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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귤화위지(江南橘化爲枳)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람도 장소나 환경에 따라 완전히 달라짐을 이르는 말이다.
江 : 강 강
南 : 남녘 남
橘 : 귤 귤
化 : 될 화
爲 : 할 위
枳 : 탱자 지
[동의어]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
안영(晏嬰)의 자(字)는 평중(平仲)으로 제(齊)나라의 영공(靈公), 장공(庄公), 경공(景公) 3세를 섬긴 세신(世臣)이다. 그러나 그동안 제나라에는 잦은 내란과 시역사건(弑逆事件)으로 국력이 약해진데다가 강력한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세력에 눌려 기를 펴 보지 못하던 시대이다.
이때도 초공왕(楚共王)의 아들 초영왕(楚灵王)이 자기 형인 초강왕(楚康王) 부자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나아가 장대(章臺)라는 호화로운 별궁을 지어 놓고 국력을 과시하며 각국 제후들을 불러 모아 축하를 받을 때였다. 만일 이 축하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는 초나라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여겨 침공할 빌미를 만들곤 했다.
제나라도 그 축하의 무리 중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초나라에 비하여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서는 안영을 친선 특사로 삼아 초나라에 보내었다.
초영왕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과인이 듣자니 안평중은 키가 다섯 자도 안 되는 작은 몸을 가졌음에도 훌륭하다는 그의 이름은 천하의 제후들에게 알려져 있다. 지금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 초나라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져 있으니 과인은 이 기회에 저 안평중의 기를 꺾어 놓음으로써 초나라의 위엄을 드높이고 싶다. 경들은 좋은 계획을 세워 시행해 보도록 하라.”
이리하여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안영을 골릴 수 있는 방법을 갖가지로 준비해 놓았다. 드디어 안영이 제나라 성 밖에 도착하였다. 안영은 진나라와 초나라 다음으로 큰 제나라의 사신임에도 낡은 관복에 여윈 말을 타고 몇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채 성문 앞에 와서 섰다.
그때 성문은 닫히고 높이가 다섯 자쯤 되는 조그마한 곁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지기가 나와서 그 작은 문을 가리키며 그리로 들어오라고 했다.
안영이 호령을 하였다.“이놈! 이런 문은 우리 제나라에서는 개만 드나들게 하는 개구멍이다. 개구멍만 열어 놓은 것을 보니까 이 나라에는 개 나라에서만 사신이 오는 모양이지. 나는 사람의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개구멍으로는 안 들어가겠다.”
문지기는 두말 못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성문 안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고 물자도 풍부하여 과연 강대국의 도읍지 같았다. 그런데 안영이 가는 길 맞은편에서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 하나가 왔다. 거기에는 수염이 길게 난 큰 키의 사내가 갑옷투구를 착용하고 큰 칼과 활을 든 채 앞에 와서 읍(揖)을 하고 맞이하였다.
안영은 또한 자신이 키가 작은 것을 비웃으려고 보낸 것임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다.“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나라끼리 친선을 맺자고 온 것인데 무엇 때문에 완전무장을 한 무사가 나왔소, 이 나라는 우리 일행이 그렇게 겁난단 말이오?”
무사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안영 일행이 궁문 가까이 가자 십여 명의 관원들이 큰 갓에 넓은 띠를 두르고 양쪽에 갈라서 있었다. 안영이 수레에서 내리니 그들은 앞으로 와서 차례로 인사를 하였다.
맨 처음, 벼슬은 교윤(郊尹)이고 이름은 두성연(斗成燕)이라고 밝힌 사람이 말하였다.“대부께서는 바로 제나라의 사신이신 안평중이시지요?”“그렇소이다.”
두성연이 말하길“이 사람이 아는 바에 의하면 제나라는 옛날 태공(太公)에게 봉작을 내린 나라로 병력이 우리 초나라나 진나라와 맞먹을 뿐 아니라 물자는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줄 압니다. 저 환공께서 패권을 누린 이후 권력 찬탈이 계속 일어나고 이웃 나라의 침공을 연달아 받아서 지금은 진나라와 초나라를 분주히 오가며 친선을 맺어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금 제나라의 군주의 포부는 환공만 못하고 안평중공께서는 그 재질이 관중만 못하신 모양이지요? 그러기에 경륜을 펴지 못하고 이렇게 큰 나라를 찾아다니며 마치 그 나라의 신하처럼 머리를 굽히고 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영이 몸을 가다듬고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좋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할 일을 환하게 아는 자를 일컬어 걸출한 사람이라고 하고, 바뀌는 시대를 잘 대처하는 사람을 영특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흘러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주천자(周天子)의 세력이 약해진 이후로 패국이 교대로 일어났었지요. 곧 제(齊)나라와 진(陳)나라는 중원(中原)에서 패권을 누렸고 진(秦)나라는 서쪽 오랑캐를 평정하였으며 초(楚)나라는 남쪽 오랑캐를 제압하였으니 아무리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 하나 운기도 뒤따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진문공(晉文公) 같은 훌륭한 분도 자신의 초상 중에 진(秦)나라의 침공을 받았고, 진목공(秦穆公)같이 나라를 발전시킨 분도 그 자손 대에 와서 국력이 약해졌지요. 초나라에서도 초장왕께서 패권을 누린 이후 여러 차례 진(陳)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모를 당하지 않았소. 그러니 국력이 약해진 나라가 어찌 제(齊)나라뿐이겠소? 우리 주군께서 이러한 시세의 변화를 간파하시고 현재 병력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는 중이오. 그리고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이웃 나라로서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온 것인데 어째서 신하처럼 복종한다고 하시오? 내가 알기로는 귀관(貴官)의 할아버지 두발(斗勃)은 초나라의 명신으로서 시무(時務)를 잘 간파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귀관은 그의 직계 후손이 아닌가 의심스럽소이다.”
두성연이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물러났다. 그러자 자신을 상대부(上大夫) 양개(陽匃)라고 밝힌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초목왕(楚穆王)의 증손이었다.“내가 듣기에는 안평중공께서는 스스로 시대의 흐름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제나라에서 재상인 최서(崔舒)와 경봉(慶封)의 난리에 두 군주가 시해당하였을 때 충신들은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많이 죽었고 진수무(陳須无) 같은 사람은 제나라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평중공은 제나라의 세신(世臣)으로서 역적을 토벌하지도 못했고 또 충성을 위해 죽지도 못했고 또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지도 못했으니 이것은 윗사람에게 아첨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한 태도가 아닐는지요?”
안영이 대답했다.“내가 듣기에‘큰 지조와 절개를 가진 자는 작은 신용은 무시한다’라고 하고,‘먼 장래를 걱정하는 자는 잔꾀를 부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나라의 군주가 나라의 일을 하다가 죽게 되면 그 신하된 자는 따라 죽어야 하지만 우리 선군(先君)은 나라 일을 하다가 시해당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로 여색을 가까이 하다가 역시 사적인 원한 때문에 시역사건이 벌어진 것이오. 그러니 내가 아무리 큰 재목이 못 된다손 치기로서니 사사로운 사랑을 추구하는 대열에 끼었다가 함께 죽음으로써 이름을 깨끗이 지키겠습니까? 하지만‘남의 신하가 된 자는 국가가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힘이 닿는 한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하여야 하고, 도저히 힘이 닿지 않을 때는 그 나라를 떠나야 한다’라고 들었소. 그런데 내가 떠나지 못한 것은 새 군주를 모시어 사직을 잇게 하려고 한 것이지 내 지위를 탐내어서 있은 것은 아니요. 생각해 보시오. 나라가 어려울 때 다 떠나 버리면 그 나라는 어떻게 유지되겠소? 게다가 군주의 시해사건은 어느 나라인들 없습니까? 귀관이 보기에는 이 초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는 관원 중에는 시해사건에 있어서 역적을 토벌한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이 말은 양개의 증조부인 목왕(穆王)이 그 아버지인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즉위하였는데도 자신들의 과오는 숨긴 채 남의 나라 약점을 들추는데 대해 반성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때 오른쪽 반열에 섰던 우윤(右尹) 벼슬을 하는 정단(鄭丹)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말했다.“안평중공! 귀공께서 새 군주를 모시어 나라의 종묘사직를 안정시키었다고 하나, 이는 너무 과장한 말이 아닙니까? 최씨, 경씨가 서로 겨루고, 그 밖에도 제나라의 세신(世臣)들인 난(欒)씨, 고(高)씨, 진(陳)씨, 포(鮑)씨 등이 세력 다툼을 하는데도 귀공께서는 요리조리 관망만 하고 있었지, 획기적인 계획을 내어 그 사건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소리를 나는 못 들었습니다. 성의를 다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겨우 이런 것입니까?”
안영이 이번에는 한바탕 웃고 말하였다.“귀공께서는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릅니다 그려. 최씨와 경씨의 다툼은 자기네끼리 한 일이므로 나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든 네 명의 세신들이 일으킨 정변(政變)에 대해서는 내가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강약을 조절하였기 때문에 나라와 군주를 보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소. 나의 이 깊은 뜻을 어찌 다른 나라에서 보는 사람이 엿볼 수 있겠소?”
이번에는 태재(太宰) 원계강(薳啓疆)이라는 사람이 비꼬는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대장부가 되어 훌륭한 군주를 만나 잘못된 시대를 바로잡자면 품은 도량이 크고 위엄도 갖추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생각일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안평중공은 비루하고 인색한 사람에 불과한 듯하오.”
안영이 물었다.“귀공께서는 왜 내가 그렇게 보입니까?”
원계강이 말했다.“훌륭한 군주를 섬기는 대장부로서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 마땅히 그 직위에 걸맞은 복장과 행차를 따라야 자기가 섬기는 주군의 위엄도 빛내는 것입니다. 더구나 외국에 나온 사신이 낡은 복장에 여윈 말을 타고 온 것을 보면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나라에서 주는 봉급이 부족해 그렇습니까? 내가 듣기에는 안평중은 갖옷(털가죽 옷) 한 벌로 30년을 견디었고 제사 때에는 돼지고기가 모자라서 그릇을 다 채우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비루하고 인색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안영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었다.“귀공의 소견이 왜 그리 좁습니까? 나 안영이 정승의 자리에 앉은 이후 우리 친족은 모두 갖옷을 입을 수 있고 우리 외가 집안도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처가 집안도 모두 굶주림을 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시골에 있는 백성의 신분으로 나 안영 한 사람 때문에 식사를 배불리 먹는 자가 자그마치 70여 집이나 됩니다. 그러니 나는 비록 검소하게 산다고 하지만 우리 삼족(三族)이 모두 살찌고 백성이 만족해합니다. 이로써 우리 군주의 덕을 빛내니 이보다 더 큰 사치와 위엄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에는 초왕의 행차를 전담하는 우거(右車)라는 직책을 가진 공자낭와(公子囊瓦)라는 자가 큰 소리로 웃으며 나서서 말했다.“내가 듣기로는 옛날 성탕(成湯)은 키가 9척으로 훌륭한 임금이 되었고, 진목공(秦穆公)의 신하인 공손지(公孫枝)는 신장이 9척으로 만 명의 장사가 당할 수 없는 용맹을 가진 장군이 되었소. 그런데 지금 귀공의 사람됨을 보니 키는 5척도 못 되고 힘은 닭 한 마리도 못 당할 것 같은데 그저 입에 발린 말로써 유능한 채하니 부끄럽지 않소이까?”
안영이 이번에는 입가에 약간 경련을 일으키며 격앙된 말로 대답했다.“나는 들으니 저울의 추는 작지만 천 근의 무게를 들 수 있고, 삿대는 길어 봐야 배 한 척을 젓는 일밖에 못한다고 합니다. 키 크고 힘센 사람으로 송(宋)나라 남궁장만(南宮長万)은 송민공(宋閔公)을 죽이어 역적 노릇을 하였지요. 그런데 귀공께서도 키만 큰 것으로 보아 그런 사람들과 가깝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안영은 스스로 못나고 무력한 줄 알기 때문에 그저 누가 말을 걸어오면 대답할 뿐인데 교묘한 말재주로 입만 나불거린 일은 없습니다.”
이는 그 큰 키에 초왕의 말몰이 밖에 못 된다는 비꼼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초나라의 재상인 영윤(令尹) 원파(薳罷)가 오거(伍擧)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오거가 안영 앞에 나와 손을 모으고 읍(揖)을 한 뒤에 여러 사람에게 말하였다.“이 안평중께서는 제나라의 훌륭하신 선비이오. 여러분께서는 함부로 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는 오거가 안영을 인도하여 궁 안으로 들어가서 초영왕을 뵈었다. 영왕은 안영를 보자 대뜸 말하였다.“제나라에는 사람이 없습니까?”
안영曰:“제나라에는 겨울이면 사람들의 입김이 구름을 만들고, 여름이면 사람들의 땀이 비를 만듭니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어깨를 서로 부딪치며 걷고, 그들이 서 있으면 발을 더 들여놓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다니요?”
영왕曰:“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키가 작은 소인을 특사로 보냈소이까?”
안영曰:“우리 나라에서 남의 나라로 특사를 보낼 때는 규칙이 있습니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나라에 보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또 그만 못한 나라로 보냅니다. 마찬가지로 키 큰 사람은 큰 나라로 보내고 소인은 소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신은 소인이고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우리 주군께서 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줄로 압니다.”
초영왕은 한바탕 크게 웃고 안영을 정중하게 맞이하여 국가 간의 수교하는 일을 원만하게 이루었다. 그리고 환영하는 잔치를 베풀 때 일이다. 초영왕이 안영에게 귤을 한 개 건너 주었다.
안영이 그 과일을 껍질 채로 먹으려고 하자 초왕이 웃으며 말했다.“참 제나라에는 귤이 나지 않지요. 껍질을 까지 않고 그대로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니 말이오.”
안영이 대답했다.“신은 듣자니, 임금이 먹을 것을 내려 주거든 참외나 복숭아 그리고 귤과 감도 깎지 않고 그대로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음식을 내려 주시기에 신은 대왕이 우리 주군과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그것을 까서 먹으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데 어찌 감히 깎아 먹겠습니까?”
영왕이 그 소리를 듣자 안영의 예절바른 말에 감동되어 친히 술을 한잔 부어 안영에게 권하였다. 그리하여 술이 몇 잔 돌아갔을 때 무사 서너 명이 죄수를 묶어 가지고 뜰 앞을 지나 궁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영왕이 물었다.“그자는 어디 사람이고 무슨 죄를 지었더냐?”“제나라 사람인데 여기서 도둑질을 하다가 들켰습니다.”
영왕이 안영을 바라보며 농담 섞인 말소리로 이렇게 물었다.“혹시 귀국에서는 도둑이 많습니까?”
안영이 자신을 골리려고 만든 수작인 것임을 벌써 눈치 채고 머리를 조아리어 황송한 체하며 말하였다.“우리나라 사람이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다고 하니 우선 사과부터 드립니다. 그런데 신은 듣자니 강남에서 잘 자라는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그것이 자라는 환경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시 저 사람도 제나라에 있을 때는 양민이었는데 이곳 초나라에 와서 물든 것이나 아닐는지요?”
영왕이 한참 생각하다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과인이 귀공을 좀 어려운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다가 도리어 당하였소 그려.”
그리고 안자의 재치 있는 이 문답은 훗날‘사는 환경에 따라 성격이 변화한다’는 뜻으로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주례(周禮)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9월은 탱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때다. 감귤처럼 생긴 탱자는 향기는 좋지만 먹지는 못한다. 식물학적으로 둘 다 운향과에 속하지만 하나는 식용으로 쓸모가 많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는 이 두 가지 열매를 두고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었다.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기후와 토양이 바뀌면 정말로 귤나무에서 탱자가 열릴까? 귤화위지는 생물학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도, 환경의 차이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추구하는 목표와 행동, 선택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비유한 말이다.
어찌 보면 동, 식물은 자연환경에 적응적 진화하는 데 애를 쓰는 반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회의 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속성이 많다. 예컨대 일 잘하는 사람을 제대로 보상하고 해악을 끼친 사람을 적절하게 제재하며, 귤과 탱자를 혼동하지 않는 조직에서는 누구나 성실하게 일하려는 유인이 있다.
그러나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예측 불가능하고, 내가 부린 재주에 다른 사람이 공을 채가는 조직에서는 힘 있는 자와의 친분 맺기 정치를 앞세워 비정상적인 잇속을 챙기려는 탱자족이 우세하게 마련이다. 탱자족에 끼지 못하는 대다수 구성원들은 냉소주의에 빠지면서 조직의 파망(破網)을 재촉할 것이다.
어느 조직, 어느 사회든 탱자족과 귤족 중 누가 우대받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제도에서 비롯된다. 국가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영국의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멤버였던 이사벨라버드 비숍은 조선을 방문, 탐사하고는‘한국과 이웃 나라들’이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비숍은 조선인에 대한 첫 인상이 지저분하고 게으르고 가망 없다고 느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근면성실하게 일하고 재산을 모은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꾼다. 조선에서 농부들이 양반과 관료들의 가혹한 세금 등으로 이익이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경작하고, 시베리아 정착민들도 그대로 조선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비숍의 결론이었다.
지금도 기업조직을 포함한 도처에서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잘되는 음식점은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누가 주인이고 종업원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다들 열심히 일하는 특징이 있다. 노력과 보상의 연계에 대한 주인과 종업원 사이의 신뢰가 남다른 협력과 고객 응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고향이나 시골에 가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는 노란 열매를 혹시라도 보게 되면 한번쯤 자문해 보시라. 우리 회사는 탱자가 잘되는지 아니면 귤이 잘되는지.
▶ 江(강)은 형성문자로 冮(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工(공, 강; 크다)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江(강)은 큰 시내 곧 강의 뜻이다. 본디 양자강(揚子江)을 가리켰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물 하(河), 바다 해(海), 시내 계(溪), 물 수(水),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큰산 악(岳)이다. 용례로는 강과 산을 강산(江山), 강의 남쪽을 강남(江南), 강의 북쪽을 강북(江北),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강풍(江風), 강물이 흐르는 가에 닿는 땅을 강변(江邊), 강물의 흐름을 강류(江流), 강에서 나는 모래를 강사(江沙), 강 기슭을 강안(江岸), 세상을 피하여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을 강호지인(江湖之人), 자연을 벗삼아 누리는 즐거움을 강호지락(江湖之樂),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을 강호산인(江湖散人), 학문이 두각을 나타낸 후 퇴보하는 것을 뜻하는 강랑재진(江郞才盡), 강이나 호수 위에 안개처럼 보얗게 이는 잔물결을 강호연파(江湖煙波), 강산은 늙지 않고 영구 불변이라는 강산불로(江山不老),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이라는 강산풍월(江山風月), 산수의 풍경이 사람의 시정을 도와 좋은 작품을 만들게 한다는 강산지조(江山之助),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이 없는 산천을 만고강산(萬古江山), 한강에 아무리 돌을 많이 집어 넣어도 메울 수 없다는 한강투석(漢江投石),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산천이라는 금수강산(錦繡江山),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다는 동주제강(同舟濟江) 등에 쓰인다.
▶ 南(남)은 회의문자로 울타리를 치고 많은 양을 기르는 곳이 남쪽 지방(地方)이었기 때문에 남쪽을 나타낸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북녘 북(北)이다. 용례로는 남쪽으로 내려감을 남하(南下), 남쪽으로 향함을 남향(南向), 북쪽에서 남쪽지방을 침범함을 남침(南侵), 남쪽에 있는 산을 남산(南山), 지구를 적도에서 둘로 나누었을 때의 남쪽 부분을 남반구(南半球), 남쪽으로 난 나뭇가지를 남가(南柯), 덧없는 꿈이나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이르는 남가일몽(南柯一夢), 일생과 부귀영화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남가지몽(南柯之夢), 남쪽 땅의 귤나무를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 나무로 변한다는 남귤북지(南橘北枳), 남쪽지방은 남자가 잘나고 북쪽지방은 여자가 곱다는 남남북녀(南男北女), 남산을 옮길 수 있다는 남산가이(南山可移), 수레의 끌채는 남을 향하고 바퀴는 북으로 간다는 남원북철(南轅北轍), 학예에 전문 지식도 없이 함부로 날뜀을 두고 이르는 남곽남취(南郭濫吹), 아름답고 귀중한 물건을 비유해 이르는 남금동전(南金東箭) 등에 쓰인다.
▶ 橘(귤)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木(목;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矞(율, 귤)로 이루어졌다. 橘(귤)은 귤나무의 열매이며, 동글납작한 액과(液果)로 물이 많고, 맛은 시면서도 달콤 쌉쌀하다. 껍질은 등황색(橙黃色)이고, 껍질을 벗겨 살을 먹거나 쥬스, 향료(香料) 따위에 쓰고, 껍질은 말려서 약으로도 쓴다. 감귤(柑橘), 귤포, 밀감이라고 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귤 감(柑)이다. 용례로는 귤나무의 잎을 귤엽(橘葉), 귤과 유자를 귤유(橘柚), 귤 속을 까서 넣거나 또는 귤껍질을 썰어 넣고 빚은 술을 귤주(橘酒), 귤의 껍질을 귤피(橘皮), 귤피의 안쪽에 있는 흰 부분을 벗겨낸 껍질을 귤홍(橘紅), 귤나무의 꽃을 귤화(橘花), 의사나 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을 귤정(橘井), 바둑을 두는 즐거움을 이르는 귤중지락(橘中之樂),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 등에 쓰인다.
▶ 化(화)는 회의문자로 訛(와), 譌(와)의 고자(古字)이고, 僞(와)는 동자(同字)이다. 사람(人)이 모양을 바꿔 다른 사람(匕)이 된다는 뜻을 합(合)한 글자로 되다를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고칠 개(改), 바꿀 역(易), 고칠 경(更), 변할 변(變), 가죽 혁(革)이다. 용례로는 다른 것으로 변하여 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이르는 화거(化去), 죽은 사람을 화자(化者),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화상(化像), 둘 이상의 물질이 결합하여 본디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새로 특유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 되는 일을 화합(化合), 성질을 변하게 함을 화성(化性), 마음을 변하게 함을 화심(化心), 얼굴을 곱게 꾸밈을 화장(化粧), 지질시대에 살았던 동식물의 유해 또는 그 흔적이 퇴적암 같은 바위 속에 남아 있는 화석(化石) 등에 쓰인다.
▶ 爲(위)는 상형문자로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양을 본떴다. 전(轉)하여 '하다,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의 뜻으로 삼고 다시 전(轉)하여 '남을 위하다, 나라를 위하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옮길 이(移),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 있다. 용례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위선(爲先), 정치(政治)를 하는 사람을 위정자(爲政者), 임금 노릇하기도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는 위군난위신불이(爲君難爲臣不易),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된다는 위어육(爲魚肉),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라는 위국충절(爲國忠節) 등에 쓰인다.
▶ 枳(지)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只(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枳(지)는 탱자나무, 가지에서 전(轉)하여 막다, 저지하다의 뜻이 있다. 나무로 만든 악기를 지어(枳敔), 벼슬길이 막힘을 지색(枳塞), 어린 탱자를 썰어서 말린 약재를 지실(枳實), 썰어 말린 탱자를 기각(枳殼), 금강산의 다른 이름을 지달산(枳怛山),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뜻으로 사람은 사는 곳의 환경에 따라 착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남귤북지(南橘北枳)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