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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이 시작된 날(4화) |
1화, 손거울에 담긴 사랑 스물여덟, 인생의 여정이 한참 남았다고 생각한 시절이었다. 대학 동기들과 함께 떠난 담양 여행은 단지 일상의 휴식이자, 친구들과 웃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 여겼다. 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찬 하루를 보냈다. 밤이 깊어 갔고 음식이 부족해 친구 한 명과 내가 나섰다. 시골 골목길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길을 따라 차를 몰며 마트를 찾아 헤매는데 갑작스레 속이 좋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잠시 쭈그려 앉은 순간, 사고가 났다. 내가 그곳에 있는 줄 몰랐던 친구가 차를 움직여 그 밑에 깔린 것이다. 충격과 함께 모든 것이 멈췄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몇 번 뜨고 감는 동안, 흐릿하게 보인 가족과 지인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아빠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광주까지 매일 같이 나를 보러 왔고, 엄마는 여벌도 없이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의식이 돌아온 내게 들려온 말은 끔찍한 소식이었다. 척추 마비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다시는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를 옭아맸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아빠는 내 모습을 스스로 보지 않기를 바랐다. 얼굴 곳곳의 핏줄이 터지고 멍이 든 모습을 딸이 볼까 봐 병실의 거울을 모두 치웠다. 하지만 결국 내 고집을 이기지 못해 병원 앞 시장에서 반짝이는 손거울을 하나 사 왔다. "이래서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울었구나? 눈, 코, 입은 그대로인데 뭘." 그 순간 안도와 슬픔이 교차하던 아빠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기적적으로 수술이 잘되었다.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을 위해 꿋꿋이 재활 치료를 받았다. 의사, 간호사들도 내게 의지가 대단하다며 칭찬했다. 부모님은 나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 고, 내가 다시 걷는 것을 볼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뎌 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나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회복을 위해 고향에 머무른 한 달, 나는 부모님께 새 운동화를 한 켤레씩 선물했다. "보물 1호 박미현, 김순기 씨! 새 신 신고 우리 함께 걸어 나가요."라고 쓴 쪽지와 함께. 3개월 뒤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나를 응원해 준 친구들과 부모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 덕분에 다시 일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고와 그로 인한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가족과 지인들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그날 사 온 손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순간과, 내 곁을 지켜 준 가족, 친구의 사랑을 떠올린다. 김민지 | 광주시 서구 2화, 입학하던 날 흰 눈이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친구와 마을 남쪽에 있는 중학교로 갔다. 강당 뒤쪽 벽에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어, 저기 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나와 친구의 이름이 보였다. 합격했다는 안도감과 중학생이 된다는 설렘으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정해진 기간 안에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 결국 입학은 취소되고 말았다. 내년에는 형편이 나아져 중학교에 진학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에 부모님을 졸라 초등학교를 한 해 더 다녔다. 2년째 6학년으로 학교에 다니다 좋은 소식을 들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는 입학시험에서 1등이나 2등을 하면 등록금이 면제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겨울, 나는 읍내 중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당일 고사장 앞에 웅크리고 서 있자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다가와 말했다. "나는 네 실력을 믿고 있으니 분명 좋은 성적이 나올 거야. 힘내서 합격하렴." 그때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화사한 햇살이 퍼지던 날 합격자가 발표됐다. 담벼락에 성적순 명단이 붙어 있었다. 나는 3등이었다. 1등과 2등의 이름 옆에는 '성적 우수 장학생'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내 이름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중학교 진학의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돼 버렸다. 이젠 꼼짝없이 집에서 농사일을 돕거나 객지로 나가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다. 나 자신이 미웠다. 열심히 공부했던 책들을 아무도 몰래 가지고 나와 아궁이에 넣고 불태웠다. 눈 녹은 언덕에 따스한 햇볕이 들던 날, 산으로 땔나무를 구하러 갔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들어섰는데 읍내에서 양복점을 하던 둘째 형이 와 있었다. 형은 나에게 지금 바로 읍내 중학교로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형을 따라 교무실에 들어갔다. 한 선생님이 말했다. 교무회의를 통해 이번 입학시험의 3등까지 등록금을 면제해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입학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고는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 나는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했고, 1학년 1반의 실장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교복을 입고 입학하던 날은 봄바람을 타고 피어나는 풀꽃처럼 나에게 새 삶을 가져다줬다. 박병덕 | 전주시 완산구 3화, 까까머리 아줌마 작년 5월, 유방암 2기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누웠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여덟 번의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남아 있었다. 항암 치료를 하면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더 큰 좌절감을 느꼈다. 항상 긴 머리에 파마를 하고 다닌 나는 출근할 때마다 머리를 공들여 손질할 만큼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1차 항암 치료가 끝나자 머리카락이 한 가닥, 두 가닥씩 어깨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머리를 감다가 깜짝 놀라 얼음이 되고 말았다. 손안 가득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머리카락이 사라지기 전에 가족들과 스티커 사진을 찍기로 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어깨에 내려앉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느라 사진 속 내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잠시 후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르는 아이들은 밝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먹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대. 치료를 받아야 해서 머리가 빠지게 될 거야." 순간 막내딸의 눈이 빨개지더니 울음이 터졌고, 큰딸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다. 이제는 내가 받아들여야 할 차례였다. 머리카락을 밀기로 했다. 군대도 안 간 50대 아줌마가 까까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갔다. 혼자면 슬프다고 언니들이 함께 가 줬다. 이발기가 닿을 때 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니 내 마음까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거울에 비친 내 머리는 문어처럼 반들거렸다. 나름 귀여웠다. 머리통이 작고 예쁘다며 언니들이 한마디씩 했다. 미용실 원장님도 까까머리는 공짜라며 거들었다. 그 말들이 위로가 됐다. 길고 길었던 항암이 끝났다. 겨울을 견뎌 낸 머리카락은 봄을 맞이한 새싹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에 모발 영양 크림을 바르며 정성스럽게 주문을 외웠다. '머리카락아, 어서어서 자라나라!'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신랑 수염처럼 짧게 돋아난 머리카락을 보면 주문이 통했다는 생각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암보다 무서웠던 까까머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이제는 모자도 훌훌 벗고 다닌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줌마가 됐다. 자라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만 같다. 오늘도 난 주문을 외운다. '머리카락아. 어서어서 자라서 단발머리가 되어라!' 김은미 | 울산시 중구 4화, 우울증 완치! 스물넷부터 직장을 다녔고, 스물아홉에 아내와 결혼했다. 착실하게 산 덕에 내 명의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아내가 빚쟁이가 된 사실을 알았다. 장인어른의 사업 부도로 아내가 연대 보증인이 됐는데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었다. 살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 급한 불을 껐지만 또다시 모르는 빚이 터져 나왔다. 여태껏 열심히 살아온 것밖에 없는데 내가 만져 보지도 못한 액수의 빚을 지게 되자 너무도 버거웠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이대로는 못 살겠어. 얼른 병원 알아봐 줘." 집 근처의 정신 병원에 갔다. 나는 진료를 받다가 별 이유 없이 의사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쏟아 냈다. 의사는 증세가 심각하니 곧장 대학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대학 병원에서 특진 의사를 만났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울고 싶으면 그냥 울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됩니다." 비로소 나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이어가던 중,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빚이 숨통을 조여 왔다. 결국 아내와 협의 이혼을 했다. 첫째와 둘째는 나와 함께 있기로 하고 막내는 아내가 데리고 갔다. 사는 게 무의미해졌다. 우울감이 커져만 갔다. 의사는 지금 상태로는 3년 정도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100살 기준으로 볼 때 3년은 짧아요. 3년 치료하고 나머지 평생을 잘 살아야죠. 이대로 살다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다짐했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다. 아내와 아이들, 모든 걸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내가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 뒤 열심히 일만 했다. 휴무도 안 쓰고, 휴가도 안 가고 푼돈이라도 모두 모았다. 그렇게 빚을 다 갚은 날,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3년 동안 나는 참고 견디며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내와 막내아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왔고 나의 우울증도 완치됐다. 지금 내 나이 쉰하나, 새 삶이 주어진 것만 같다. 사람 사는 게 정답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굴곡이 없을 수도 없다. 지나고 보니 우울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처럼 우울증을 앓다 완치된 한 선배의 말이 기억난다. "잠 잘 자고, 밥 세끼 잘먹고!" 맞다. 그게 정답이다. 서강(가명) | 경기도 파주시 When A Child Is Born - Shillong Chamber Choir (Live at Shillong Choir Festival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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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 삶이 시작된 날(
좋은글 다녀갑니다
반갑습니다
沃溝 서길순 님 !
고운 멘트 감사합니다 ~
메리 크리스마스!
모두의 하루가 반짝이는 별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
안녕하세요
동트는아침 님 !
고운 방문 걸음
감사합니다 ~
사랑과 감사로 마음이 채워지는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자 님 !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고
연말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도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감동방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성탄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길 소망 합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멘트 감사합니다 ~
행복하고 따듯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
Merry Christ-mas 입니다...망실봉님!
좋은 글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Christ-mas Eve 를 맞습니다.
이제 甲辰年 한해도 서서히 저물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乙巳年 뱀띠 해에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바다고동 님 !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고
연말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도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