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학 마태오 신부
부활 제6주일
사도행전 10,25-26.34-35.44-48 요한 1서 4,7-10 요한 15,9-17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어느 식당에 4대가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 90대 증조할아버지, 60대 할아버지, 30대 아빠,
3살 난 아들 이렇게 4대가 모인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3살 난 아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식당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그 아들을 보고 30대 아빠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아들을 냉큼 데리고 와서 앉히며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어디서 못된 버릇을! 가만히 앉아 있어!”
이것을 보고 60대 할아버지는 30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 너무 기죽이지 마라.
다 그러면서 크는 거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90대 증조할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씨~익 웃었습니다. 자기 자식들이 뭘 해도 예뻐 보였기 때문입니다.
뛰어다니는 3살 난 증손자도, 그 증손자를 다그치는 30대 손자도, 그 손자에게 잔소리하는
60대 아들도 그냥 예뻐 보이고 그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축복하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지금 목포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제가 가르치는 과목은
학생들에게 어렵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해서, 가끔 몇몇 학생들은 힘들다고 토로하고
또 몇몇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해대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피식 웃음이 납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는 ‘저희 좀 봐주세요’라는 투정과 ‘이렇게 하면 인기짱 교수님이 되실 거에요’
라는 훈수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몇몇 잔소리들은 당돌하고 마음에도 거슬리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는 메시지는 예외 없이
긍정적입니다. 결국 ‘나 좀 봐 달라’거나 또는 ‘너 잘 돼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들의 말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들린다면 당연히 그들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저도 발작 버튼이 눌러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마디는 제 자존심을 긁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의 표정은 꼭 어린 시절 “이게 다 네 잘못이야” 하고 다그치는 부모님의 표정처럼
저를 위축되게 합니다. 이때 제게 필요한 것은 제 잘잘못을 떠나 저를 단지 예쁘게 바라봐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 혹은 예수님이 저를 예쁘게 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때면,
저는 아픔을 털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깨닫습니다.
저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더 나은 사람’으로 되어가는 데에 저는 다른 이들의 사랑과
또 예수님의 사랑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 그것은 그분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마음 안에 머무른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애정 어린 마음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뭘 해도 예뻐 보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광주대교구 한병학 마태오 신부
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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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천 미카엘 신부
부활 제6주일
사도행전 10,25-26.34-35.44-48 요한 1서 4,7-10 요한 15,9-17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구대교구 전형천 미카엘 신부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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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룡 사도 요한 신부
부활 제6주일
사도행전 10,25-26.34-35.44-48 요한 1서 4,7-10 요한 15,9-17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저는 지구장이 되고 난 후, 본당 사제일 때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신앙인들을 바라보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명령을 신앙인들이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관계의 대상은 배우자일 것이고, 다음은 자녀이며, 마지막으로는
부모님일 것입니다. 과연 배우자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 것처럼 지금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다소 회의적으로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거침없는 말투로 대하고,
때론 화해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 상처가 마음속 깊이 남아 결혼을 후회하는 마음이
몰려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커가면서 부모와는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고, 세대와 문화 차이가 점점 더 벌어져
아예 대화가 불가능한 한계점까지 도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 대한 존경과 공감이 점점 사라지고,
‘효’라는 도리가 우리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요원하게
됩니다. 관계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를 위해 가장 우선시해야 할 점이 주님의 사랑을 언제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머물러라”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입술로 바치는 기도 외에도
감성적이고 공감하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체조배일 수도, 시간 전례(성무일도), 혹은 묵주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으로든 시간을 내서 그분의 사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관계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모든 관계를 정리한다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많은 관계에서 오는 미움이 기쁨으로, 나아가 사랑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적대적 마음도, 미움도 사라지게 되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요한 15,13)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부활 제6주일에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 때문에 아파하지 말고,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이웃 간의 관계를 넘어 부활의 감동이 우리 삶 속에 더욱 넘쳐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양해룡 사도 요한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5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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