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서 / 김이듬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떼야 할 서류가 있는데
무인 발급기가 나를 식별하지 못한다
내 살갗 무늬가 나의 단서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나를 확인한다
나는 나를 떠나버린 것 같다
“잠시만 안고 있어”
제 아이를 내 품에 안겨놓고 돌아오지 않는 여자처럼
비가 오니까
피부가 촉촉하게 팽창해서
내 지문이 변했을지 모른다
빗길에 중앙선을 넘은 트럭처럼 나는 나로부터 잠시 미끄러졌는지 모르겠다
이탈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민원실에서
의자를 당겼는데 테이블도 움직인다
분리불안을 느끼는 관계처럼
신체와 영혼처럼
의자와 테이블이 일체형이다
버릴 때는 폐기물 처리비 납부필증을 한 장만 붙이면 되겠지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야 하는데
나의 여부를 알 수 없다
봄비가 오니까
사람들은 미래처럼 외로워서 자아라는 존재를 발명한다
어린 나를 더 어린 내게 던져두고
사라진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문학동네,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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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듬 시인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대 독문과 졸업. 경상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2001년 《포에지》 등단.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등
<김달진 창원문학상> <22세기시인작품상> <올해의좋은시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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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다 나이테가 다 다르듯, 사람마다 지문도 다 다르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로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 다른지 궁금했습니다. 한번 따져볼까요.
세계의 인구는 약 80억 4천5백만 명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5천1백만 명이고요.
손가락은 이렇게나 작은데 5천만 명의 지문이나 80억 명의 지문이 다른 것이 어떻게 가능할수 있을가요?
조금더 범위를 넓혀 백여 년 동안 지구 위에 살았던 모든 사람을 다 합하면,
그 숫자는 못 잡아도 200억 명은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지문이 정말로 다를 수 있을까요?
로또처럼 지문도 같을 수 있습니다.
다만, 확률이 희박할 뿐이죠. 어떻게 확률을 추정했는지 몰라도 타인과 내가 손가락 지문이 같은 확률은
‘64조분의 1’이라고 합니다.
로또의 확률인 814만분의 1보다도 훨씬 맞추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이 확률을 생각한다면, 나와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은 ‘완전히 없다’라고 배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을 확인하는 용도로 지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 테고요.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더 높은 확률은, 내 지문이 내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일 것입니다.
기계적인 오류나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피부가 촉촉하게 팽창해서 /
내 지문이 변했을지…’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보통 가족관계 증명서와 같은 증명서를 인터넷에서 출력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요.
만약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지문이 일치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증명서를 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쩌면 저도 ‘내가 나가 맞는 것인가’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을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SF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본 탓에 ‘내가 복제인간이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할 수도 있거든요.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입니다)
화자는 지문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이탈한 나’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에게서 이탈할 이유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문만의 문제라면,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저처럼, 인터넷에서 증명서를 발급하면 될 것이고요.
그러나 나를 이탈한 것이 지문이 아니라 다른 것(얘기하기에도 곤란한) 경우라면 완전히 다른 문제이겠죠.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문제들과 만나게 됩니다.
어떤 문제들은 쉽고, 어떤 문제들은 어렵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그냥 웃어버릴 정도일 수도 있고,
어떤 문제들은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지문의 문제라면, 저는 전자의 문제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내가 지문을 잃었다고 해서 나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일은 아니니까요.
회복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요.
나에게 치명적인 일이란, 회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회복할 수 없는 일만 아니라면, 잊어버리고 살아도 무방합니다.
세상엔 지문이 다 지워진 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