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8,9-18 요한 16,20-23ㄱ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전통적으로 서품성구를 정하고 있습니다.
서품상본 앞면에는 서품성구에 맞는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서품성구, 서품일자, 첫 미사,
서품자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저는 31년 전에 서품을 준비하면서 서품성구를 정하였습니다.
저의 서품성구는 시편126장 5절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였습니다.
다른 많은 성경말씀이 있지만 왜 제게 그 시편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운명처럼 그 말씀은 저를 사로잡았고, 저의 사제생활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말을 군대에서 자주 들었습니다.
‘훈련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실제 전투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피와 같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애벌레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고치에 있는 애벌레가 불쌍하다고 고치를 밖에서 열어주면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야만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사도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쁨과 희망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때로는 의견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떻게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 기적, 삶을 보았던 제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희망찬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의 잘못을, 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쁜 이야기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행복만을 이야기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다가올 위험과 고통을 가감 없이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인은 근심에 쌓입니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겠지만, 박해와 순교가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은 ‘불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말씀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소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포도나무와 가지에서도 이야기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싱싱하게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말라 버릴 것이고,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기준은 바로 ‘소통’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소통이 중요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하게
됩니다. 신선한 공기와 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노폐물이 걸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도, 소화가 잘 되어야만 합니다. 소화가 안 되고, 배변이 안 되면
음식을 잘 먹을 수도 없고, 우리의 건강은 점차 나빠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지 마십시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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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8,9-18 요한 16,20-23ㄱ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0절)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과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할 이가 누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시편> 작가도 말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 126,5)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 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
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 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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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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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8,9-18 요한 16,20-23ㄱ
해산의 고통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간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의 시간이라고 고백하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완전한 시간이고 종말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와 나누는 ‘화해’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저마다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각자가 계획하고 결심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은 어리석게도 자꾸만 내 자신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지금보다 나은 나’, ‘지금보다 멋진 삶’, ‘지금보다 성공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세상은 좋아합니다. 서점가에 쌓여 있는 자기 계발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부추기고
사람들이 그런 책을 읽을수록 ‘지금의 나’는 부정되고 제거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부족하면 서로 돕고, 어설프면 서로 챙겨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갈수록 종교가 힐링 센터로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가 경쟁에 지친 개인을 위로하는
공간으로만 머물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결심과 격려의 자리로만 굳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릴까요?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의 시간’,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회할 어제도, 살아갈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과 존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보듬는 일,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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