린이는 단순히 호기심으로 곤충에 관심을 기운다며 어른들은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좀 더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입장을 대변해 보자면, 새로운 세상에 진귀함을 심미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뿐이다. 같은 지구에 사는 작은 생물체와 한 행성에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오감이 저릿하다고나 할까.
"이 개미들 좀 봐, 정말 지치지도 않고 일만 한다니까? 아휴, 난 잠이나 자야겠다."
친구가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 베짱이 낮잠을 자러 생활반으로 향했다. 나도 곧 친구의 뒤를 따라갔다.
코골이 소리가 끝날 무렵 가장 먼저 일어난 아이들은 짐으로 챙겨 온 과자를 꺼내 먹거나, 건물 주변을 돌아다녔다. 해는 어느덧 저물어 스산한 저녁이 되었다. 엄마수녀님은 생활실로 와서 나를 따로 불러냈다. 티 나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잠으로 위장한 시차적응 중이었다.늦봄이 되어 여름방학이 되기 며칠 전에 부산여행을 갈 거라는 소문이 소년의 집 초등학교 1학년 교실 전체에 돌았을 때, 한 친구가 와서 말하길 '너는 너만 아는 형'을 본다고 알려줬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몰랐지만 그 설렘은 형과 살았던 2년을 기억했다. 네 살 전에 구건물에 생활하는 형과 같이 살았던 사람은 호세아 반에서 나뿐이었다. 그래서 엄마 수녀님은 반에서 가장 작은 내 손을 잡고 운동장 아래로 향했다. 운동장 위 거목 근처로 도착하자 수녀님은 눈을 크게 뜨며 말을 꺼내셨다.
"형들은 조심해야 한단다. 집에 있을 때보다 조심하게 굴지 않으면 밤에 나타나 잡아가거든!"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풀렸지만 수녀님의 손만 꼭 잡았다. 수녀님은 이마 주름을 걷으시고 안색을 살피셨다.
"무섭니? 돌아갈까?"
고민했다. 돌아갈까? 형을 볼까? 자신이 없었다. 오전에 식당에 가면서도 그 건물은 흉흉했고 철조망이 쳐진 게 보통의 건물로 보이지 않았다. 심령단체가 와서 굿이나 삼십 판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외벽은 심하게 노후되어 금이 갔고 그 위로 빗물이 몇 십 년간 스며들고 마르기를 반복해 상아색 콘크리트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공포영화 세트장으로 써도 한치의 모자람 없는 분위기가 건물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군청색에 가까워진 하늘에 동화된 그림자 위로 거목 주변에 둘러진 현무암을 자신 없게 훑는 일본 왕개미를 뚫어져라 봤다.
"아, 아니에요... 가요."
운동장에 남은 잡초가 깨끗하게 제초되지 않아서 소가 위로 핥은 듯 풀들의 뾰족한 꼭짓점이 위로 꼿꼿하게 섰다. 마른하늘에 해초를 흉내 내는 수풀을 헤집고 도착한 곳은 구건물 후문이었다. 서울에서 본 여자 생활관 후문과 비슷했다. 후문 앞에 짤막한 다리가 나 있었고, 추락사고가 나지 않도록 철망으로 사방팔방 둘러싸여 있었다. 고목과 후문의 위치가 약간 비껴져 있었다. 푸른 지붕을 머리에 쓴 건물부터 걸어 나와 겨우 오십 걸음 정도 되는 곳이었다.아무리 비밀의 정원이라지만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은 단거리와 장애물은 거목에 잠식된 유령들의 최선의 보안이었다. 수녀님은 철제로 둘러싸인 건널다리에서 혹여나 작은 발이 마름모 사이로 빠지지 않을까 손을 잡아주시고는 오래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다리를 지나가면 네 개의 생활반이 있었다. 후문을 기준으로 생활반이 앞에 세 개, 그 맞은편에 침실이 각각 하나씩 있고 화장실, 세면실은 좌측 끝에 붙어 있었다. 건널다리를 지나 내려온 후문부터가 로비이고 4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아래 계단으로 가면 정문이 나왔지만, 거긴 폐허 같은 상태라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어둑하고 곰팡이 냄새나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녀님은 고사리손을 잡고 계단 아래로 향했다. 엄마 수녀님의 손은 까칠하고 묵직했으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른의 손이 이렇게나 클 줄 몰랐다. 당신의 보드라운 손의 촉감, 따뜻한 사랑을 무덤에 가서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형을 보려면 중간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장판에 앉아 옹기종기 모여 TV를 보는 형들의 시선이 엄마 수녀님에게로 쏠렸고 나는 그 뒤로 얼른 숨었다. 회색 치마가 몸을 가릴 때면 성모 마리아의 포근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상하리만치 이 방에서도 방금 지나치며 느낀 음산한 기운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숨이 가빠왔다. 그때 복사를 섰던 형이 들어왔다. 네 살 무렵에 어설픈 걸음마에 힘이 되도록 발등에 작은 아이를 올렸던 형이었다. 내가 걸어갈 수 있게 도와준 바다 같은 좋은 형이었다.형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갑갑하던 가슴이 한 꺼풀에 시원히 풀리는 것 같아 괜스레 안심이 됐다. 형이 안부를 물었고 그동안 잘 지냈냐며 공포에 떨어 울 것 같은 눈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 형의 눈 너머로 반가움을 마주하기도 했지만, 허망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색의 슬픔도 보였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하면서 어른의 눈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형과의 만남을 끝내고 다시 푸른 지붕에 도착했을 땐 이미 9시가 지나있었다. 다리가 금세 풀렸고 잠이 쏟아졌다. 다음날은 새벽 기상이라 아이의 몸으로써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여행 중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다. 땅거미가 커튼처럼 창문을 가렸고 우리는 가족이 한가득 담긴 오븐 트레이 장판에서 일전 경험과 사색의 물렁함을 삭이며 겉바속촉 쿠키가 되었다. 어른이 되어야 가질 허무함을 잊고 찌르레기 소리로 축복 안에 기쁨과 슬픔을 반반씩 머금으며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