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태 베다 신부
주님 승천 대축일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마르코 16,15-20ㄴ
예수님, 하늘로 오르셨도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승천대축일입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지 40일째 되는 날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말씀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코 16,14-19, 루카 24,51, 사도행전 1,9)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 비로소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승천에 관한 기록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예언자 에녹과 엘리야 등이 죽지도 않고
하늘로 들리어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에서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라고 고백합니다.
이 ‘하늘’이나 ‘오른편’이라는 말은 공간적인 뜻에서 ‘하늘’이나 ‘오른편’이 아니라 본래의 하느님
상태로 복귀하셨다, 혹은 하느님 아버지의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공간적인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굳이 날 수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코와 루카 복음서는 부활하신 당일 날 승천하신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서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것으로 보도하는 이유는 여러 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40이라는 숫자의 신학적 의미 때문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기까지 꼬박 40일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성경에서 40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앞두고 40일을 기도, 단식하며 준비하셨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오르는 것이 이토록 엄청난 일일진대,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로
만나고, 그분을 아빠(abba)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셨으며,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있을 곳을
미리 마련해 주셨습니다.(요한 14,2-4 참조)
이처럼 주님 승천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오르셨기에
그분의 지체인 우리도 언젠가는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66항)
또한 이 구원의 희망을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알리기 위해
복음 선포의 의무도 일깨워 줍니다.(마르코 16,15 참조)
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
2024년 5월 12일
**********
이완희 스테파노 신부
주님 승천 대축일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마르코 16,15-20ㄴ
승천-우주를 사랑으로 채우시는 하느님의 발자국
“갈릴레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11)
오늘 첫 독서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 천사가 들려준
말씀이다. 오늘날 하늘의 개념은 성경이 쓰이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늘로 날아 올라가면 끝없는 우주가 나온다. 관측이 가능한 우주의 끝에 도달하려면
빛의 속도로 수백억 년을 가더라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는 동안에 우주는 계속 확장하니까…. 그러니 하늘을 바라보는 승천 이야기는
오늘 독서 말씀으로 정리해야겠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참조)
오늘 승천 이야기는 하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약속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분께서 처음 오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때도 우리를 잊지 않고 꼭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대인은 신·구약성경 속 시대와는 모든 것이 달라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시대의 인생은
그 시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의 연속이다. 피조물의 역사가 수천 년이 아니라
138억 년으로, 생활과 사유의 공간은 지중해 연안을 넘어온 지구 끝으로, 중력을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태양계, 은하, 은하단, 관측이 가능한 우주, 미지의 우주로 넓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허구가 되었으므로 신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볼 수 없는 곳이 발견되어 더 이상 눈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들과 같다.
오히려 신앙인은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감동한다. 6천 년짜리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영겁의 하느님이 그분이시다.
1977년에 발사된 우주탐사선 보이저1호가 태양계 저편에서 카메라를 돌려 찍은 지구 사진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린다. 그 사진을 보노라면 이 우주에서 지구란 얼마나 작은 곳인가를
깨우칠 수 있다.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현되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
지구뿐만 아니라 수천억 개의 별을 가진 수천억 개의 은하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우주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임계국면(threshold)을 만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난다. 그 임계국면의 정점에 예수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사랑이 계신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사셨고, 어느 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 사이의 이정표다.
많은 사람이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산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담은 리스트다.
얼마 전에 나는 버킷리스트를 바꿨다. 2021년에 인류는 우주에 ‘제임스 웹’이라는 고성능 망원경을
띄웠다. 어느 날 그 망원경이 촬영한 화보를 보다가 입이 벌어졌다.
거기에서 6,500 광년 떨어진 독수리성운 안에 있는 ‘창조의 기둥’이라는 사진을 보면서
그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그날 나는 버킷리스트를 바꿨다. 언젠가 꼭 그것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안 되면 하느님께 보여달라고 조를 것이다. 이제 내 버킷리스트는 이 세상의 풍경이나
죽기 전이라는 시간에 한정하지 않을 것이다.
승천은 이렇게 그분을 통하여 우주로, 사랑으로 나를 뛰어오르게 하는 약속이다.
인천교구 이완희 스테파노 신부
2024년 5월 12일
***********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주님 승천 대축일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마르코 16,15-20ㄴ
지금 여기 함께하시는 예수님과 기쁘게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활동을 마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승천에 대한 설명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장소를 옮기셨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시간과 공간의 한계와 제약을 벗어난 분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분이시고,
공간적으로는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이들과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러한 말씀대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여하신 사명은 복음 선포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무섭고 두려워 세상으로부터
피해 숨어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위로와 평화를 주시고 다시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세상을 피해 숨어있었던 그들이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신들과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사명의
수행에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처럼 예수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약속이야말로
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근원적 힘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상대를 만난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한다면 삶의 고난과 역경의 순간마저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아무렇게나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대가 있기에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우리의 그런 상대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요 벗으로 불러주시며 우리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행복하고
우리 인생은 참으로 의미 있고 소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면 그 기쁨과 행복은 자연스럽게
이웃들에게도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면 닮는 만큼 우리의 말과 행동, 모습과
태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셨듯이 우리도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성자이신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된 이들입니다. 파견된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고
선포하는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에페 1,19 참조) 기억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합시다.
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12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