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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의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조광조.
이황(李滉)은 ‘퇴계집(退溪集)’에서
“그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해 그 실행한 바가 지나침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학력이 넉넉하고 덕기(德器)가 이뤄진 뒤에 나와 나라의 일을 담당했던들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민이 요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묘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다”라고 했다.
이이(李珥)도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학문이 채 이뤄지기 전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도학(道學)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됐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철인군주론’ 추구하며 유교적 이상국가 꿈꿔
그는 누구인가?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에게 수학한 뒤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원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군주도 신하와 마찬가지로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의 노력이 필요하다 보고
중종에게 철저한 수양을 요구하는 철인군주론(哲人君主論)의 도학정치를 추구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 1482∼1519)다.
조광조는 미신을 타파하고 불교와 도교 행사를 폐지해 유교적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했고,
폐단이 많은 과거제도 대신 사림을 무시험으로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참신한 성리학적 인재를 정치에 참여시키며 유교적 이상국가를 조선에 실현하려 했다.
조광조의 ‘정암집(靜庵集)’에 당시 중종에게 직언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서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 마음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신진 변혁주체들이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보수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조광조, 그는 한 시대를 앞서간 개혁의 화신으로
광인(狂人) 또는 화태(禍胎 · 화를 낳는 근원)라는 질시 속에서도 현실 개혁을 시도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으며, 종국엔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역사 발전에 기여한
이 땅의 창조적 소수였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소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1515년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에 임명됐으나,
과거(대과)를 보아 떳떳이 벼슬에 오를 것을 다짐하던 차
마침 증광문과(增廣文科)가 있어 이에 급제했다.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 승지를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 때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도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해 벽지로 좌천된 남곤, 심정 등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도가 일조일석에 이뤄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자리를 내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 10월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 등과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105명이 문란하게 책록됐다며
부당한 자들을 훈록에서 삭제하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의 소를 올렸으며,
대신 육경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을 올렸다.
중종은 하는 수 없이 자격이 없다고 평가되는 심정, 홍경주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훈적을 박탈하고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했다.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됐다.
그 후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조광조에게 기울어졌다고 왕에게 말하게 하고,
심정은 또 경빈 박씨의 궁인을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획책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꿀물과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등 중종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방법을 쓰니
왕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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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과거시험장.
조광조는 추천으로 벼슬을 할 수 있었지만 떳떳이 벼슬에 오르겠다며 과거에 응시, 급제했다.
“햇빛이 굽어보니 … 마음 비춰주리”
드디어 11월15일 밤 홍경주, 김전, 남곤 등은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고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해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달라”고 주청했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비롯해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체포됐다. 결국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기준, 박훈 8명이 귀양길에 올랐고, 조광조는 능주(현재의 전남 화순)로 귀양을 갔다.
얼마 후 정적인 훈구파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이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조광조는 이들에 의해 그해 겨울 12월20일에 사사(賜死)됐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 중종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정좌하고 시를 한 수 지었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했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환히 비춰주리).
그러고는 거느리던 사람들에게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어라. 두껍게 만들면 먼 길을 가기 어렵다”라고 유언했다.
이 해가 기묘년이라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부르고,
세인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과 심정을 ‘곤쟁이 젓갈’
(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둘을 싸잡아 비난한 말.
이후 ‘곤쟁이 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퍼졌다)이라고 두고두고 욕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 심곡리로 관을 옮겨 반장(返葬)을 했더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다고 전한다.
후일 선조 때 조광조는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성균관 문묘에 배향됐으며,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불렀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흘러 2009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이 나라에는 개혁을 부르짖는 무수한 집단과 인물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역사에 명멸한 수많은 변법자강론자(變法自强論者)들은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좁히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고, 지금도 개혁은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다.
비록 당대엔 실패한 개혁일지라도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볼 때는 성공한 개혁이 될 수도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