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마태오 13,47-53
- 전삼용 신부
사탄이 비유에 약한 이유 오늘 복음으로 하늘 나라의 길고 긴 비유 말씀이 끝을 맺습니다. 결국 하늘 나라를 받아들인 이들만 그물에 걸려 어부의 집으로 가는 물고기처럼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늘 비유의 특징입니다. 하늘 나라 비유의 목적은 하늘 나라이기에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의 명확한 심판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것으로 사탄의 유혹을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의 행복만을 말하지 끝은 흐립니다.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은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되는데?”입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질문을 제일 싫어합니다.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Gloria Polo Ortiz)는 콜롬비아의 치과의사이자 저서 『벼락을 맞았습니다』를 썼습니다. 그녀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였지만, 미사 시간에도 껌을 씹고 가정에서는 사제를 비판하며 자신의 다리와 가슴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속세의 사람이었습니다. 글로리아는 박사논문을 위해 남편과 같은 의사인 조카와 함께 의대쪽으로 책을 가지러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벼락이 쳐서 사촌은 즉사하고 자신도 겉과 속이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몇 시간의 심정지가 있고 난 뒤 간신히 심장이 뛰기는 하였지만, 간과 폐와 신장, 그리고 내장기관이 완전히 타버려서 회생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면 즉사한 사촌 동생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고 특별히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글로리아의 모든 장기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몇 시간 동안 심정지로 있었지만, 뇌 손상도 하나도 없는 것 입니다. 그녀가 회복될 때 다리는 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절단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수술이 다가오자 자신이 얼마나 외모에만 치중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은 젖꼭지가 사라지거나 움푹 들어가 버렸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그 다리에는 감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두 다리로 걷게 해주신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리까지 치유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신경이 돌아왔고 의사들은 두 발로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며 자신의 체험을 간증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는 다 이런 식입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고, 그 진주의 가치를 알게 된 이는 이전의 자신을 죽이게 만들며, 다른 이들이 쉴 수 있는 겨자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마치 좋은 물고기나 밀처럼 천국으로 들어 갑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담긴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이제 하늘 나라 신비를 깨달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그도 비유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누구나 하늘 나라를 체험한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당장의 쾌락을 보게 만들지만, 하느님은 장시간, 그리고 마지막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비유에 반드시 부활의 결말이 있는 이유입니다. 사탄에겐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무당을 하기 위해 신내림을 받으면 당장은 돈도 들어오고 신병도 낫지만, 결국엔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이것이 사탄이 속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비유도 잘 쓰지 않지만, 굳이 행복의 사례를 댈 때 전 생애나 내세에 어떻게 되는지는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비유는 다릅니다. 항상 끝은 심판이 있습니다. 사탄의 옷 벗기는 법은 단순합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해서 잘 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라고 하면 됩니다. 그놈은 직설법밖에 쓰지 못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면 행복할 것이라느니, 자신에게 절하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느니, 뛰어내리면 주님께서 바쳐주셔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라는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그의 유혹을 받아치지만, 사실 사탄도 성경 말씀으로 유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으로 싸워봐야 우리는 승산이 없습니다. 서로 자기주장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례를 댈 수도 없겠지만, 만약 비유를 든다면 그 끝을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끝나는데?” 제가 군대에 갔더니 거기서는 여자와 잠을 자본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휴가를 다녀오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여자 친구가 면회하러 와서 외박을 다녀오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합니다. 누가 성적으로 치우쳐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어보 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아무도 대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의 운명은 좋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러저러하면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말하되 여러 비유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다 좋으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강론도 비유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는 항상 끝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로 끝나지 않는 비유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비유도 싫어하고 그 끝까지 좋은 비유는 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끝을 감추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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