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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혜화동 로터리
성북동 김호(金乎)의 집에서 몽양이 나온 것은 오전 10시경, 그의 차에는 몽양과 김용중, 고경흠 그리고 이제황, 박성복 두 경호원이 타고 있었다. 몽양이 탄 검은색 리무진은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명륜동 186의 18번지 정무묵의 집을 향했다. 지난 3월 계동 자택의 폭탄테러를 당한 후 몽양은 줄곳 정무묵의 별채 사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정무묵은 을지로 6가의 경성 서비스공장을 비롯, 몇가지 사업체를 갖춘 재산가였다. 몽양이 타고 다니는 리무진 2001호도 그가 해방직후 기증한 것이었다. 미제 슈트드베커 38년형인 이 차는 원래 조선호텔 접객용이던 것을 해방 1년 전에 정무묵이 매입한 것이었다. 4.1 m 길이의 상자형 대형 차체에다 운전석과 뒷자석 사이에 유리칸막이가 돼 있고, 뒷자석 앞에는 두 개의 예비 접의자까지 곁들인 7인승 자동차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총독이 타던 캐딜락 다음가는 고급차로 소문이 나 있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지났을 때 정무묵의 집에서 3명이 탄 리무진이 빠져나왔다. 이 차에는 중앙청에 가는 김용중과 근로인민당사(現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에 가려는 이제황이 타고 있었다. 정오경이 되어서 이 차는 사람을 태우지 않은 채 명륜동 정무묵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오늘따라 한산한 혜화동 로터리에는, 세번째 지나가는 이 차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청년 몇명이 서성댔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진 않았다.
낮 12시 반경, 몽양은 기계국수로 만든 비빔국수로 점심을 때웠다. 잠시 침상에 누워 눈을 감던 몽양은 "아무래도 김군(김용기)의 팔당 농장에 가서 2,3일간 쉬워야 겠어. 우선 계동에 가서 옷부터 좀 갈아입고..." 운전사 홍순태는 저녁 7시에 무슨 회합이 있다는 말을 들려주었으나 몽양은 건성으로 듣는 듯했다. 몽양은 집에 전화를 걸어 큰 딸 여난구(당시 24세)에게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전화를 받은 난구는 속내의,와이셔츠,넥타이와 운동장에서 입을 만한 양복,스타킹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몽양은 아래 위 흰색 여름양복에다 늘 애용하던 챙이 넓은 흰색 파나마 모자를 쓰고 뒷자리 왼쪽좌석에 앉았다. 운전석이 오른쪽인 이 자동차를 탈 때면 언제나 뒷자리 왼쪽에 앉는게 몽양의 습관이었다. 몽양의 오른쪽엔 고경흠이, 고경흠 앞에는 경후원 박성복이 예비 접의자를 빼 앉았고, 앞자리 오른쪽 운전석엔 홍순태가, 그 옆에는 시내에 볼일이 있다고 따라나선 정무묵의 셋째 딸 정송자(당시 15세)가 탔다.
정무묵의 집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는 약 150m. 노폭 5m의 이 길은 좁고 비포장이라서 울퉁불퉁했다. 홍순태는 사람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른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차를 몰았다 누구도 이 차가 혜화동 로터리로 직진할때, 차 뒤에서 혜화동 로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골목을 벗어난 운전사는 포장된 로터리로 들어서 우회전을 하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꺽으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이때 로터리 왼편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 1대가 갑자기 달려왔다. 미국 '허드슨'사 제품인 '데드프린' 5인승이 달려오자 운전사는 속도를 줄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 차 뒤편으로 뛰어올랐고, 곧바로 '탕탕탕'하며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낮 1시 15분이었다. 첫 총성이 울리자 몽양은 '학'하는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했다. 직감적으로 큰일났다 싶었던 고경흠이 몽양을 마주안으려는 찰나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몽양은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고경흠의 왼쪽 무릎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조국... 조선..."이 한마디 비명을 마지막으로 남긴 몽양의 등에선 분수처럼 붉은 피가 솟구쳤다.
암살 사건 당일날 현장
입안 가득 흥건한 피로 뒷말을 잇지 못한 몽양이 고개를 떨구자, 경호원 박성복은 차도로 뛰어내렸고 고경흠은 "대학병원으로 가자"고 고함쳤다. 깜짝 놀라 운전석 뒤에 얼굴을 파묻은 정송자를 일으켜 세운 홍순태는 정신없이 차를 서울대학병원으로 몰았다.
서울대 의대 부속 제1병원에서 이들과 마주친 것은 수술실로 들어가던 조교수 한격부(당시 33세)였다. 그러나 그가 미처 손을 써보기도 전에 이미 몽양은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상처를 거즈로 막고 인공호흡을 시도했지만, 몽양의 몸은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길바닥에서 쓰러질지라도 얘들아 너희들은 울지마라 울지마라, 일어나 싸워라 싸워라!" 평소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그 말대로 몽양은 서울의 한복판 길바닥에서 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기지 않은 그의 두눈엔 피눈물이 그렁그렁, 억울함과 분통의 핏발이 섰다. 그 위로 무더운 여름, 억장이 무너지듯 시커먼 먹구름이 하나가득 밀려들었다.
1947년 7월 20일자 우리신문. 신문 전면에 여운형 암살을 크게 다뤘다.
너무 많은 우연, 너무 많이 등장한 경찰
차도로 뛰어내린 몽양의 경호원 박성복은 혜화우체국 옆도로를 건너 혜화국민학교 골목으로 도주하던 범인을 뒤쫓았다. 박성복의 양손에는 권총이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당초 미군정 당국은 몽양의 신변경호를 위해 3자루의 권총 소지허가를 내준 바 있었는데, 몽양과 박성복, 이제황이 각각 한자루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암살 바로 이틀 전 몽양이 자신은 권총이 필요없다고 해서 박성복이 두 자루의 권총을 소지하고 있던 차였다. 골목길에 들어선 박성복은 연거푸 두발의 권총을 발사하여 범인을 추격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갑자기 박성복의 목과 허리를 완강히 껴안으며 "누구냐"고 외쳤다. 동대문 경찰서 외근감독 최태화 경위였다. 땅바닥에 쓰러지는 박성복의 시야엔 여유있게 뒤돌아 보며 골목 안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범인의 뒷모습이 하나 가득 들어왔다. 정복차림의 최태화는 도리어 박성복을 범인으로 몰아세웠다. 관내 순시중 도소문 파출소를 들러나오는 길에 현장을 목격했다는 그의 주장을 이러했다. "박성복보다 한걸음 먼저 범인을 추격해 범인과의 거리가 20m 정도된 순간, 박성복의 총소리가 들렸다. 순간 박성복을 공범으로 단정해 범인추격을 멈추고 골목 모퉁이에 숨어있다 박성복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최태화가 관내 순시중이었던가는 의문이다. 당시 미군정 G-2 일일정보요약에 따르면 최태화는 우연히 암살발생 인근에서 다른 순경 두 명과 함께 고장난 경찰차를 수리중이었다. 그는 우연히 암살을 목격하고 범인을 추적하다가, 누군가 뒤에서 총을 쏘며 추적을 포기하도록 방해했기에 그를 범인으로 체포했다고 주장했다. 박성복은 자신이 몽양의 경호원이며 범인을 추적중이라며 완강히 반항했고, 실갱이 끝에 범인이 사라진 골목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허탕을 친 박성복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근민당에 연락을 하려했지만, 파출소,동회,우체국,약방 등의 전화가 모조리 불통이었다. 같은 시간 서울대 병원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울부짖는 진씨 부인과 큰딸 여난구 앞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정복,정모 차림으로 나타났다. 몽양의 시신을 부등켜안고 있던 여난구가 대뜸 "이XX 우리 아버지 죽이고 뭣하러 여긴 나타났어. 당장 그 옷벗어던져!"하면서 마구 대들었다. 장택상은 뒷짐만 진채 아무 말도 없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 몽양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으며, 목숨이나마 보전을 하려면 서울에서 도망치라고 경고 겸 협박을 했던 수도 서울의 치안책임자 장택상이 할 말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장택상 역시 몽양을 처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장택사잉 괴로운 표정만을 짓고 있는 사이, 정작 괴로움을 당한 것은 몽양의 측근들이었다. 몽양 암살 후 채 한시간도 안되어 몽양의 집에는 주한미군 CIC(방첩대)를 비롯한 헌병,수사전문가들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압수수색했다. 이유는 암살의 단서를 찾는다는 것이었지만, 세상 천지에 암살당한 사람 집에서 암살의 단서를 찾는다는 미군정의 태도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군화발로 몽양의 숨결이 채 가시지도 않은 자택을 헤집고 다닌 압수수색이 바로 미군정이 망자(亡者)에게 베푼 최후의 대접이었다. 운전사 홍순태는 "조사할 게 있다"는 이유로 동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나아가 경찰은 홍순태와 박성복, 이제황 3명을 동대문경찰서에 구속해 버렸다. 이유는 송진우 암살사건 범인 중에는 전직 경호원이 끼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박성복이 범인추적을 방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놀랍게도 경찰이 체포한 사람들은 대부분 몽양의 동지나 추종자들이었다. 몽양의 운전사와 경호원뿐만 아니라 몽양이 마지막으로 유숙했던 집의 주인인 정무묵과 고경흠 등이 '진상규명'을 위해 경찰에 체포됐다. 이런 상황은 제3자인 미군이 보기에도 불공평한 것이었다. 1947년 7월 21일 여운형과 경찰관계에 대한 비망록을 작성한 버취 중위는 이렇게 기록했다. "경찰은 여운형의 동행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체포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운형의 공개적인 정적을 체포하기는 커녕, 몽양의 경호원과 마지막 유숙한 집주인을 포함해 몽양의 개인적 혹은 정치적 동지들을 체포했을 뿐이다. 경찰의 구실은 이들을 신문해 암살범에 대한 단서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경찰은 여운형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까지 했던 사람들을 체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문조차 하지않고 있다." 비난여론이 너무 거세지자 경찰은 할 수 없이 7월 22일 이들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7월 23일 돌연 홍슽내는 재차 동대문경찰서에 체포,구속되었다. 몽양의 암살에는 우연치곤 너무 많은 경찰이 등장했고, 관계했다.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이미 몽양 자택 폭파사건 때부터 공개적으로 몽양에 대한 흠집내기와 위협을 가한 바 있었다. 테러의 진범이 붙잡혔지만, 경찰은 몽양에게 온갖 모욕을 준 후 테러범은 무죄훈방해 버렸다. 암살사건이 나기 직전에는 공개적으로 몽양이 암살의 표적이며, 자신들은 몽양의 신변을 보호할 수 없다고 떳떳이 말하곤 했다. 몽양이 살해된 곳은 우연히 파출소에서 50보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암살범이 저격할 수 있을 만큼 몽양이 탄 차의 속력을 줄이게 만든 것도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가 우연히 가로막은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장근처에선 우연히 고장난 경찰차를 수리하던 경관 3명이 있었다. 우연히 범행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범인대신 범인을 추격하던 몽양의 경호원을 공범으로 체포했다. 범행현장 일대는 우연히 모든 전화가 불통이 되었지만, 몽양의 측근과 추종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 이런 너무 많은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암살이 파출소 앞에서 버젓이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 암살범과 경찰의 연관 관계를 단정지을 순 없다. 그러나 몇달 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의 총격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적어도 범인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두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범인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대담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범인들이 경찰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드러난 바이지만, 경찰은 암살범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암살범과 한통속인 경찰 여운형의 암살은 한여름의 정국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당시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충격의 여파가 수비게 가시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미군정도 암살사건이 일어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낮의 파출소 앞에서 대담한 방식으로 저질러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극우파들은 여운형의 암살소식을 듣고는 매우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들을 제외한 모든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철혈강골(鐵血强骨, 오뚜기처럼 모진 테러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여운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중도적 통일임시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자, 문명적으로는 대화자체가 통하지 않는 극단과 극단으로 갈라짐을 상징케 한 사건이요, 이땅에선 더이상 정치적 정의,도덕적 순결이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미군정이나 그들이 통제하에 있던 국립경찰들은 암살범을 검거한다고 온갖 부산을 떨었지만, 범인을 잡기는 커녕 또 다른 암살위협이 정치지도자들에게 가해지는 실정이었다. 여운형 암살 소식을 접하고 비통에 잠겨있던 김규식은 비감함에 잠겨 있을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여운형과 함께 '5명의 암살대상자 명단'에 오르곤 했던 김규식은, 여운형 암살 수시간 전에 받았던 것과 유사한 살해위협 편지를 직접 받았다. 이미 테러범들로부터 자택습격을 당했던 과도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은 10여일간 입법의원 출입조차 삼갈 정도로 극도의 긴장상태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범인은 의외로 쉽게 잡혔다. 경찰은 범행 발생후 77시간이 지난 7월 23일 오후 2시경 암살범으로 19세 소년 '한지근'이라는 자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건은 이미 경찰과 암살범의 합작으로 철저히 조작된 상태였다. 범인검거 장소부터 이미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중구 저동 72-4호 유풍기업사에서 범인을 체포했다고 한 반면, 경무부장 조병옥은 성동구 신당동 304-243,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 집에서 체포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후에 밝혀졌지만 범인체포의 실상은 구역질나기 짝이 없는 타협과 거래의 산물이었다. 당시 몽양 암살사건의 수사는 서울지검 조재천 검사가 담당하고 있었고, 경찰의 수사책임자는 친일파로 악명높은 수도경찰청의 노덕술 수사과장이었다. 노덕술은 이미 누가 암살범이며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정보원을 통해 암살에 이용된 권총의 출처가 극우테러단체 백의사임을 알고 있던 노덕술은 백의사 단장 염동진을 연행했다. 이어 염동진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김영철(金永哲)을 연행해 사건의 윤곽을 파악했다. 이들의 진술에 따라 암살사건의 지휘자격인 신동운이 7월 23일 아침 9시 연행되었다. "몽양을 죽였다면 훌륭한 일이다. 상을 주못할 망정 벌을 주겠다니 누가 반공을 하겠느냐?"며 대들던 신동운은 김영철,신일준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결국 노덕술과 타협을 요구했다. 타협의 내용인즉슨 암살범 5명 중 1명만을 체포하며, 경찰은 약속의 증거로 암살범들의 사진을 찍어준다는 것이었다. 신동운과 타협한 노덕술은 박경림 경위에게 범인 '체포'를 지시했다. 신동운을 따라나선 박경림은 다른 형사 1명, 경찰 사진사를 대동했다. 중구 저동 유풍기업 2층 살림방에는 범인 3명이 화투치고 있었다. 혼자 들어간 신동운은 한지근 등 3명에게 "누구 한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에 한지근은 "내가 쏘았으니 내가 가겠다"며 혼자만 따라나섰다. 방을 나서기 전 암살범 3명은 경찰 카메라맨의 신호에 따라 '애국자'처럼 우국충정 어린 얼굴로 사진기 앞에 섰다. 암살범들은 만약 경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경찰과 자신들의 '거래'를 증명하기 위해 이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여운형 암살공범들. (모자이크 처리된 인물은 '제2 저격조'였던 '김훈'이라는 자인데, 이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된 이유는 MBC 다큐멘터리 제작 당시 인터뷰했을때라 신변보호상 모자이크 처리한겁니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한지근이 체포된 뒤 경찰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까지 한지근의 체포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장택상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과 사찰과장 최운하가 자신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채 7월 23일 오후 1시경 한지근을 체포했다고 미군정에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장택상조차 자신의 유급정보원을 통해서 체포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화가 난 장택상은 한지근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 명령했지만, 김재곤 경감은 한 시간 정도후 한지근을 동반하지 않고 돌아왔다. 김재곤은 장택상에게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장택상은 노덕술,최운하,김재곤을 정직시키고 다른 경찰간부에게 수사를 맡겼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정말 장택상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장택상 자신이 여운형 암살에 개입된 흔적이 너무 뚜렸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도 자유를 만끽한 암살범 '자수'한 한지근은 거짓말로 일관했고, 경찰과 검찰은 의도적인 무관심과 태만으로 일관했다. 한지근은 자신이 평북 출생으로 1946년 7월 용문중학을 졸업했으며, 이후 가사에 종사했다고 밝혔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불만을 가지고 민족적 울분을 품고 있던 차에 동년 10월 중학교 동창생인 김인천(金仁天)이 주간하는 비밀결사 '건국단'에 입단해 김일성 암살과 보안대 해체, 공산당 교란 등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와 탄압이 극심해 성공하지 못했고, 그 대신 남한에서 민족분열을 초래한 극악분자 '박헌영,여운형을 암살하려고 월남했다.'고 주장했다. 월남 당시 건국단장으로 김인천으로부터 권총 한 자루, 실탄 8발, 여운형이 자주 출입하는 계동 자택부근과 광화문통 동소문 로터리 부근의 약도와 여운형 사진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6월 28일 단신으로 평양을 떠나 7월 1일 서울에 도착한 후 한현우의 집에서 저격장소를 물색하다가 7월 19일 여운형을 암살했고, 유풍기업사 2층에 잠복하다 7월 23일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한지근의 진술에 대해 경찰은 본적지와 범행모의장소 등 무대가 모두 38선 이북이어서 사실조회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때문에 한지근의 진술 이외에는 건국단의 실존여부 등 암살배후단체,관련자를 소환,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한지근의 고향친구이자 유픙기업 2층집의 주인이라고 주장한 김이흡(당시 20세, 서대문형무소 간수)을 불러 사실여부를 추궁했는데, 김이흡은 "2년 전 이북에서 처음 인사했을 때 한지근을 소개받았으며 그때 나이는 17세로 들었다"고 대답했다. 한현우의 부인 이봉득의 진술도 동일했다. 한지근의 진술대로 나이와 이북출신이라는 사실은 확인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진술은 허위였고, 공모된 것이었다. 후에 밝혀진 바와 같이 김이흡은 한지근과 같은 평북 영변출신으로 한지근의 본명과 나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또한 김이흡은 유풍기업 2층집 주인도 아니었다. 김이흡은 월남 후 극우테러 단체 백의사에서 김영철이란 동향 출신의 테러리스트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취직한 상태였다. 김이흡은 한지근의 본명과 나이를 속임으로써 범행은폐와 범인은닉에 톡톡히 한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한지근은 당시 나이가 21세였지만, '미성년자에게는 사형을 언도할 수 없다'는 법의 헛점을 이용해 사형을 피할 속셈으로 나이를 19세로 조작했던 것이다. '희생적'으로 혼자서 죄과를 뒤집어 쓴 한지근을 사형당하게 할 수는 없다는 동료 암살범들의 조직적 배려 덕분이기도 했다. 증거도 없는데다 한지근의 진술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검찰은 1947년 8월 27일 더이상의 공범 배후관계를 캐지 않고 한지근과 신동운만을 검찰청으로 송치했다. 담당검사는 조재천이었다. 조재천은 송치 10일만인 9월 6일 신동운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하고 한지근에 대해서만 살인무기불법소지 혐의로 서울지방심리원(現 서울지방법원)에 공판을 청구했다. 한지근에 대한 첫공판은 9월 27일 서울지방심리원 대법정에서 개최되었다. 재판장은 부장판사 박원삼, 심판관에는 강홍구, 이봉규가 배석했고 검사 조재천, 변호인 김섭, 민영수가 입회했다. 변호인과 한지근이 변론과 진술은 가관이었다. 먼저 김섭,민영수는 "애국청년의 공분(公憤)에서 나온 본건 범행은 남의 손에 의한 해방이라는 우리 민족의 형식적 영광이 가져다 준 비극이다. 죄2등을 감하여 유기징역형을 내려주기 바란다."고 변론했다.(각주- 여기서 변호사 민영수는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분에 수록된 친일파입니다.) 김섭을 변호사로 선임한 것은 신동운이었는데, 김섭은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은 채 일반살인범에 대한 변호비용정도를 수임료로 받았다고 밝혔다. 물론 신동운이 적지 않은 돈을 어디서 조달했는지 하는 점은 암살의 배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암살범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있던 김섭은 후에 '여운형 살해사건 진상기'라는 책을 써서 한지근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김섭 저 - <여운형 살해사건 진상기>, 1948년 발간) 이 책은 물론 그 출간비용은 신동운측에서 댔다. 그리고 암살공범들이 범행을 폭로하자 김섭은 자신도 한지근 단독범행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김섭의 변호에 뒤질세라 한지근도 마치 '애국투사가 공판정에 선 것처럼' 온갖 연극을 다했다. "죽음을 각오한 몸이라 사형을 두려워하지는 않겠습니다. 과거에 안중근,윤봉길을 낳은 조선인데 저 하나 죽고 다시 나오지 않는다고는 생각한다면 그것은 삼천만 민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법률에는 저항치 않고 어떤 형벌도 달게 받겠으나 다만 조선의 완전독립을 이 눈으로 볼 수 있게 형의 집행만을 그때 해주었으면 합니다." 단독범으로 한지근을 기소한 조재천은 한지근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한지근은 10월 21일 제3회 공판에서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1월 4일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검찰과 변호인의 상고가 있었지만 서울고등심리원과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고, 1948년 3월 29일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7110600329203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11-06&officeId=00032&pageNo=3&printNo=337&publishType=00020 ) 이에 따라 한지근은 개성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철저한 신분위장이 성공한 결과였다. 결국 잘짜여진 각본대로 이북출신의 미성년 암살범 혼자만이 무기징역형을 받음으로써 형사상의 재판은 끝났다. 60평생을 애국으로 일관한 한 애국자가 백주대낮의 파출소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했지만, 사건은 미성년 암살범 한 명만을 무기징역에 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한지근은 경찰과 검찰, 형무소측의 극진한 대접속에서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개성형무소로 이감된 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으로 소년형무소에 수감중이던 김인성,유근배,이창희 일당과 함께 지냈다. 어처구니 없게도 한지근은 감옥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입감된 직후 특과생이 된 것이다. 특과생이란 모범수에게 주는 특혜로 동료 재소자 지도가 임무였다. 당시 800여 재소자 중 특과생은 3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한지근은 특과생 반장자리까지 맡아 감옥안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현듯 그에게 최후가 다가왔다. 6.25가 터진 것이다. 개성형무소를 접수한 인민군이 몽양 살해범 한지근을 끌고간 뒤로 그의 생사여부는, 그를 조종한 배후세력과 마찬가지로 여원히 알 수 없는 미제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