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9,1-8 요한 16,29-33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달리 최후의 만찬 뒤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긴 담화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 그분께서 남기신 유일한 계명, 성령에 대한
약속 등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16,18) 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제자들의 반응이 사뭇 다르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조차 결국에는 그분을 버리고
각자의 길로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결국 헛된 것임을,
그저 마음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와 나약함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위로의 말도 함께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맞설지 모르지만, 그 세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기신 분을 우리가
따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부족하지만, 그래서 너무도 자주 무너져 내리는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외치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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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9,1-8 요한 16,29-33
지난 사제성화의 날에 교황님께서는 모든 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교황님께서는 2020년 성소주일에 모든 신앙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의 편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어도, 수도복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 데’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 합니다.
넷째는 ‘찬미’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만나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 이시로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날마다 모여서 찬미와 찬송을 하였습니다.
행복은 찬미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기뻐 뛰어노는 것만 보아도 행복해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찬미와 찬송을 드리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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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하 세례자 요한 신부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9,1-8 요한 16,29-33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허약한 믿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제자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약한 믿음을 꿰뚫어보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하시면서 도리어 허약한 믿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약한 신앙을 지닌 제자들이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로 힘을 얻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굳센 신앙을 바라지만 아직까지는 입 안에서 맴돌고 마는 신앙입니다.
바라는 대로 뜨거운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안에서 신앙을 궁글려야 합니다.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도망치고 발로는 돌아서는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비겁하고 배신한 적이 있는 신앙일수록 자신의 초라함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초라함은 오히려 그분께서 베푸시는 자비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입 맞추게 합니다 (루카 15,11-32 참조).
광주교구 김동하 세례자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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