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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칼럼 제1153호 /다윗의 묘(무덤)가 우리 중에 있다는 의미는?
다윗의 묘(무덤)가 우리 중에 있다는 의미는?
사도행전 2장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그 묘(므네에마 mnh/ma)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라는 말씀에서 다윗의 무덤이 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까? 라는 의문 속에 항상 성경을 접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생각과 염두 속에 성경을 보는 관점을 성경해석의 기초로 넓혀 왔다.
사도행전 13: 36절에“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말씀에서 다윗의 시체가 썩은 무덤이 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까? 다윗을 항상 기억하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와 뜻을 우리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 아래 성경을 접하기는커녕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묘(므네에마 mnh/ma)라는 단어 무덤이란 단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헬라어 사전에 알파벳 순서로 3418인데 3415와 동의어 기억하다(므나오마이 mna,omai)라는 의미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다. 이 단어의 동의어는 3306 머물다(메노오 me,nw)라는 의미로 본인과 상관되는 무덤 앞에서는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머물러 기억하는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돌아가신 분을 항상 기억하기 위해서 무덤을 만들고 장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장묘문화가 매장보다는 화장하여 점점 무덤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무덤이란 단어에‘머물다, 기억하다’라는 동사와 동의어가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위의 단어를 계속 추적하면 3422 기념(므네에모쉬논 mnhmo,sunon)이란 단어가 파생되며 3423 정혼하다(므네에스튜오마이 mnhsteu,omai)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여기서‘기념’이란 단어는 돌아가신 분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정혼하는 것과 결혼하는 의미에서는 꽉 막혀버리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다시 무덤에 관련된 단어들을 모조리 찾으면서 얻어진 결론은 사람이 죽으면 몸이 썩어져 없어지는 경우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차원이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경우가 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죽음은 원래 사람이 존재했던 곳인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무덤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곳이다.
따라서 무덤은“하나님의 속”을 의미한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분을 기억해야 하지만 사실은 돌아가신 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해야 하며 고인을 이 땅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해야 하는 것이 바로 무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묘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다윗과 함께 했던 하나님이 내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다윗과 함께 하신 역사를 우리가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덤과 결혼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던 우리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삼일 동안 장사지낸 것이 바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결혼식을 거행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풀이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필자의 성경을 보는 관점을 알레고리 해석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자신이 죽으면 묻히려고 했던 본인의 무덤 안에 예수의 시체를 안장시킨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신학교 시절에 절기 설교에 고민하는 친구들이 부활절 설교를 하고 싶은데 어떤 내용으로 했으면 좋겠는가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아리마대 요셉”을 권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으며 예수의 제자였다.(마 27:57) 또한 존경받는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막 15:43) 이런 국회의원 정도는 한국 땅 안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공회 의원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눅 23:50)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제자로 언급하고 있는데 12제자만 예수의 제자로 알고 있으니........
아리마대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예수의 시체를 자신의 무덤 안에서 안장시킨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 교회가 아리마대 요셉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예수의 죽은 몸을 자신의 무덤에 안장시키는 신앙을 권유하고 있는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린 예수는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무덤을 빌려달라고 침묵의 부탁을 하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며 이 글을 쓸까? 내 안에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는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삼일 동안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 후에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빌려주었지만 자신의 몸 안에서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삼일 후에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꿈만 꾼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제는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 있는 무덤 앞에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지마라. 돌아가신 분들이 이 땅에서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하며 그 분을 만들어 주심에 영광을 돌리며 그 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역사하심을 항상 기억하며 내 신앙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무덤이던 아니면 화장하여 장묘관에 있던지 어느 곳에 뿌려져 있는 장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그리워하거나 슬퍼하는 관점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시각에서 고인을 돌아보면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고인이 돌아간 곳은 자신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 속에 다윗의 묘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고 개념이 바뀐다면 이 글을 쓰는 보람이 있 것이다. 이 작업이 너무나 절실한데 지금까지 이해하며 접해왔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이 필자로서 너무나 힘들었던 부분이다. 이런 상태는 지진이라고 아니면 전쟁의 상태를 경험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전쟁과 지진, 그 외 환란을 의미하는 장면들이 바로 내 안에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며 무사 안일한 방법으로 성경을 접해오거나 고비가 전혀 없이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성경을 공부하기를 원치 않고 있다.
남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사이비 성이 농후한 성경해석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도행전 16장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며 기도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려졌을 때 간수가 자결하려고 할 때 만류한 바울이 있는 감옥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장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흡사하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한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전등과 같은 횃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등불(포오스 fw/j)은 단순히 빛을 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의 등불, 말씀의 빛, 복음의 불을 달라고 한 것인데 아직도 어둠을 밝히는 도구로만 이해하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어둠을 밝히려는 등불은 언제든지 감옥 밖에 있는 것이지 감옥 안에는 없는 것인데 등불을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죄수로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과 실라가 우리가 여기 그대로 있다고 했다면 죄수가 도망간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전등처럼 생긴 등불을 달라고 하는 내용을 굳이 성경에 언급할 필요가 있는가?
필자의 글을 보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적잖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개념을 바꾸는 과정에서 의문과 이해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을 접하는 분들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은총이 있지만 이 내용을 알기까지 본인은 숱한 시행착오와 포기와 시작을 거듭 거듭해오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성경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엇을 조금 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 꼴불견임에도 불구하고 전하고 있는 것이 필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목회자들이 똑같은 상황일 것이다. 사명은 무엇을 다 알고 난 뒤에도 감행하는 것이겠지만 아직도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일 뿐이다.
어쩌면 알고 그 내용만이라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한다. 그동안 말씀 증거가 간헐적이었는데 지난주와 이번 주 연속 목회자와 사모 중심으로 모인 곳에서 말씀을 증거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전쟁이 터져 버렸다. 아니 지진이 일어나야 하고 전쟁이 터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화평의 고마움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의 묘가 왜 우리 안에 있어야만 하는지 겨우 알게 되었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닌가? 우리 중(엔 헤민 evn h`mi/n)이라고 하는 단어는 헤민의 원형인 헤몬(h`mwn)은 3인칭 복수가 아닌 1인칭 복수로 내 안에 다른 존재가 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전 3:23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니라. 라는 말씀과 고전 6:17에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니라 말씀에 의존한다면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임을 입증하고 있다.
주(主라)고 하는 단어는 나의 주인이며 나의 남편과 신랑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여기에 성령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주 성령이라고 호칭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된 상태에서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표명하고자 성경 전체에 걸쳐 포진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단어와 구절이 성경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을 제한된 글로 표현하다보니 의문투성이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성경공부를 접하는 분들이 저의 강의를 듣거나 말씀을 듣는 분들이 글을 읽는 것보다 쉽게 이해되고 더 값진 것을 얻게 된다고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이제 9월 달이 되면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했던 장소에서 다른 장소를 물색 중에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장소를 제공하거나 알려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또한 경기도 일산지역, 인천지역, 안양지역, 수원지역을 확대하여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대전은 장소가 확정되어 일주일 내내 성경공부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주차시설과 강의할 장소가 적어도 50명이나 100명 정도 모일 규모를 갖춘 교회나 시설이면 좋겠습니다. 교통이 아주 편리한 곳이어야 하며 근처 식당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 외에 자세한 것은 아래로 문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32+501+4183, 010+7270+7665 570220lj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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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어쩌면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빌려주었지만 자신의 몸 안에서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삼일 후에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꿈만 꾼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아리마데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믿었던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현장에 왜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았는지 궁급합니다.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 분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무덤을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았을 건데 그런 내용이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적용함으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라는 귀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는 의미는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부자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기에 자신의 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한 것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도리를 잘 한것 같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한일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단순한 행동은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을 너무 영적으로 깊이 해석하다 보면 핵심을 놓칠수도 있지 않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신앙을 경험한 막달라마리아, 엠마오 가던 두 사람들은 다시는 성경에 거론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은 승천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라고 할 만큼 옛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모르는 막달라마리아보다는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무덤 안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믿었기에, 엠마오 가던 두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몰랐지만 나중에 음식을 놓고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알아차렸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거나 알아차렸을 때마다 주님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찾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따라 다녔던 이들은 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모를까? 부활의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귀중성은 특이한 믿음이 되어서가 아니다. 나라는 무덤 안에서 옛 사람인 나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자신의 기준에 의한 판단과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착각이라고 하는데 착각의 커트라인은 없다. 말씀의 깊이에서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하신 것을 허락하심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 주변에서 십자가 신앙을 경험한 구레네 시몬, 십자가 우편에 강도, 백부장(사형총집행관)들은 왜 다시 언급되지 않고 있을까? 온전한 십자가의 구원을 맞본 그들
이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신앙의 핵심과 본질을 올바르게 깨달은 이들은 다시 등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깊이 알았던 사도 바울이 기록한 신약성경을 영적으로 깊이 해석해 놓은 것인데 어떻게 이해하시려는지, 사도요한이 기록한 요일 5:17에 사망이 이르지 않는 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냥 넘어갈려는지 엄청난 말씀의 심연 속에 신비로움을 맛보지 않고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