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6,22-34 요한 16,5-11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독서의 말씀은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오로 일행이 겪은 신기한 일을
전해주었습니다. 귀신 들린 하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 하녀를 부려 먹으며 돈벌이를 하던
주인들이 바오로 일행을 관가에 고발했고 게다가 군중을 선동하여 공격하였습니다.
고발을 받은 로마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하고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에 채운 차꼬가 풀리고 감옥 문이
다 열려버렸습니다. 놀란 간수는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자결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가 말렸습니다.
그 간수가 보기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죄가 없어 보였던 데다가, 달아날 수도 있었는데도
달아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그들의 표양을 보고 감화를 받아서 말하였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적 체험을 하고 구원을 청하는 그에게 바오로와 실라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스의 관문 필리피 선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일화는 그 도시의 영적 형편이 마귀를 섬기는
우상 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한편, 바오로가 행한 사도직의 형편이
가족 단위로 선교하는 것이었음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면서도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형제들을 부르신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가족 관계를 중시하셨습니다. 피를 나눈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면 이상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던 무렵에도 가족 단위로 복음이 퍼져나간 사정은 같았습니다.
특히 교회의 창립 주역 이벽은 권씨 문중과 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렇게 하여 모인 천진암 강학회에 유항검, 이단원 등이 참가하여 자신들의 출신 고향인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집안 단위로 복음을 퍼뜨렸습니다.
경기도 양근의 선비 권철신을 찾아가 열흘 동안 설득한 끝에 그 동생 권일신까지 천주교에
입교시킨 이벽은, 정약현에게 시집간 자기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를 치루면서
정약현의 동생들인 약전, 약종, 약용 등 사돈지간의 삼형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정약현의 누이 동생과 혼인한 이승훈에게는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북경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오라는 부탁까지 함으로써 동서 사이의 두 선비가
한국교회 창립의 두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후 벌어진 박해에서 한국교회의 맥을 이은 교우촌들이 죄다 천주교를 믿는
가족들의 집안 단위로 구성되었습니다. 맨 처음 교우촌이 이루어진 곳은 강원도 풍수원이었고,
그 주역은 신태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신유박해가 끝나자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모든 기도서를 다 잃어버린 교우들이 어떻게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몇몇 순교자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용인 지방으로 찾아가 여자들과 어린이들만 남은
세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신태보와 세 집안은 주일과 축일에 한데 모여 마치 한 가족처럼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매번 40리 길을 오가야 했던 불편을 줄이고
외부의 따가운 감시의 눈길도 피할 겸해서 모두 40여 명을 모아서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 곳이 조선 천주교회의 첫 교우촌, 풍수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우촌은 점차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양근에 살던 권일신과 철신의 집안이 효시가 되어 교우촌이 퍼졌습니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인 권천례 데레사는 냉담자였던 조숙 베드로와 혼인한 첫날 밤에
동정 부부로 살기를 원한다는 글을 써서 승낙을 받은 이래, 동정 부부로 살면서
정하상 바오로가 성직자 영입운동으로 북경에 자주 왕래하던 일을 뒷바라지하다가
부부가 함께 치명하였습니다. 양근과 가까운 포천에는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베에르와 그 아들
홍인 레오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포천 땅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치명하였습니다.
전라도 지방 교우촌의 효시가 된 집안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안입니다.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이 이순이 누갈다와 동정부부로 혼인하여 순교한 이래로
호남에 복음이 뿌리내렸습니다. 이순이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권철신, 권일신과 처남-매부
사이로서 처남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영세하고 아내에게도 권하였으므로
이순이는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약용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운 윤지충 바오로는 고종사촌지간이었습니다.
윤지충의 고모가 정약용의 어머니였습니다.
윤지충은 이종사촌 형이었던 권상연 야고보에게 교리를 전했습니다.
충청도 지방 교우촌의 효시가 된 집안은 이단원과 이존창의 집안입니다.
두 사람 다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충청 지방에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의 집안도, 강완숙 골롬바도 그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가족 단위로 믿음을 받아들여 다시 그 가족들이 연합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던
이 전통이 한국교회의 뿌리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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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6,22-34 요한 16,5-11
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를 업보마냥 껴안고 삽니다. 죄는 사라질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분신으로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죄를 이겨 내고 오롯이 선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죄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십자가를 지셨으며, 죄인과 함께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상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고단한 지상의 삶을 견뎌 내셨습니다. 죄는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서로의 나약함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로 다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서로 심판하고 대적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죄를 없애는 것이며
서로의 장벽과 단절을 뛰어넘는 것이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은 각자의 판단을
내세워 다투고 대립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함께
껴안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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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6,22-34 요한 16,5-11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특별히 ‘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이를 좀 더 뜻을 살려 번역하였습니다.
곧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 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그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라는 수렁 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라고 자책하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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