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야기가 아닙니다. 20세기 아마도 전반기 정도까지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도시에서는 어림도 없겠고 시골에서나 있었던 이야기이지요. 옛날에야 돈과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거리낌 없이 인정되었던 관습이기도 했고요. 하기는 아직도 세상에는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사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문명국가에서는 이제는 지나간 유물입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할지라도 직접 당하는 당사자들에게는 견디기 쉽지 않은 관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둘이기에 더 치열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 밤 이쪽일까 저쪽일까 가슴 조이며 지내야 했던 세월이 얼마이겠습니까? 한참 지나 나이 지극해져야 좀 가라앉으려나?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경우입니다. 그 시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가계를 잇지 못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에야 그 까닭이 꼭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아이를 직접 낳는 여자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지요. 아마도 그래서 후손을 가진다는 목적으로 집안에 여자를 더 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상대를 좋아하거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식을 목적하고 들였기에 어쩌면 남편의 사랑과는 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여전히 조강지처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면 후처로 들어온 여자는 뭐가 되겠습니까? 나는 아이 낳는 기계냐?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또 생깁니다. 과연 후처로 들어온 여자에게서 아들을 가집니다. 사정이 생겨 친엄마는 자기 인생 산답시고 집을 나갑니다. 그러니 그 아이는 전처가 키웁니다. 소위 생모와 기른 엄마 사이에서 묘한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들은 나중에 생모를 미워하지만 그래도 낳아준 엄마에 대한 애틋함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점점 잘 되는 것을 바라보는 두 여인의 시각이 다릅니다. 아이는 어느 쪽으로 정이 가겠습니까? 아이를 다독이며 생모의 정을 회복시키려고 애도 썼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의 정을 받고 싶을 때 행여 소홀함을 당한다면 역시 서운한 일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남편 하나를 두고 티격태격 하다가 이제 아들을 사이에 두고 다시 긴장합니다.
하나 있는 아들에게 후손이 없다는 것은 그 집안에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후처를 갖게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가계를 잇자니 도리가 없습니다. 마침 동생 하나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가 기댈 곳을 찾고 있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혼례를 치릅니다. 그래도 마음은 이전 아내에게 가 있습니다. 일단 동생이 어려움 없이 크도록 하기 위해 참고 지내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며 지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밤에는 나에게로 올까 하는 기대로 날마다 초조합니다. 두 여자의 갈등이 폭발합니다. 추수 끝난 논에서 서로 뒹굴어가며 싸웁니다. 한참 엎치락뒤치락 하더니 서로가 기가 막히고 우습기도 합니다. 이게 여자의 팔자인가 싶겠지요.
시어머니 모시며 사는데 서로 으르렁거리고 살 수도 없는 일이고 둘 다 덕 될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형님 동생하며 사이좋게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빚으로 살림은 어려워지고 후처의 동생은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남편의 미움과 천대를 받자니 어느 날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큰 상처를 입었으니 그나마 형님의 위로가 힘이 됩니다. 다행히 아들을 낳아 집안의 희망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곧 남편은 빚을 빨리 청산하려는 심산으로 외항선을 타러 나갑니다. 시어머니 모신 두 여인은 서로 기대며 힘이 되어줍니다. 그런데 한참 후 남편의 부고 소식이 들어옵니다. 시어머니도 아들 하나 의지하고 살다가 낙심천만 얼마 못가서 세상을 하직합니다.
후처인 ‘경자’는 아직 젊습니다. 눈이 맞았던 남자와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버림당해 술집을 전전합니다. 소문을 들었겠지요. 형님인 ‘영순’이 찾아서 데려옵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를 아들이 반기지 않고 박대합니다. 그래도 영순이 잘 키웠기에 마음은 바르게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를 무시하던 동네 친구를 내치며 돌아섭니다. 그렇게 모자가 화해합니다. 아들 ‘상민’이는 자라서 의젓한 대학생이 됩니다. 키운 보람을 느낍니다. 누구 덕일까요? 누가 더 자랑스럽게 생각할까요? 상민이는 어느 쪽으로 정을 더 쏟을까요? 마치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둘 다 좋은 거죠.
그런데 영화만큼 장면마다 나타나는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마치 전시회에 걸려 있는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듭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장면 하나하나를 뽑아다가 액자에 넣어서 걸어놓고 싶습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풍경화 감상을 유도하려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시골에 가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그럼에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역시 전문가의 손에서 잡히는 그 장면은 그대로 예술입니다. 이야기도 아름답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는 장면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영화 ‘두 여자 이야기’(The Story of Two Women)를 보았습니다. 1994년 작품입니다.
첫댓글 잘보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