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2
2월5일[연중 제5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JEOmtXtr_I (지상술 힐라리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467273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건장한 청년들이 줄줄이 들이닥쳤습니다. 먼길 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한 분위기여서 주특기인 치즈·계란 라면을 열심히 끓여댔습니다.
라면 끓이는 데는 제 나름대로 신조가 있습니다. 국물이 한강이거나 퉁퉁 불어터진 라면은 절대로 용서가 안됩니다. 조리 설명서에 따른 적정량의 물에 치즈 한쪽, 파 송송 계란 탁! 불어터지기 전에 신속·정확·공정한 배분!
눈이 휘둥그래진 청년들이 후후 불어가며, 맛있다 맛있다 하며 폭풍 흡입하는 모습에 제 마음이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조리에 있어서 적절한 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주제로 한 가지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 5장 13절)
어촌에 살다 보니 새삼 소금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아 와도 시간을 조금만 지체해도 상하게 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신속히 손질을 해서 적정량의 소금을 뿌리고 해풍에 말리게 되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구워 먹을 때는 또 어떻습니까? 잘 손질해서 소금을 뿌려준 후, 숯불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익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입니다.
따지고 보니 소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역할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고민하던 중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성인(聖人)이 될 것이며, 군인은 군대에서 성인이 될 것이며, 환자는 병원에서 성인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은 자신의 공부를 통해서, 농부는 논과 밭에서, 사제는 사제로서 사목의 현장에서, 공무원은 사무실에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바치는 희생의 발걸음, 바로 그것입니다.”(희망의 길, 가톨릭출판사)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5f-W_o0wjE
++++++++++++++++++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특파원 K’라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최근 한 프랑스 방송사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파리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여자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데려가려 할 때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단 두 사람만이 “저 사람 엄마 맞니?”라고 물으며 아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도와주려는 마음이 들었느냐 질문하니 보통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아이에게 “엄마 어딨니?”라고 묻는데 그 사람은 바로 아이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과 소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은총과 진리를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서 어떤 것에 맛을 더하고 부패하지 않게 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위 이야기에서 두 한국 청년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본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자신이 짠맛과 빛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두 한국 청년들은 한국에서 그러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당신의 가르침을 주었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피를 쏟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고 그러니 당연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별개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일 때 한 본당 선배도 군대 첫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러한 상황에 마주쳤습니다. 친구들은 그 선배를 사창가로 데려갔고 자신들도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선배는 몸부림을 쳤고 그 과정에서 옷도 찢어지고 안경도 깨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게 되자 친구들도 술만 한잔 더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도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친구들에게 소외당할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두려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그러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바로 ‘창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주는 이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창조자가 됨은 생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결혼도 실패하고 말기 암 환자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열심히 살다가 생을 마친 일명 ‘풀빵 엄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들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차 알아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들의 빛과 소금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끓여준 새해 첫날 떡국이 그들에겐 소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준 가르침이 그들에겐 빛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들도 자녀를 낳으면 그렇게 부모가 될 것입니다. 받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 진리와 은총을 준다는 것. 이것은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창조자가 되는 길입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실까요? 피조물은 소멸하지만, 창조자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창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자는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은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소유자만이 영원히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어머니가 되는 것일까요? 자녀에게 인간이란 믿음을 주는 부모를 넘어서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주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가진 믿음을 줍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 자녀임을 믿어 하느님 자녀처럼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면 나에게서 또 다른 하느님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가 됩니다.
인간을 낳은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이기에 영원할 수 없지만, 하느님 자녀를 낳는 어머니는 창조자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영원히 삽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이 영원히 삽니다. 그 믿음을 주는 방식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는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 생명이고 진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진 자녀를 낳는 어머니들이 됩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삶은 견딜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타향도 정이 들어 고향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지만 이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자식의 신앙 문제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성당에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복사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부터 많은 자녀들은 성당을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자녀들은 신앙의 등불이 점점 꺼져갈까요? 대화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잘 찾아주고 도와주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시와 명령은 있었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밖에서 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했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컴퓨터 게임에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그 안에서도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시대에는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았지만 우리들의 시대에는 컴퓨터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나고 논답니다.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직업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쇼핑도, 은행업무도, 예약도 대부분 컴퓨터로 하는 세상입니다.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 있기 전에도 폭력과 전쟁은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 우승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끔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견진성사 안 받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견진성사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받는 것인데,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신앙에 확신이 서면 그때 ‘Confirmation’을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리 시간에 배운 것과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공헌한 것도 많지만 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유 있는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의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내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정한 규칙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다. 집안에 기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마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수제비’를 해 주셨습니다. 수제비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찰지게 반죽을 하였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완전히 스며들어 반죽이 찰져야만 수제비는 끓여도 잘 풀어지지 않고, 맛이 쫀득쫀득 했습니다. 수제비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수한 육수와 호박과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는 비오는 날 저녁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운 부식을 사오지 못한 날에는 ‘비빔밥’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양푼에 야채와 밥을 넣고 구수한 들기름을 넣고 비벼 주었습니다. 맛을 더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수제비가 밀가루와 물이 하나 된 작품이라면 비빔밥은 야채와 밥이 기름에 어우러져서 각자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기름도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빔밥의 고소한 맛을 더해 줍니다. 저는 신앙에는 두 가지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물이 스며들어 밀가루를 맛있는 반죽으로 만들어주는 수제비의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기름처럼 밥과 야채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의 영성입니다.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자녀들의 고유한 인격과 품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대로 하나가 되도록 강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리가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꽃이 피게 하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여라.” 저는 이것이 스며듦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기름이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죽’이 되기보다는 ‘비빔밥’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기름이 되어 아이들의 삶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서 맛을 내는 스며듦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은 각자의 품격을 잃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비빔밥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전례의 주제는 빛이다. 연중 제3주일에도 빛이 나오는데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의 전례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시켜 세상에서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언행의 일치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산상수훈의 내용을 확대하고 있다. 마태오는 오늘의 말씀을 산상설교에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신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 즉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3-14절)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고 있다. 소금이란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기능적인 상대성에서 찾아야 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이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께서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13절) 하셨다. 복음에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개념은 세상(14절)과 일치하는 말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행동들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행위가 모든 것에 새 맛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맛과 의욕을 갖게 해줄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13절) 그런데 천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들 안에 구원의 맛과 그 맛을 전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빛의 상징적 개념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빛의 비유는 산 위에 있는 마을의 비유(14절)와 등경 위에 얹어 비추게 하는(15절)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빛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빛 자체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생명과 기쁨,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빛과 같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에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다. 즉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은 산상설교의 정신에 따르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선교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 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줄 수 있고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 1.48)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의 행위 이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 행위는 새벽 동이 트는 것과 같이 시작되어 대낮같이 밝아 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며, 세상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때 교회는 그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1-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것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코린 2,4) 세상에 증거가 돼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복음의 앞 문맥을 살펴보면, 산상수훈 담화문을 시작하는 ‘참 행복(진복팔단)’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이 오늘의 복음 구절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선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하신 다음에 바로 오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이 이어지기에,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참 행복의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은 일상생활에서 보거나 성경의 전통에서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은유입니다.
예로부터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첨가물일 뿐만 아니라, 염장(鹽藏) 을 통해 식료품을 오래 저장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품이었습니다.
‘빛’은 신약성경, 구약성경을 막론하고 익숙하고 중요한 은유인데, 신약성경이 아직 쓰여 지기 전인 예수님 당대에는 유일한 성경이었던 구약성경에서는 ‘빛’이 주로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토라(율법), 성전, 예루살렘’ 등을 가리키는 은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인 당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너희는’이라는 희랍어 원문 표현에서 강조법을 써서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바로 너희 자신이 빛과 소금”이라는 뜻으로 ‘너희’를 강조하여 표현하십니다.
뒤이어지는 산상수훈 담화문(마태 5,17-7,12)의 가르침들이 말하자면, 어떻게 살아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의 모습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담화문 대신에, ‘빛’을 모티브로 오늘 제1독서를 복음과 연결 지어 읽어 보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곧,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길은,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가 ‘뛰어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뛰어난 언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복음 선포하셨듯이(제2독서),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등을 통해 화려함을 자랑하기 바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나 인간적인 드러남’으로써 ‘빛’이 되는 게 아니라, 이웃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거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촉구하십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우리 믿음의 정도를 가늠하고 재어 볼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일까요?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 수를 통계 내어 가늠하면 되겠습니까? 교회의 여러 성사들에 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수로 판단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따르면 우리 믿음의 정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 사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 시작 부분으로 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 바로 다음의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고 전합니다(5,1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산에서, 성당에서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이 산을 내려가기가 두렵습니다. 비록 잠깐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산에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산에서 내려간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 가서 예수님을 전하였는데 그의 말을 들은 그리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사도 17,32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맨 처음 코린토에 갔을 때 자신은 약하였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무척 두렵고 떨렸다고 하였습니다.(1코린 2,3 참조) 우리는 예수님께 들은 생명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에서 내려와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신자가 아닌 듯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의 본분을 외면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소금의 비유는 너무도 명확합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세상 안에서 참되게 증언하며 세상을 맛나고 풍요롭게 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아 주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야고 1,27 참조) 나아가 세상의 부조리와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우리의 인생이 신자의 맛과 본분을 잃지 않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께 간절히 청하며 용기를 냅시다.
=====================
[전주교구 박찬길 미카엘 신부님]
<신앙인의 본질과 사명>
어린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부모 욕 먹이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은 “어디서든지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뿐만 아니라 나를 낳으신 부모님에게도 칭찬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상징을 통해 신앙인의 본질과 사명을 설명해 주십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줍니다. 반면에 빛은 어둠을 밝히고 사물을 식별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신앙인의 사명이 소금과 빛과 같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소금은 신앙인의 내적 자질을, 빛은 신앙인의 외적 활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적 자질과 외적 활동은 사실상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고 했고, 중세 철학자들은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내면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내적 자질을 잘 갖추어 하느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긍정적 역할보다 부정적 역할을 더 강조하십니다. 소금과 빛의 부정적 역할이란 곧 역할 상실을 말하는 것인데, 즉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소금과 빛의 의미와 역할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신앙인의 본질과 사명을 역으로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는 분명 교회와 신앙인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꿀이나 기름, 또는 설탕이나 버터가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 살아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 살아주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설탕이나 버터가 된다면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자기가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이 된다면 세상의 찬양과 감사는 하느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짠맛의 결정체로 생존과 부패 방지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며, 빛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필수적인 요소와 도구인 ‘소금과 빛’으로서의 쓸모 있는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쓸모 있는 역할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덮어 주고 …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7-10)
이사야 예언서의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6 참조)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음”(1코린 2,4)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선포를 통해 쓸모 있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믿음의 바탕을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돌보듯, 함께하는 이들을 돌보아,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해야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1코린 2,2)한 바오로 사도의 결심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간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쓸모 있는 우리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도록 합시다.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아멘.
=====================
[춘천교구 정홍 요한 사도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연중 제5주일을 지내는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이는 우리에게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되겠지요. 세상의 그 누구도 소금과 빛이 없이 살아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 짠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양보와 희생으로 살맛 나게 하라는 의미가 될 겁니다. 또한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것처럼,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하는 우리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투표하여, 더 이상 십상시와 같은 사람이 우리의 일꾼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고 말씀으로 우리를 비추어 뻗어 나가는 빛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례성사 때 받은 그리스도의 빛을 가두어 놓는 함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나눔 없는 탐욕이 바로 우리의 빛을 세상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함지입니다. 신앙인이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자세가 함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나 세상에나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살맛을 주시고, 당신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육신의 부패에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죽음의 어둠을 눌러 이기는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오늘 주일 미사를 마친 후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살맛을 전달하며 부패를 막는 소금으로, 그리고 밝음과 따뜻함을 전달하는 빛으로, 그렇게 세상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이번 한 주간을 살아가신다면, 우리의 빛이 세상 사람들을 비추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마태오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뽑으신 까닭은
귀한 보물 삼아 깊은 곳에
감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두움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되어
기쁨과 희망을 나누는 이가 되라는
주님의 뜻을 새기십시오.
빛을 죽이려 달려드는
어둠의 세력 한가운데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빛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꺼뜨리고 싶을 때에,
빛이 될 자격이 없다며
그저 쓰러지고 싶을 때에,
바로 당신에게
몸소 불을 놓으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한 줌의 재가 되어
당신의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빛으로 불로 활활 타올라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당신을 아낌없이 나누십시오.
당신의 사라짐으로
온 세상을 환히 밝히고
밝아진 온 세상을 가득히 품에 안는
벅찬 영광을 맘껏 누리십시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당신은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할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라고 말씀하셨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소금이며 빛입니다.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입니다.
착한 행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58,8)입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본당에서 준비한 자선함은 1년 내내 운영됩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구체적 행동이 바로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와 희망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 60,19)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과한 욕심을 내려놓은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십니다.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58,10)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시기, 질투,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험담하며 모함하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직도 뒷담화를 하나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4,6)
하느님께서는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품격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채우고 영감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 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안락함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삶의 맛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해졌는데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정은 무너졌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도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종교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에 밝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음을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도록 합시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야 합니다. 까만 밤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눈길이, 예수님의 눈길을 닮고, 나의 손과 발이 그분의 손과 발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구에 의하면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1년을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은 어떨까요? 다리를 잃는 순간부터 큰 좌절감 속에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한 1년을 넘어가면 불행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년 뒤의 행복도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 안의 유전자가 그 역할을 하는데, 행복감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의지가 약해질 것이고, 반대로 불행에 빠져 우울감이 너무 길어지면 삶을 포기하게 되어 유전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백만 년 동안 진화됐고 또 앞으로도 진화될 인간이기에 계속된 변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 자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할 때 불행의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기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이지만, 이는 욕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어떤 삶이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빛나는 사람,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춰주신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태어났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또 불행 안에서 헤어나지 못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는 삶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꼭 필요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에 맞게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세상에 터져 나올 것입니다.(이사 58,8 참조)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주 짧고 그만큼 주제도 명확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착한 행실>,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착한 행실, 이것은 정말 세상을 밝게 하는 빛입니다. 악한 행위가 세상을 어둡게 하고 우리 맘을 절망케 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착한 행위가 무슨 세상의 빛이고, 세상을 밝게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작은 빛일 뿐 어둠이 아니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의 착한 행위 곧 선행이 대단하다면 세상을 그만큼 더 넓게 그리고 더 밝게 비추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착한 행위는 작게나마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의 착한 행위는 그리 대단치 않고 오히려 작습니다. 그럴지라도 나의 착한 행실을 무시하지도 말고 과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주 양극단의 잘못을 범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조금 하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하고 과시하는 한 극단과 이까짓 선행은 선행도 아니고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한 극단이 있는데 과소평가할 경우,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선행을 함지로 덮어두거나 더 나아가 선행을 하려는 의지마저 꺾어버릴 수도 있으니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크고 작음으로 인해, 하거나 말거나 하지 말고, 크거나 작거나, 해야 할 것이기에 하고, 사명이기에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선행은 겸손으로 할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어둠은 참 빛이신 주님께서 없애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당신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빛이라고 하시고, 세례자 요한과 우리는 그 빛의 증언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착한 행위는 참 빛을 증언하는 빛이고, 그 빛에서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이기에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행은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달과 같습니다.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 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선행은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만족으로 선행을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혹 우리는 선행을 했다는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선행은 어쩌면 선행도 아니고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선행은 그리스도를 낳는 선행이 되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고 하면서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라고 얘기하는데, 우리의 선행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악행이 근근이 주님을 믿던 사람을 교회로부터 떠나게도 하고, 우리의 선행이 주님을 믿게도 하는데 그것은 그 선행이 비록 아무리 작아도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작은 착한 행실로라도 그리스도를 낳는 어머니들이 되시길 빕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소금과 빛의 삶!>
오늘 복음(마태5,13-16)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신자들이 삶의 자리에서 불의와 부패를 척결하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써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결코 사람의 힘만으로는 하기가 힘든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2독서(1코린2,1-5)는 바로 이 성령의 힘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신앙 고백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이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2,3-4)
그리고 오늘 제1독서(이사 58,7-10)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58,9-10)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자!'
믿음 따로 삶 따로,
미사 따로 삶 따로,
성체 따로 삶 따로,
이렇게 분리된 삶이 아니라, 믿음과 미사와 성체가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의가 눈에 보여도, 불의와 적당히 타협해 가면서 살아가는 신자들, 신자이면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신자가 아닌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들도 많아 보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소금과 빛이 됩시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 13)
설탕의
단맛이 아니라
소금의
짠맛입니다.
우리 삶의
소금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로 거듭나는
소금의 말씀이며
소금의 삶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소금의
여정입니다.
아픔없이
영혼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없음을
또한 깨닫습니다.
소금을 만드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빛을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낮아지고
녹아들고
내려갈 수 없으면
소금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프지만
기쁩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아픕니다.
아픈 사랑의
빛으로
우리의 먼지를
봅니다.
소금도 빛도
소리없이
녹아들며
빛을 밝힙니다.
판단하는 삶은
소금의 삶이
아닙니다.
차별하는 삶은
빛의 삶이
아닙니다.
삶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삶이
소금이며
빛입니다.
삶의 방향을
틀어 빛으로
소금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에서
십자가의 정신을
사는 것이
소금의 참된
짠맛임을
믿습니다.
복음의 삶은
소금이 되는
소금의
짠맛입니다.
소금과 빛으로
가득찬 은총의
주일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