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만 요한세례자신부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요한 16,23ㄴ-28
완전한 일치
사실 사제의 입장에서 강론을 한다는 일이 당연하면서도 참 어려운 일인데,
그중에서도 부활 시기가 되면 꼭 만나야 하는 요한복음 강론은
여타 공관 복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론이나 묵상이 참 어렵습니다.
요한 복음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놓고 벌이는
거대한 ‘묵상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과 그 공동체가 그 시대의 각박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신앙고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음성으로
당신이 친히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 지상에 계실 때부터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신하십니다.
요한복음서 속에서의 예수님은 번뇌하시거나 피땀을 흘리시거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메시아의 수순대로 밟아 가십니다.
당신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주도권을 마치 당신 스스로 행사하시는
하느님처럼 그려내십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저 뛰어난 인간이라거나,
아니면 사람으로 났다가 훌륭한 업적을 통해 하느님(神)이 된 어떤 성현 정도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지창조 이전부터 말씀으로 함께 하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셨노라고,
그 하느님께서 몸소 임재하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니, 이제 우리에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 한 분 뿐이시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은 이제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나의 인생 안에서 몸소 행사하시는 분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리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인생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기도도 그렇고 성체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달라고 청하는 것이 기도라 하지만, 실상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그리스도의 그 농밀한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를 미사 통해 먹고 마심은
바로 그 친교에 우리도 함께 동참하는 본질적인 일입니다.
세상이 미혹해 모르는 것도 많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 속에 머무르는 사람은 압니다.
모든 것이 명약관화한 빛 속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턱없는 두려움과 불안함, 불만과 욕심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꾸만 이 세상과 머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보다는 세상의 자리를 더 넓혀가려고 안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된다고도 많이들 말씀하시고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다고도 말씀들 많이
하시지만, 정작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십시오. 주십시오...’는 필요할 때마다 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구한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관심사였지, 하느님의 관심사는 구하지 않았던게지요.
하느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와 나누었던 그 일치 속에
자녀인 우리도 함께 머물기 만을 바라십니다.
우리도 그 일치를 살고, 우리도 그 사랑을 살며,
우리도 그 친교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만을 바라십니다.
부디 하느님의 관심사가 내 일생을 통한 관심사가 되길 바랄 따름입니다.
내 좋자고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좋으시라고 살아가는 그 자녀들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부산교구 조영만 요한 세례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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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8,23-28 요한 16,23ㄴ-28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청하고 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상대를 나의 삶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청하는 것도 그분의 존재에 나의 존재를 살며시 포개어 놓고
서로를 생각하고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먼저 예수님의 삶을 좇고,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되새기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가 예수님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는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
신앙인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안에 함께할 내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듯, 우리의 삶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만의 청이 아니라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의 청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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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8,23-28 요한 16,23ㄴ-28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보면,
첫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는 말씀입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게 해 줍니다. 특히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해본 적이
없다.”(요한 1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를 비춰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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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