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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네덜란드군은 허리케인에 동원되었던 사단되었던 사단들이 급하게 회군하여 전선에 투입되면서
전선이 안정화되었고 4월 중순 독일군에게 빼앗긴 거점들에 대해서 공세를 시작한다.
4월 17일 breda지역에 독일군의 방어를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독일군은 강화된 네덜란드 방어군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독일군 원래 방어선으로 되돌아갔다.
4월 30일
네덜란드군은 Antwerpen지역으로 공세를 실시한다.
13차 Antwerpen 전투
5월 1일 네덜란드군은 Antwerpen독일 방어군을 후퇴시키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곧바로 투입된 독일군 증원병력에 의해서 또 다시 Antwerpen 사수에는 실패하고 만다.
5월 22일
네덜란드군은 Antwerpen지역에 또 다시 공격을 감행한다.
14차 Antwerpen 전투
네덜란드군은 중전차까지 동원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5월 25일 네덜란드군은 독일군과 비슷한 전사자를 발생한 다음에야
Antwerpen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41년 6월 8일
네덜란드군은 토네이도 작전을 실시한다.
독일군은 3번의 포위섬멸를 당한 후라
후방에 이탈리아군을 배치시켜놓았지만 그 수가 적어 네덜란드군의 상륙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
6월 9일
네덜란드 동부지역에 투입시켰던 레지스탕스들이 일제히 봉기하면서 독일군의 보급로를 교란시키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군은 앞전의 3번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1개군단 규모의 독일군에게 포위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번 독일군은 후방쪽으로도 방어선을 나름대로 구축한 터라 네덜란드군에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한편 4월 부터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던 프랑스군은 6월 초가 되어서야 독일군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물론 네덜란드 같은 파견된 해외사단들의 흘린 피로 프랑스 전선이 안정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41년 6월 13일
4차 Leeuwarden포위섬멸전이 종료되었다
마찬가지로 1개군단 규모의 독일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네덜란드군도 4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서
수 많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4번에 걸친 포위섬멸전으로 1개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증발했기때문에
네덜란드 사령부에서는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서 잠시 앞으로 전진하지만
아직도 독일군의 예비전력을 충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곧바로 발목이 잡힌다.
6월 20일 몰려드는 독일예비전력에 네덜란드군은 후퇴를 시작한다.
독일군은 차량화사단과 기갑사단들을 동원하여 네덜란드군을 추격했기 때문에
네덜란드군은 후퇴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6월 24일 독일군은 중전차를 앞세워 네덜란드군을 추격한다.
작전대로라면 네덜란드군은 이미 철수를 완료해야 했지만
독일군의 추격으로 인해 아직도 후퇴귀로에 오르지 못한다.
6월 29일
1차 추격을 막아낸 네덜란드군은 본격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독일군은 해협건너로 후퇴한 네덜란드군을 추격하지만
미리 방어선을 구축한 네덜란드군에 의해서 격퇴당한다.
7월 12일 네덜란드 동부에 잠입시켰던 레지스탕스 조직이
독일 게슈타포에 의해서 발각되면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이 완전히 무너진다.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은 SS에 끌려간 후로 아무도 행방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7월이 되면서 서부전선에는 대부분 전선이 교착된 상태였지만
프랑스 Longuyon지역에서 거의 매일 같이 교전이 벌어졌고,
Antwerpen지역에서도 매달 큰규모의 전투가 계속 발생되었다.
15차 Antwerpen 전투에서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네덜란드군이 일단 승리로 끝나지만
Antwerpen지역에 들어가자 마자 곧바로 후방에 있던 독일군이 기갑사단을 앞세워
네덜란드군에게 공세를 가한다.
보병위주의 네덜란드군은 방어전선을 갖추기도 전에 중전차를 앞세워 진격하는
독일군을 막을 수 없기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음날 철수하면서
16차 Antwerpen 전투가 마무리된다.
8월이 들어서 독일군이 네덜란드 전선에서 곳곳에서 공세를 시작했지만
강력한 네덜란드 방어전선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곧 철수 한다.
독일군의 공세가 멈추자
8월 5일 네덜란드군은 마지막으로 Leeuwarden포위 섬멸전을 한번 더 시도한다. (작전명:돌풍)
독일군은 더이상 포위섬멸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후방에 예비전력이 있었고
상륙군이 상륙을 시작하자 곧바로 수많은 독일항공기들이 상륙선들을 노리고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상륙과정에서도 사상자들이 다수 발생한다.
독일공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군은 상륙을 무사히 마치는데 성공하였지만
근처에 있던 독일 후방사단들에게 공격받으면서 앞 뒤로 독일군을 두게 된다
5차 Leeuwarden포위 섬멸전에서는 네덜란드군도 포위딤에 따라 서로 누가 먼저 포위망안의 적군을
섬멸하는 시간싸움이 되었다.
8월 10일
네덜란드군이 먼저 포위망안의 독일군 집단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한다.
네덜란드군을 요격하기 위해서 동쪽에서 증원되는 독일군을 피해서 네덜란드군은 곧바로 철수한다.
철수는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어느때보다 빠른 독일군의 반응에 의해서 돌풍 작전에서 네덜란드군은 동원병력의 15%가 전사한다.
5번의 Leeuwarden포위 섬멸전에 모두 참가했던 네덜란드군 상병 헤르트 빌더스은
상륙작전의 대해서 말하길
'우리가 처음 상륙했을때와 마지막 철수햇을 때 옆의 전우들은 40%가 바뀌어 있었다.'
'해협건너 철군할때마다 우리 소대는 인원들은 4~5명씩 사라졌고 매번 그 자리는 신병들이 채워졌다.'
'아직도 해협건너편에 전우들을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네덜란드군이 5개 군단 규모의 독일군을 섬멸했지만
여전히 서부유럽에서는 독일군이 강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프랑스 전선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또 네덜란드군은 예비병력이 1만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더 이상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는
Leeuwarden포위섬멸전 같은 작전을 한동안 할 수 없게 되었다.
네덜란드 사령부에도 어느때보다도 큰 위기감에 빠져있었다.
1개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붕괴되면 독일군 전선이 조금 약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암스테르담-로테르담 건너편의 독일군은 여전히 같은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독일군이 점점 신형무기와 보급품을 전선에 투입하면서 장비 질적인 차이까지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합군 사령부에 독일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요구했지만
네덜란드의 세력 축소를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저런 핑계로 정보를 넘겨주지 않거나
오랜되어 사실상 쓸모없는 정보를 전해주었기에 네덜란드 사령부는
거듭된 큰 승리에도 점점 침체되어만 갔다.
전쟁이 끝난 후
그 당시 1사단장을 지휘했던 Orange shadow(당시 준장)는
회고록에서
'우리는 전술적으로 엄청난 승리를 많이 거두었지만 거대한 독일군의 전략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우리가 전멸시킨 독일군 숫자만큼 매번 새로운 독일군이 나타났고
우리군은 물심양면으로 점점 소모되어갔다.
1940년 4월 개전당시 14만명을 추가 동원할 수 있었던 아군예비병력은
1941년 8월 1만명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거기다가 후방에의 민심은 아군의 커다란 전술적 승리만 보고있었고
네덜란드에 처한 상황을 보지 못했고 자꾸만 국민여론은 방어선에서
전진하지 않는군을 비난하기 까지 이르면서
내각에서 군부에 전면공세를 요구하면 은근히 압력을 가해왔다.
우리가 공세가 나서서 단 한번이라도 실패할 경우 수도가 점령당하는 것을
알고 있던 원수는 그들의 압력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
.
.
' 어떻게 보면 36~37년 사이에 확보한 해외점령지에서
들어오는 해외병력들 덕분에 어째보면 이지점까지 네덜란드군이 버틸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선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아프리카계부터 카리브 덴마크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
무척이나 다양했고 그들 덕에 전선을 간신히 유지 하고 있는 실정이였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머나먼 유럽까지 와서 피를 흘린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한다.'
(Orange shadow 회고록 중 1941년 어두운 승리 부분 발췌)
첫댓글 아이고 재미나라!! 수고 많으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영국은 프랑스랑 벨기에한테 군대 파견한뒤 지휘권까지 줘버려서 지도상에 표시가 안되는 것뿐
실제로 프랑스랑 벨기에 전선에 많이 분포되어있어요
필력이 장난이 아니시구만
삭제된 댓글 입니다.
AI니까요 ( ")
근데 점점 그것도 못해먹겠음... 애들이 점점 강해져서 피해가 계속 커짐...
더이상 해협을 끼고 포위섬멸했다가는 인력이 못 받쳐줄 겁니다. 저런다고 크게 전세가 기우는 것도 아니니 이젠 자제하셔야...
프랑스가 얼마나 잘 버텨줄지 여전히 걱정이네요...
강끼고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긴한데... 강없는 지역에서 주로 교전이 많이 벌어짐
애초에 포위섬멸여러번하면 전선이 좀 약해지면 그때부터 밀고 나갈라고 했는데...
독일군 숫자가 안 줄어듬 히밤 ㅠㅠ
1941년 8월이면.. 독소전 개전 안되있나요?
원래 독소전은 독일의 선전포고로 시작된건데..
연대기에서 독일은 지금 독소전 진행할 형편이 못되죠 ^^;;
독일이 AI가 변경되서 만일 서부전선에 연합군이 대규모로 위협중이면(비시 프랑스가 건설되어도 만일 영국군이 40만대군이 상륙한 상황에서는 소련공격계획취소하고 서부전선 방어에 투입)소련 공격자체를 시도한지 않는걸로암
16차 쩌네요;; 소비에트는 아직인걸까요....
독소전을 기대하는분이 많군요 ㅋ
네덜란드군이 전술적으론 우세인데.... 문제는 전략이죠 전략. 수가 딸립니다.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이니 어쩔 수 없죠
글구 육군지휘관도 바닥이랍니다...
신규사단 만들어도 장수가 없어서 안만듬...
그럼 더 만들어야할라나...
이.....인력좀 보소소소소솟
그나저나 어떻게 전세를 역전하실지?
15, 16화에서 해결책들이 윤곽을 보이게
될것 입니다
전략적인 약점을 작전술적인 이점으로 상쇄한다! 독일한테는... 무릴까요?
at나 td를 독립연대 형태로 몇개라도 초반부터 좀 운용했으면 기갑/중기갑에 의한 공격/방어/반격에 대해 피해를 꽤 줄일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at는 원레부터 고자라 쳐도 td같은 경우는 인력도 비교적적게 먹고 속도도 빠른편이라 한두개 많들어두면 전 전선에 걸쳐서(마치 대전중 독일 중전차 대대들처럼) 공수 모두에서 활약했을텐데...
그리고 독일군 숫자가 안줄어든거 같이 느껴지는게 당연하죠... 60~100여개 사단을 운용중일텐데 2년간 군단 5개 해봐야 15개 남짓, 문젠 2년동안 뽑혀져 나올 사단만 생각해도 저걸 가뿐히 넘어서 기갑이니 뭐니 뽑아댓을 것이고, 맨파도 1200~2000정도에서 개전한거라 떨어지려면 한참 남았겟죠.
결국 저거 끝나려면 동쪽의 형제들이 나서지 않으면 42~43년쯤 되야 맨파에 한계가 오면서 1차대전처럼 44~45년까진 싸워야 끝이 보일겁니다.
문젠 프랑스나 영국도 그때까지 못버틴단거죠 ㅎㅎ(아마 영프도 지금쯤 슬슬 신호올겁니다)
리더쉽이라도 많으면 정치/외교 부분에서 미국이니 유고니 이렇게 저렇게 압박이라도 넣어볼텐데...
TD관련테크가 개전후
완료되어 미리 준비할수가없었고
해당 교리도 전무한 상태라 투입시키는게 망설여지더군요
25개 이상 독일군 사단 섬멸했는데도
기갑사단도 일개군단규모로 없애버렸는데
예비전력이 충분해 보이는게 암울하군요
제 생각에는...이런 말씀들으시면 울프공님이 많이 섭섭하실것이 분명하지만 차라리 본토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대추축군 전쟁을 수행해야 더욱 전략적으로 알맞지 않았나...합니다.
머 첨부터 그 생각했고 이 시점까지도 생각했던 거라서 ㅋㅋ;
15화 되면 본토 사수한게 드디어 빛을 보게 됩니다.
또다른 반전이 있는듯?
15화 올렷으니 확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