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록 2등을 했지만 아쉬운 표 대결의 결과인지라 보헤미아인들의 자랑(진짜?) 프레미슬 가문에 대해 소개드릴까 합니다.
실은... 개인적으로도 프레미슬 가문의 역사가 매우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체코의 역사에 관해서는 합스부르크 가문 이야기 하면서 그야말로 곁다리로 묻어 나오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오랫동안 가문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기회가 없더군요.
(정확한 발음을 모르겠네요. 뒤에 -lid 가 붙으면 독일식 발음으로 읽는 게 되던데... 체코어 하시는 분 없나요? 보통 서적에선 프레미슬리드 가문, 혹은 프레미슬 가문 이라 적어서... 이건 원음이 아닐꺼라 추측됩니다)
아무튼 이 가문의 뒷조사(?)를 통해 플레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만일 플레이 하신 후 연대기나 플레이 소감 등등을 올려주시면 더 눈이 즐거워지겠지요. 흠...
무리한 게임은 건강에 좋지 않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 자신을 알라!!!)
오늘날 Bohemia라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저 체코 공화국(Czech Republic)의 옛 국명으로 생각하시면 무난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백제나 신라, 가야 등등... 같은 소멸된 국명...
870년 Duchy of Bohemia가 생성되었고 1004년에 Holy Roman Empire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즉 신롬의 데레쥬에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1212년 처음이자 아주 잠시 Kingdom of Bohemia이 성립되었고 1198년부터 왕관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1918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모든 작위를 상실할 때 이 왕관도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으로...
보헤미아는 1차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로 불리다가 1993년 다시 두 나라로 분리되면서 정통성은 아마도 체코 공화국이 물려받았을 겁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프라하가 체코의 수도이니까요. 흠... 너무나도 무책임... 죄송합니다.
얼핏 듣기로는 체코는 공업이, 슬로바키아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라 들었습니다. 체코에서 생산되는 총기류나 철강이 좋다고 하던데요. 수도인 프라하의 역사 정도 밖에는 모르겠군요. 워낙 중세의 아름다움이 간직된 도시라 관광지로 유명하죠. 룩셈부르크 가문이 아름답게 꾸몄을 뿐... 이번에 소개드리는 프레미슬 가문은 수도로 정했을 뿐... 도시를 만드는 미적 감각은 무지 떨어진다는... 사실인 듯 합니다. 원주민은 파간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문명 세례를 받지 않았죠. 너무나도 멀고 먼 변방일 뿐이었죠. 당시는...
프레미슬 가문은 867년에 출발하여 1306년 웬체슬라우 3세(Wenceslas III)의 죽음과 함께 적자 계통은 단절되었고, 중간에 5개 정도의 방계 가문이 형성되는데 오타카르 2세의 서자 계열 라인인 Opavian branch가 포함된 숫자입니다.
남계 서자 계통인 Opavian branch도 1521년 최종 단절되면서 프레미슬 가문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가문이 소유했던 작위는 Duke and king of Bohemia, King of Poland, King of Hungary, Duke of Olomouc, Duke of Brno, Duke of Znojmo, Duke of Opava, Duke of Racibórz, Duke of Münsterberg, Duke of Krnov, Margrave of Moravia, Margrave of Austria, Margrave of Styria, Margrave of Carinthia, Margrave of Carniola입니다.
가문의 문장입니다. 간지나서 인기라고 하던데요.
문장 때문에 플레이 한다는 소문이...
이 가문 출신의 보헤미아 공작은 870년부터 1198년까지 프레미슬 가문만이 계승하지만 가문원끼리 쟁탈전이 심해서 두 번씩 공작을 재임하는 경우가 있어서 순서는 제외합니다. 그냥 서술하면서 계승 순서를 설명하죠.
이 가문의 특징은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었다고 표현하면 딱 일 듯 싶습니다. 크킹의 최고 진면목 중 하나인 ‘클레임 찬탈’의 진수를 완벽히 보여주더군요. 원래 태생이 파간이라서 그런지... 좀 의아한 면이 적지 않은 가문임은 틀림없는 듯...
보헤미아 왕위는 1212년에 신롬황제 하인리히 2세에 의해 공작이던 브라티슬라우(Vratislaus II, 1061–1092)가 1085년 최초로 생성했었습니다. 그가 죽자 바로 소멸되었는데 1158년 공작이었던 블라디슬라우(Vladislaus II, 1140–1172)가 2차로 왕위를 생성했다가 죽음과 함께 다시 소멸됩니다.
그리하여 1198년에 이르러 당시 공작이었던 오토카르 1세(Ottokar I, d.1230)가 3차로 왕위를 생성 한 이후 그의 자손에 의해 세습되었고 그 후 마지막 적자 라인이었던 웬체슬라우 3세가 1306년 암살되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최초로 보헤미아 여왕이 됩니다.
그리고 1330년 그녀가 죽으면서 그녀의 장남인 카알 4세가 차지합니다. 이로써 보헤미안 원주민 출신의 가문은 단절되고 외국인 군주가 왕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첫 외국인 군주인 카알 4세(Charles IV, Holy Roman Emperor and king of Bohemia)는 룩셈부르크 가문(House of Luxembourg) 출신으로 오늘날 도시 프라하를 제조해(?) 놓은 장본인입니다.
프레미슬 가문 출신의 보헤미아 왕은 모두 5명입니다. 이들 외 조상들은 작위가 공작급이었죠.
1대 Ottokar I (1198–1230)
2대 Wenceslaus I (1230–1253)
3대 Ottokar II (1253–1278)
4대 Wenceslaus II (1278–1305)
5대 Wenceslaus III (1305–1306)
보헤미아 지방은 프레미슬 가문이 지배하기 이전 Princes of Great Moravia라고 불리는 House of Mojmir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 게임상 스타팅에도 이 가문원을 선택 가능합니다. 이 가문 시조는 Mojmír I(833–846)로 6대에 걸쳐 899년까지 모라비아를 중심으로 보헤미아 까지 통치합니다.
901년 경 이후의 역사서엔 잘 등장하지 않으므로 가문과 작위가 이 무렵 사라졌다고 볼 수 밖에는 없군요. 이 가문의 통치 영역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일치합니다. 그럼 슬로바키아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정확하게는 오늘날 헝가리 일대로 속하므로 그들 모두의 전신입니다. 아무튼 그레이트 모라비아 제국은 907년 이후 여러 조각의 나라들로 분열되었고 지역 통치자들의 할거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기회를 잡고 등장하는 가문이 바로 프레미슬 가문이었습니다.
역사서엔 870년 경 보헤미아 공작으로 보리보즈 1세(Bořivoj I, 870-889)란 이름의 군주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프레미슬 가문의 시조입니다. 이미 그레이트 모라비아에 종속되었던 경험이 있었는지라 뚜렷한 등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인물이 역사서에 언급되는 배경은 바로 파간에서 기독교로 첫 개종하는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였던 루드밀라(Ludmila of Bohemia)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라서 훗날 성인으로 추대될 정도였죠. 아무튼 프레미슬 가문은 적극적인 개종 덕분에 기독교 군주 가문으로 로마의 인준을 받았고, 그 덕분에 유럽의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그렇지만 개종 했다고 파간이 바로 문명인으로 탈바꿈 할 수는 없죠. 옷 바꿔 입는다고 사람 속까지 바뀌진 않습니다.
앞서 프레미슬 가문의 특징이 ‘찬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2대부터 ‘찬탈’ 그리고 ‘친족살해자’가 등장합니다. 이건 크킹의 진리입니다.
보리보즈가 죽자 장남인 스피티네프(Spytihněv I, 875-915)가 계승하는데 그는 미성년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물어가는 제국이지만, 명분이라도 남은 그레이트 모라비아의 섭정이 지속되었죠. 그렇지만 저네들도 형제간에 상속싸움 중이라 보헤미아의 선택의 폭은 넓었습니다.
프레미슬 가문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프라하를 중심으로 그들 가문의 세력을 확장해나갔습니다. 특히 독립을 위해 동프랑크왕국의 무력 도움을 받았고(이런걸 외세를 끌여들였다고 해야겠지요?)...
이후 보헤미아를 독립적인 세력으로 만들어 놓고 스피티네프의 치세는 마감합니다.
어린 동생 브라티슬라우(Vratislaus I, 888-921)가 형의 뒤를 계승하였는데 이미 형님이 동프랑크에 붙어서 그레이트 모라비아의 영역에서 보헤미아를 떼놓은 상태인지라 그의 통치는 한결 수월했죠.
그는 바이에른 공국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나라를 ‘보헤미아 공국’으로 만들고 스스로 공작이 됩니다. 한마디로 이웃 집 보고 자신의 집안을 리모델링 하는 겁니다. 워낙 독자적 문명이 없는 파간이 득실되던 변경 지대인지라... 동프랑크의 국가 체계를 모방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이웃이 정말 중요하죠. 배우는 게 있어나 자신도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알고 보면 동프랑크도 야만인이었는데 말입니다... 笑
921년 브라티슬라우는 파간이었던 마자르족과의 전투 도중에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웬체슬라우(Wenceslaus I, 907-935)가 계승합니다. 체코식으로 발음하면 ‘바츨라프’인데 아주 인기 있는 남성 이름입니다.
왜냐면... 이 왕님은 후에 성인이 되었거든요. 죽은 후 체코 국가의 수호 성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아들 낳으면 이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잉글랜드도, 스코틀랜드도, 웨일즈도, 아일랜드도 모두 국가적 수호 성인을 가지고 있어요. 聖 조지, 聖 앤드류, 聖 데이비드, 聖 패트릭 순일 껍니다. 체코는 聖 바츨라프가 됩니다. 인기 있는 이름은 대부분 성인들에게서 따온답니다. 우리 아들도 성인 좀 되어라...
웬체슬라우의 치세에 이르면 이미 그레이트 모라비아는 이미 해가 져 버렸고 그 대신 동프랑크와 마자르족의 위협이 증대되는 시기가 됩니다. 이것을 성인 왕님은 적절히 잘 처리해 나가고 있었죠. 그런데 바깥 정리가 조금 되니 이제 집안 내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전대엔 외부의 적과 싸운다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할 차례가 됩니다.
문제는 공작들의 어머니들 간 권력싸움이었습니다. 할머니 루드밀라와 어머니 드라호미라는 권력욕이 충만한 여성들이었죠. 결국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암살합니다. 즉 서로 섭정 할꺼라고... 공작들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권력의 핵심은 섭정이 되었죠. 이것을 어머니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웬체슬라우는 할머니의 영향력에 더 종속되었던 인물이었던 터라 결국 살인자인 어머니를 자신의 나라에서 추방해버리죠. 그랬더니 이젠 추방된 어머니는 차남인 볼레슬라우(Boleslaus I, 915-972)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작전에 돌입합니다. 은밀히 귀족들 일부와 공모, 웬체슬라우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볼레슬라우가 공작 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성인처럼 살다간 형(죽은 후 실제로 성인이 됩니다)을 죽이고 계승한 볼레슬라우는 별칭이 ‘the Cruel’이었죠. 그의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죽이고, 그 자신은 성인처럼 살던 친형을 죽이고... 막장드라마 연출 중인 이 가문... 흠...
그래도 이 잔인한 공작은 외부의 위협 하나는 정말 잘 막아냅니다(이거... 어느 연대기 진행 중인 가문이 떠오릅니다). 특히 폴란드와 헝가리의 파간들(아직도 개종 안한 이민족들이었죠)이 여러 차례 침공하는 걸 잘 막아낼 뿐만 아니라 그레이트 모라비아를 최종적으로 해체시키고 자신의 영토로 복속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 도브라바를 파간을 믿는 폴란드의 공작인 피아스트 가문의 미에즈코 1세에게 시집보냅니다. 결국 피아스트 가문도 이 결혼 이후 개종을 하게 되면서 기독교 세계로 흡수됩니다만...
형을 죽이고도 군주 노릇 하나는 잘 했던 볼레슬라우였습니다.
후계자였던 아들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볼레슬라우(Boleslaus II ‘the Pious’, 932-999)였음에도 성격은 반대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친족살해자였던 아버지를 의식해서 반대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잔인한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995년 치세 말년에 프레미슬 가문과 라이벌이었던 Slavník dynasty(아주 오래된 보헤미아족의 구성원, 리비체 지방을 통치)의 구성원들을 학살시킵니다. 더 이상 보헤미아의 결속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리게 되죠.
이 학살은 보헤미아의 완벽한 통합이라고 하던데... 라이벌 제거에 성공하면서 더 이상 프레미슬 가문의 방해자는 사라진 셈입니다.
자~ 이제 세 명의 형제가 공작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가문은 조용한 날이 없어요. 볼레슬라우는 아들 세 명을 남겼는데 장남 볼레슬라우(Boleslaus III, 965-1037)가 후계자가 됩니다. 그런데 장남이었던 그를 두고 역사서에선 보헤미아 역사상 가장 최악의 군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볼레슬라우의 치세 때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 공작을 무지 싫어해서 먼저 국내 유명 귀족인 Vršovci 가문(당시 사위 가문이었음)의 클레임을 이용하여 1002년 찬탈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합니다. 결국 그들 가문원들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1세에게로 도망을 갔다가 그 다음해 망명 중 사망합니다.
그러자 다시 귀족들이 볼레슬라우의 두 동생이 가진 클레임을 걸고 공작에게 도전합니다. 당시 바로 밑 동생 야로미르(Jaromír, 974-1035)는 형에 의해 거세된 상태였고 거세의 분노(?)를 형에게 퍼부어 귀족들과 공모, 그를 국외로 쫓아내고 1003년 스스로 공작이 됩니다만 얼마 후에 신롬황제의 간섭과 폴란드의 침공이 뒤를 잇죠.
당시 국내 권력이 약한 야로미로는 신롬의 군사가 자신의 영토 내 배치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자 또 국내 반감이 바로 형성... 바로 밑 동생 올드리히(Oldřich, 975-1034)가 자신의 반대 세력 리더로 추대되는 것을 보고 과감히 동생의 눈을 뽑아버리죠.
형제들을 잡아다 거세하고 눈 뽑고... 여기가 비잔틴인가??? 헷갈리는 동네다...
올드리히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참고 기다립니다. 눈은 없어도 다행히 거세되지는 않아서... 농가 출신 천한 애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거든요. 비록 서출 아들이지만 자신의 후대가 있었죠. 반면에 거세된 야로미르에겐 장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신롬황제에게 군사 도움을 요청하여 결국 야로미르를 쫓아내고 공작이 됩니다.
다시 분노하는 야로미르... 자신의 세력을 재규합하여 망명 2년 만에 다시 동생을 공격해 공작 위를 되돌려 받습니다만...
1년 만에 올드리히에게 다시 빼앗기고 감옥에 투옥...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죽어버리자 서출 조카가 즉위하자마자 살해됩니다.
야로미르, 그는 세 번에 걸쳐 공작이 되었지만 총 치세는 5년 뿐이었군요. 어이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최종 승리자는 막내 올드리히가 됩니다. 1034년 2번째 공작 위를 계승하지만 뽑힌 눈의 염증으로 계속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두개골의 치명적인 타격으로 인해 복위 1년 만에 사망합니다. 그가 죽자 당시 프레미슬 가문에 남은 남자라고는 올드리히가 천한 농가의 여인(이름은 보제나)에게서 얻었다는 천출 서자 브레티슬라우(Bretislaus I, 1002-1055)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인정된 서자’로 그리고 후계자 수업을 받았던 브레티슬라우는 열심히 신롬황제 콘라드 2세의 지지자가 되어 그의 정복사업을 충실히 도왔고, 프라하에 대주교 관구를 설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즉 그는 프라하에 로마관구에 버금가는 교구를 만들기를 소망했죠. 또한 폴란드를 침공, 크라쿠프를 약탈하여 주위에 충격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1040년 신롬의 새로운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도리어 2번에 걸쳐 보헤미아를 침공해오는데 이를 막아내면서 잘 되는듯했으나 국내 귀족들의 반발로 결국 화친으로 전쟁을 끝냅니다.
서자 출신이었던 탓인지... 그의 정책은 아주 친기독교적 이었습니다. 일부다처를 금지하고 기독교회의 규칙을 법령으로 선포합니다. 즉 파간 전통에서 나오는 구식을 모조리 폐지하는 정책을 썼죠.
그리고 아버지 대에서 절찬리 일어난 왕위계승싸움을 보고 연장자계승법을 도입하였고 이것은 훗날 오토카르 1세에 의해 장자상속제로 확립되게 됩니다. 또한 결혼에서도 독일 연방의 귀족 가문에서 아내를 데리고 옵니다. 즉 보헤미아 국내 귀족들과의 통혼을 버리고 외국 귀족 가문에서 처자를 데리고 오는 겁니다. 이것은 훗날 외국인 통치자의 등장 빌미를 주게 되는 셈이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시집 온 그의 아내는 유디트(Judith of Schweinfurt)로 노르드가우 변경백의 딸이었고 바벤베르크 가문의 일원이었죠. 아마도 오스트리아와 접경을 맞대고 있어 이 가문이 선호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웃기는 건... 1019년에 유디트는 브라티슬라우에 의해 납치되어 와서 결혼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독일의 콧대 높은 귀족들이 파간이었던 옛 변경 민족 출신 가문의 서출 자식에 불과한 그에게 귀한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를 보고 유추하건데 유디트를 납치해 키워서... 장남이 1031년 생인지라... 납치 12년 후에 태어났다면... 흠...
아무튼 같이 살다보면 자식은 생기기 마련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태어났고 후계자는 장남 스피티네프(Spytihněv II, 1031-1061)가 되었습니다.
스피티네프 2세는 상당히 反독일주의자 군주였습니다. 물론 신롬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해서 그가 그의 영토 내 거주 독일인들을 몽땅 추방할 때도 용서받았죠. 그는 독일의 베틴 가문 출신의 아이다와 결혼하여 아들 프리드리히를 두었지만 어이없게도 아들은 후계자가 되지 못했고 망명해서 이탈리아의 아퀼레이나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자 후계자는 동생 브라티슬라우(Vratislaus II, d.1092)가 됩니다.
브레티슬라우는 유일한 프레미슬 가문원인지라 죽을 때 공국 내 영지를 아들들에게 조금씩 분할해 줍니다. 장남에게는 보헤미아 공작 위와 대부분의 영토를, 차남 브라티슬라우에게는 올로모우츠의 절반, 셋째 야로미르는 주교로, 넷째 콘라드에게는 즈노이모, 다섯째 오토에게는 올로모우츠의 절반을 주죠. 이때 가장 불만을 품은 건 차남 브라티슬라우였습니다. 막내 동생이랑 영지를 나누어 가지라는 말에 분노...
처가인 헝가리로 망명하여 형이 죽자마자 헝가리 군대를 끌고 들어와 스스로 보헤미아 공작이 됩니다. 물론 형수와 조카는 국외 추방시켜 버리죠. 영영 오지마라... 돌아오면 죽는다... 알간? 이 동네는 외국 군대 데리고 오는 게 유행이군요...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 즉위한터라 당연 외국의 눈치를 봅니다. 원래 첫 결혼은 마리아라는 국내 귀족이랑 했는데 그녀를 버리고 헝가리 왕족과 결혼했다가 그녀가 죽자 다시 폴란드 공주랑 결혼합니다. 즉 헝가리와 폴란드의 힘을 빌리겠다는 의도였겠죠. 두 명의 외국 왕족여인들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고 그들은 차례로 보헤미아 공작이 됩니다.
그는 1085년 최초로 보헤미아 왕위를 생성해서 왕이 됩니다만 7년 만에 죽자 곧 소멸됩니다. 그가 신롬제국 내 왕위를 생성했다는 의미는 유럽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고 싶어 하는 갈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프레미슬 가문의 원천은 로마의 변경 밖 파간의 이민족이었고 기독교 개종을 통해 유럽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친유럽주의 성향의 군주가 등장... 기독교 제국의 모습을 보고 이를 흉내 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지네요. 아무튼 결혼을 통해 프레미슬 가문이 유럽 내 상당한 가문으로 지위가 상승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죠.
브레티슬라우의 자식들은 형제끼리 돌아가면 보헤미아 공작 위를 계승합니다. 장남 콘래드가 계승했지만 1년 만에 죽어 연장자순위에 따라 조카 베레티슬라우가 공작이 됩니다. 그가 죽은 후 이복동생 보리보이(Bořivoj II, 1064-1124)가 계승했지만 원래 연장자상속은 허울 좋은 게살구에 불과합니다. 다 어른들인데... 욕심이 목구멍을 넘죠. 결국 친족들끼리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과거는 형제라도 별로 없었는데 이번엔 선대들이 아들을 많이 낳아서인지 자손들이 많습니다. 각지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니 너도나도 공작... 그리고 외국 군대를 초빙해다가 종가를 공격 합니다. 이때 등장인물은 여럿이지만 그냥 생략하구요.
공작계승전의 최종 승리하는 적통 라인은 7번째 아들이던 브라디슬라우(Vladislaus I, 1065-1125) 계통으로 그의 아들 브라티슬라우(Vladislaus I, 1110-1174)가 1140년 보헤미아 공작이 된 이후 1158년 두 번째로 보헤미아 왕관을 생성합니다.
그는 결혼도 두 번하는데 첫 결혼은 게르투르데(Gertrude of Babenberg)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드 3세와 독일공주 아그네스의 딸이었죠.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 욕구는 드디어 소위 ‘로열 블러드 신부’를 얻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가문의 위신에는 역시 ‘로열 블러드’... 최곱니다! 그러나 불행히 아들은 요절하고 딸만 살아서 후계자 만드는 데엔 실패... 정말 아쉽습니다. 마음대로 안되는게 자식 농사일세...
결국 다시 재혼하는데 이번엔 튀링겐 변경백 루드비히 1세의 딸 유디트로 초혼보다는 격이 좀 많이 떨어지지만... 신부의 친할머니가 콘라딘 가문으로 슈바벤 공작 딸인지라 조금은 위안이 되었겠죠. 첫 결혼에서 후계자가 나왔어야 되는데... 잘하면 황제도 노릴 수 있었죠.
아무튼 재혼에서 그 유명한 오타카르 1세(Ottokar I, 1155-1230)가 태어납니다.
참... 영어식 표기는 Ottokar이지만 체코식 표기는 Otakar라고 하길래...
원어로 읽는 것을 존중해서 그냥 오타카르라고 할 생각입니다.
오타카르 1세는 1192년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고 1198년 드디어 세습직 보헤미아 왕이 됩니다. 저번의 선대들은 당대 왕 노릇하는데 그쳤지만 그 자신은 왕관을 자식에게 넘겨주었죠. 그래서 보헤미아 공작 위는 보헤미아 왕이 겸직하는 작위가 됩니다.
완벽한 신분 상승... 이제 나는 전하가 아니라 국왕 폐하이시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결혼에선 딸만 네 명이 태어난지라 재혼에서 아들을 얻습니다. 1199년 44세 때 19세의 콘스탄스(Constance of Hungary)와 재혼하였는데 그녀는 헝가리왕 벨라 3세의 딸로 어머니 아그네스를 통해 안티오크 공작인 샤틸롱 가문과 예루살렘 왕 볼드윈 2세 그리고 프랑스왕 필리 1세와 혈통적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이 결혼으로 플레미슬 가문은 더 국제적으로 변하는군요. 흠... 점점 보헤미안이 아니게 된다는 말도 되는군요.
그는 재혼해서 3남 6녀를 얻었는데 장남이었던 웬체슬라우(Wenceslaus I, 1205-1253)가 그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웬체슬라우는 독일의 명문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 아내를 맞이하게 됩니다.
점점 더 커지는 혼인빨... 장난이 아니네요. 진짜 황제의 손녀를 부인으로...
그녀의 이름은 쿠니군데(Kunigunde of Hohenstaufen)로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공작 필립과 비잔틴공주 이레네 앙겔리아 사이에 태어난 금빛테와 자주빛테를 동시에 두르고 태어난 여인이었죠. 두 사람 사이에는 5자녀가 출생했고 장남이 모라비아 변경백으로 후계자로만 살다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죽는 바람에 왕이 되지못한 블라디슬라우였고 차남이 바로 오타카르였습니다.
오타카르 2세(Ottokar II, 1233-1278)... 1253년 차남이었지만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그는 형님의 영토 욕심 때문에 젊은 날 마음 고생 좀 했죠. 원래 싸랑하는 애인(독일 출신의 하급 귀족 여성이었음)이 있는 터라 결혼은 나중에... 지금은 애인이랑 잘 놀고 싶어... 하는 10대 청춘을... 50대 여인에게 보내 오스트리아 공작령 가져오라고 압력 넣는 형이 미워도 반항도 못하고... 그러다가 형이 죽어주는 덕분에 국왕이 되었는데...
그런데 문제는 애인과 그녀가 낳은 자식 놈은 여전히 서출(그나마 인정된...). 이 넓고 넓은 왕국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또 정략 결혼해서 적자 출신 자식은 낳아야 되겠고... 아무튼 그의 인생은 투쟁 그 자체였다고 보여집니다.(그의 이야기는 저번 바벤베르크 가문에서 약간 언급 드렸으니 참고하세요) 뭘 가지고 투쟁했는지는 바라보기 나름인지라...
그는 보헤미아 역사상 최고의 군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특출하게 영토를 확장했고... 거의 신롬의 제관을 눈 앞에 두고 상실해야 했던 아픔을 간직해야 했으니까죠. 혈통의 경우 선대의 노력으로 완벽했습니다. 영토도 작위도 완벽 그 자체... 결혼도 늙은 여편네를 보내버리고 류리코비치 가문의 오래되고 찬란한 혈통을 가진 젊은 왕비를 새로 맞이하여 적자 아들도 얻었으니까요. 남은 건 제국의 황제관을 가지는 것인데... 요. 글쎄 독일 넘들이 ‘보헤미안은 독일인이 아니다’라고 ‘제관 취급 불가’라고 하는군요.
정말... 이것들이... 나도 당당히 신롬황제의 자손이란 말이다!!!
뭐... 제관을 눈 앞에 두고도 못 먹은 오토카르의 분노는 어쩌면 영토 확장에 광분케 하는 요소가 될었을 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깽판 치는 통에 물거품이 되기는 합니다. 자신의 대에 이미 확보했던 독일 연방 내 영토를 말년에 거의 상실하니까요. 남은 건 헝가리와 폴란드로 진격하여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 뿐이네요. 서쪽이 안되면 동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이나...
오토카르 2세 치세 때 진실로 엄청나게 가문의 영토가 확장됩니다. 결혼 또한 헝가리를 획득하기 위해 벨라 4세와 비잔틴제국 황족인 마리아 라스카리아의 딸 헝가리공주 아나를 어머니로 두었던 쿠니군데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류리코비치 가문의 키예프 공국의 공녀였지만 폴란드, 헝가리 왕가의 혈통까지 연결되어 있어 소위 로열 블러드의 고귀함을 화려하게 자랑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오토카르가 이런 여인을 고른 듯... 오스트리아는 이제 필요 없어~ 이젠 헝가리랑 폴란드다. 이것 먹고 나중에 보자... 제관은...
오토카르 2세 당시 가문이 소유했던 영토... 독일어로 된 자료인지라
뒷 부분만 읽으시면 어느 지역인지 아실겁니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2녀가 태어났는데 막내가 바로 웬체슬라우(Wenceslaus II, 1271-1305)로 아버지의 무한 확장, 끝내주는 혈통빨로 보헤미아 왕(1278-1305)이자 폴란드 왕(1300-1305)이 됩니다.
드디어 왕작 하나 더 접수... 이번엔 폴란드 왕이로다~~~ 이중 왕관이라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의 딸 유디트(Judith of Habsburg, 1271–1297)랑 결혼합니다. 그녀는 27년 인생을 살면서 무려 10명의 자녀를 낳고 죽었습니다. 이른바 다산왕비...
더 오래 살았다면 분명 축구팀을 만들고 후보 선수군까지 구성해 주었을 듯...
그녀가 죽자 재혼해서 딸 1명을 더 얻었던 웬체슬라우의 입장에선 절대 자손이 자신 다음 대에 단절될 것으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서자도 있어서 큰 주교령의 주교로 보내주었지요.
그런데... 역사는 참으로 요상하게 흐른다는 겁니다.
웬체슬라우의 11자녀 중 아들은 총 4명이었는데 살아남은 아들은 차남이자 쌍둥이(아들, 딸)로 태어난 웬체슬라우(Wenceslaus III, 1289-1306)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헝가리 왕위가 1301년 굴러들어오자 12세 나이로 헝가리 왕이 된 그는... 참으로 오만불손하고 두뇌 없는 행동을 곧잘 하고... 아무튼 빗나간 청소년 상(?)을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이에 따른 다국적 출신 귀족들의 엄청난 반감... 이게 진짜 왕이야???
거기다가 절도도 그리고 체면도, 염치도 없는 주변의 신하들과 소위 친구들이라는 넘들... 둘러싸여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언제 놀겠냐...? 이랬다나 뭐라나...
역사서는 아주 혹평합니다. 죽어도 싸다... 이 넘아... 요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그의 아버지가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은 정말로 프레미슬 가문으로서는 운이 더럽게도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의 방종은 결국 살해로 종결됩니다. 그는 칼에 찔려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고... 아직까지도 그 살인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른바 미궁의 살인... 다들 알면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 일수도...
마치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처럼 심장에 화살 쿡~ 박히자... 시체는 놔두고 모두 왕관 찾으러 갔다는...
여기서도 그가 죽자마자 왕관 챙긴다고 다들 난리...
당시 2살 어린 비올라(피아스트 가문 출신)라는 아내가 있었지만 결혼 직후에 암살되어서 자손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해당한 직후 프레미슬 가문의 왕관 3개는 동시에 쪼개져 버립니다. 누이 엘리자베스만이 보헤미아 왕관을 가져갔을 뿐 나머지 두 개의 왕관은 각자 주인을 찾아갑니다. 결국 그의 선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줄기차게 획득하려고 노력했던 성과를 멍청한 아청왕 한 넘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그는 참으로 어이없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이렇게 죽냐...
웬체슬라우 치세 때 프레미슬 가문의 영역입니다. 최대 판도라고 보심이...
아버지 오토카르 2세보다 더 넓어집니다. 결혼으로 인하여...
프레미슬 가문은 1306년 시점에서 적자 종가 계열은 단절되고 가문원으로 남은 건 오토카르 2세의 서자 니콜라스(Nicholas II of Opava, 1288-1365) 뿐이군요. 전날 분파된 여러 방계들도 모두 단절된 터라 이 시점에선 니콜라스 밖에 남지 않습니다. 니콜라스는 아버지로부터 정복된 폴란드의 영토 일부를 물려받아서 Duke of Opava가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결혼도 엄청 신경 써 줘서 피아스트 가문 출신의 공작 딸과 결혼합니다.
그는 평생을 교황이 인정해주는 ‘인정 적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죠.
정말 죽을 때 까지 노력해서... 1360년 교황 알렉산더 4세로부터 적출이라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프레미슬 가문의 영광은 산산조각 난 터라 빛 바랜 인정...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는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 여성으로 바벤베르크 가문에서 시집 온 공녀가 데리고 온 시녀였습니다.
시녀에게 반한 오토카르는 평생 그녀와 그의 아들을 사랑했지만... 막상 해 준 게 별로 없네요.
재산은 팔불출 손자 넘이 다 말아먹고... 아무튼 이 라인도 1521년 최종 단절되었습니다.
니콜라스와 비슷한 사례를 보자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랭카스터 공작 존이랑 비슷하군요. 싸랑하는 정부(보퍼드 가문을 낳은 여인임)를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할 때 의회의 동의와 교황의 인정서를 받아서 그 자손들을 ‘인정 적자’로 만들었죠. 그 덕분에 헨리 7세가 장미를 문장에 넣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의 경우 서자들에게 약간 관대한 편이었고... 독일 계통은 너무 엄격해서 서자는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관대한 곳은 이탈리아였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이 프랑스나 스페인 정도...? 아마도 인정되는 순간... 상속분이 인정되어 재산이 분할되기 때문에... 균분상속이 발달한 독일의 경우 상상도 하면 안될 껍니다. 중앙집권이 워낙 늦어져서 장자상속법은 종교전쟁이 모두 종결된 16세기 이후나 가능해지니까요.
16세기 넘어가면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죠. 누가 먼저 장자상속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발달 속도도 달라지는군요. 참으로 관습은 무섭습니다.
여담이지만 가장 먼저 장자상속제를 적용한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이후 잉글랜드, 에스파냐 순으로 적용됩니다. 중앙집권도 이러한 연차로 진행되었다고 보시면 무난하겠네요.
이제 저의 사견 이야기 좀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자리 덕분에 프레미슬 가문의 시작에서 끝까지 보게 되었고 또한 처음으로 보헤미아 역사를 찬찬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영국에서 출판한 책을 통해 동유럽의 역사를 처음 접했을 때 인상 깊은 가문이 바사 가문, 피아스트 가문 그리고 야기에우오 가문이었습니다. 책에서 언급하는 가문 이야기는 주로 바사의 경우 스웨덴에서 출발하여 결혼으로 폴란드로 건너와 왕조를 유지할 때였고, 피아스트 가문은 워낙 분파가 많아서 지리도 모르고 계보도 몰라서 진실로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리고 결혼 한방에 동유럽을 한때 모조리 차지한 야기에우오 가문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프레미슬 가문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저 오토카르 2세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싸워 결국 오스트리아를 내어 주는 통에 ‘합스부르크의 영광’ 밑거름이나 제공했다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지식 밖에 없어서 게임을 할 때도 그다지 흥미가... 다른 분들이 프레미슬 가문에 대해 호평을 할 당시... 저는 별다른 특징도 없는 영 별 볼일 없는 가문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역사적 관점으로 말입니다.
여담이지만 게임에 들어가 제일 먼저 플레이 한 가문이 피아스트 가문이었죠. 그 정도로 저는 그 때의 책에서 그 가문에 대한 인상이 깊게 남았죠. 지금도 거의 가물가물하게 기억 합니다만... 아무튼 피아스트 가문이 동유럽에선 최고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완전 제 생각... 지금은 달라졌겠죠. ㅎㅎㅎ
그런데 프레미슬 가문을 살펴보니 참으로 보헤미아의 지리적 위치가 애매하더라 이겁니다. 강대한 독일 연방과 경계를 접하고 헝가리와 폴란드라는 민족국가 사이에 끼어있는 그들의 입장에선 역시 독일과 친밀친밀해야 한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독일 가문과 끝임 없는 통혼을 지속하고 신롬제국 연방에 속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방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오토카르 2세 때 이미 한계를 파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계 혈통으로 세탁을 하더라도 여전히 독일인들 눈에는 보헤미아는 이방인의 나라...였을 뿐입니다. 마치 중국이 주변 국가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네 개의 야만족들...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독일인의 눈에도 보헤미안은 야만족이 기독교의 옷만 입고 문명인 흉내만 낼 뿐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입장에선 알고 보면 저넘들도 엄청 야만족들인데... 좀 컷다고 문명인 흉내 내는 게르만족들... 뭐 이런 식이죠.
오늘날 프라하의 문화 번영은 토착원주민이 세운 프레미슬 가문에 의해서가 아닌 룩셈부르크에서 온 외손자에 불과한 카알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룩셈부르크는 정말 조그마한 백작령에 불과했는데 결혼 한방에 왕국을 획득하다보니... 프라하를 가문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려고 모든 자산을 쏟아 부어 이렇게 관광지로 더 유명해져 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군요. 프라하의 아름다움 뒤에는 과거 보헤미안들이 독일의 변방에서 중심이 되려다 실패한 잔해가 널린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더 나아가서는 헝가리인들도 보헤미안처럼 독일인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나도 고분고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니까요. 어쩌면 변경의 이민족이 개종을 통해 장벽을 넘어 진입하면서 변경에 머물지 않고 중심이 되려고 발부둥치다가 실패하고 종국엔 현실과 타협해버린 동유럽의 역사 이면이 아닐까도 생각되었습니다.
이게 모두 비잔틴제국이 멸망되면서 문화의 중심이 서유럽으로 이동한 여파로 보여집니다. 동방이 이슬람화 되면서... 덤으로 동유럽도 변경 중의 변경으로 취급됩니다. 만일 비잔틴제국이 유지되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껍니다. 분명...
옛날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요. 비잔틴제국이 멸망되기 직전에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유럽의 원군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라도... 그런데 당시 총대주교란 넘은 오스만투르크가 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가톨릭에 의해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즉 로마주교 따위가 방어에 성공하여 제국 내 자신의 권위보다 높아지는 것 자체가 더 싫어서 원군 요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신부들(그들은 처자도 거느리고 재산도 모읍니다)은 오스만의 통치에 순응했다고 합니다. 그냥 인두세나 더 내면 정교회를 믿도록 허락하니 오스만 치하에서도 여전히 종교계통에선 우두머리 노릇을 할 수 있으니까요. 만일 가톨릭이 들어왔다면 자신들의 위치는 산산 조각나니... 그보단 훨 낫다고 생각했다 이겁니다. 즉 이교도의 이민족 지배 밑에서 우두머리 노릇하고 편이 가톨릭 밑에서 대접 못 받고 사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었다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정복 이후 발칸반도의 정교회는 300여 년 간 오스만의 통치에 아주 순응해서 살아갔고 그 순응 밑에는 자신들이 그나마 지역 사회가 가진 우월권을 잃지 않으려는 노림수도 작용했다 라는 식으로 책은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이 안서나... 어찌 보면 신교나 구교나 다 같은 뿌리인데 서로 원수보다 더 못하게 보고, 가톨릭이나 정교회나 다 기독교인데 이교도보다 더 으르렁 거리는구나 생각되니... 참으로 인간은 알 수 없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복잡하게들 산다.
그런 글을 읽고 나서 그런지... 게임 상에서 정교회로 한 적이 없네요. 종교인들이 참으로 이기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찌 보면 전 재산을 탕진하면서 순수 신앙심 하나로 크루세이더로 자청해서 떠난 소수의 가톨릭 영주들이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 더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알고 갔는지 모르고 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笑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제가 동유럽사도 잘 알지도 못하는데 너무 주절주절한 것 같네요.
아무튼 동유럽의 역사가 이렇게 꼬인 건 진실로 문명의 방파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 생각되어서요.
다시 이야기는 돌아갑니다. 단순 프레미슬 가문의 통혼관계만 보더라도...
얼마나 독일의 명문 가문과 연혼하고 싶어 했는지 너무 잘 보여서... 한편으론 좀 서글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 가문들은 진짜... 저희들끼리만 결혼하거든요. 그 폐쇄성은 정말 진실로... 대단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신교, 구교 분열하면서 종교가 다르면 예전 사촌이더라도 서로 모르는 척 하더군요.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이 나올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많은 군주들이 교황 꼴 보기 싫다고 모조리 신교화 되어 버리니... 혼처가 더욱 적을 수 밖에 없죠.
안 그래도 폐쇄적인 결혼 풍습에다가 종교까지 따지고 드니...
당시 가장 많은 혼처는 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였는데 모조리 신교화... 브리튼 섬나라도... 구교들은 미치죠.
조선 후기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졌죠. 당파가 다르면 절대... 결혼도 안한다. 어딜 가도 끼리끼리군요. 동양이든 서양이든...
지금까지 그리 많은 가문을 소개해 드린 것은 아니지만 역사란 항상 되풀이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즘 중동에선 종교로 시끄럽죠. 3년 전 크킹2를 할 때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했는데 역시... 역사는 돌고 돕니다.
역사를 무시하면... 벌 받습니다. 외계인이 간섭하면 모를까...
다음 소개 예정으로는... 아무래도 프랑스 가문이 유력할 것 같습니다.
너무 독일 가문을 너무 편애하다보니... 좀 그러하네요. 흠...
만일 진짜진짜 궁금하신 가문 있으면 덧글에 적고 가 주세요.
저도 게임 내 가문 다 알지 못합니다. 전 개발자가 아니니까요...
크킹 게시판 돌다가 흥미가 생기면 뒷조사에 들어가는 경우가 제일 많으니까요.
만일 연대기 쓰신다면... 엄청 냉큼 들어가서 읽어봅니다.
그럼 흥미 땡기면... 바로 그 가문으로 진격합니다~
전번 알비온 일족 때문에... 색슨족 가문 뒷조사 들어간 적 있었죠...
과거 ‘바이에른의 영광’에 관한 연대기 읽고... 비텔스바흐 가문 뒷조사 다 해놓았는데...
지금까지 소개글로 작성 못하고 이렇게 미루고 있네요. 반드시 기회를 만들겁니다.
너무나도 긴 장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실제로... 역사에서도 엄청 딴지 겁니다. 덤으로 헝가리 아르파디 가문도... 딴지 대왕들... 동유럽 중세 3대 가문하면 피아스트, 프레미슬, 아르파디죠. 이걸 다 먹겠다고 나선게 합스부르크
@shyisna 그리고 폴란드는 나중에 찢어지니 패스하고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먹었죠.
행복한 합스부르크야 결혼이나 해라!
스페인 합스부르크:? 우리는 합스부르크 아닌듯 아 개상처
마지막 부분을 보니 참 애수가 가득찬 가문 같네요. 바벤베르크의 역사를 볼 땐 참 위험한 가문이란 생각밖에 안들었었는데 말이죠. 어릴때 읽었던 온갖 깃털을 붙여서 가장 아름다워지려한 까마귀도 생각나고. 하지만 동유럽 명문은 류리코비치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동유럽은 러시아를 제외한... 당연 러시아의 최고 가문은 류리코비치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죠.
프제미슬이라고 읽어야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문장간지 인정. 잘 읽고 갑니다.
그러고 보니 크킹하면서 두번째로 플레이했던 가문이 프셰미슬이었네요...
그때는 망할놈의 균분 상속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고 이를 갈았었죠... 첫 플레이는 비잔틴 소속 봉신이라 금방
장자 상속으로 변경 가능했거든요. 근데 프셰미슬은 신롬 소속인데 이놈의 왕권이 올라갈 기미가 없으니...
아무튼 결국에는 신롬을 거의 다 잡아먹도록 키우기는 했고, 여운이 남아 짧은 단편도 하나 썼더랬죠...
다시 실제 역사를 보니... 우와, 리얼이 더 픽션같네요. 역시 크킹은 인생입니다.
체코 놀러가면 프라하가 작아서 3일이면 골목까지 마스터하는데 시간나면 프라하 근교에 기차타고 카를슈테인성에 놀러가는 것도 좋습니다.
크킹에도 남작으로 재현돼있는데 신롬 황제였던 카를의 성이죠.
햐.. 너무너무 재밌네요. 감탄하고 갑니다
정말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