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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
루벤스의 집안은 로마 가톨릭교도였지만 아버지 얀은 칼뱅교도가 되어 1566년 이미 칼뱅교도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것은 루벤스의 가족이 독일로 망명한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1568년 브뤼셀에서 자유를 요구하던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이 참수당한 뒤 심한 종교적 박해가 이어졌고, 이 박해의 희생자가 된 루벤스 가족은 그들의 고향인 플랑드르에서 스페인 통치자들의 분노를 피해 독일로 달아났다. 얀 루벤스는 신교도인 작센의 안나 공주(1577 죽음)의 외교사절이자 고문관이 되었다. 안나 공주는 스페인의 네덜란드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고 있던 자유주의적 가톨릭교도인 오라니에 공 빌렘 1세의 두번째 아내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안나 공주가 임신하는 바람에 오라니에 나사우 왕가의 공주인 안나와 루벤스의 아버지 얀 사이의 은밀한 관계가 폭로되었다. 안나 공주는 남편에게서 얀을 용서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얀과 그의 가족은 베스트팔렌에 있는 나사우 공국의 요새인 지겐으로 추방되어 가택연금상태에 놓였다. 루벤스 집안의 아이들은 유배를 당했으며 민법과 교회법 박사였던 아버지에게서 고전의 기초를 배웠다. 얀은 지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독일의 쾰른 시로 간 뒤, 158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루벤스의 어머니는 네 자녀를 데리고 얀이 한때 행정장관으로 일했던 안트웨르펜으로 옮겨갔다.
안트웨르펜 시절
페터 파울 루벤스는 10세 때 형 필리프와 함께 안트웨르펜의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서 루벤스는 같은 나이 또래인 발타사르 모레투스와 친구가 되었다. 모레투스는 후에 플랑드르의 주요 출판사인 플란틴출판사의 사장이 되었다. 루벤스의 어머니는 돈이 바닥난 데다 루벤스의 누나인 블란디나에게 지참금도 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1590년에 그의 정식교육을 중단시키고 랄랭 백작 부인의 심부름꾼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궁정풍의 생활에 싫증이 났고 화가가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친척인 토비아스 베르하크트에게 보내졌는데, 그는 안트웨르펜의 중요한 화가인 요스 데 몸퍼의 전통을 이어받아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풍경화를 그리는 2류화가였다. 루벤스는 그림의 기초를 빨리 배우고 나서 좀더 유능한 스승인 아담 반 노르트 밑에서 4년 동안 도제로 지내다가, 오토 반 벤의 도제가 되었다. 반 벤은 로마로 가서 고대미술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공부한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집단인 안트웨르펜의 로마파 화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화가에 속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을 때 피렌체와 로마에서 르네상스 예술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우르비노 출신의 초기 바로크 양식 화가인 페데리코 바로치를 적극적으로 숭배한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시절
루벤스는 안트웨르펜의 성 루가 길드에 속한 직인으로서 2년 동안 일한 뒤, 1600년 5월에 이탈리아로 떠났다. 델 몬테는 그가 여행할 때 항상 동반한 길동무이자 최초의 제자였다. 만토바 공작인 빈첸초 1세 곤차가는 그를 고용하겠다고 제의했다. 만토바 공국은 바티칸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걸작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빈첸초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했던 8년 동안, 루벤스는 애초의 의도대로 '고대와 당대 거장들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연구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초기 르네상스 화가인 안드레아 만테냐와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줄리오 로마노는 그보다 앞서 곤차가 가문에서 일한 전임자로서 그의 존경을 받았다.
만토바 공작은 루벤스를 로마로 보내어(1601~02), 몬탈토 추기경의 보호를 받으며 그림을 복제하게 했다. 로마에서 그는 플랑드르인의 소개를 통하여 제루살렘메의 산타크로체 교회에 있는 산타헬레나 지하 예배당에 3점의 제단화를 그려 달라는 최초의 공식 주문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볼로냐 화가인 안니발레 카라치와 그의 조수들이 파르네세 궁전의 회랑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 그림의 대담한 규모와 작업방법은 젊은 루벤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가 티치아노 미술의 내재적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된 것은 훨씬 뒤였지만, 처음에는 틴토레토의 작품을 통해 나중에는 베로네세의 작품을 통해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색채와 빛과 자유로운 채색법을 배웠다.
1603년에 그는 펠리페 3세와 스페인 궁정에 만토바 공작의 값진 선물을 전달하는 최초의 외교임무를 부여받았다. 덕분에 그는 마드리드 왕궁의 소장품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펠리페의 총애를 받는 레르마 공작에게 줄 여러 점의 복제화 가운데 2점이 빗물에 젖어서 수리할 수도 없을 만큼 망가지자, 루벤스는 당장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 Democritus and Heraclitus〉(1603, 영국 개인 소장)라는 독창적인 그림을 그려서 망가진 그림 대신 레르마 공작에게 주었다. 그는 재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만토바 공국의 사절로 스페인 궁정에 파견되어 있는 까다로운 인물을 재치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만토바 공작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훗날 외교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가 만토바 공국을 위해 제작한 주요작품은 산타트리니타 교회의 제수이트 교회당을 장식하기 위해 1605년 삼위일체 주일에 맞추어 완성한 그림 3점뿐이었다. 같은 해에 그는 제노바 예수회 교회의 주제단을 장식할 〈예수 할례식 Circumcision〉을 완성했다. 루벤스가 그린 궁정 미녀들의 초상화는 만토바 공작이 곤차가 미술관에 소장하기 위해 주문한 것이었으며, 루벤스는 이 미술관의 관장을 지냈다.
1605년말 루벤스는 로마에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만토바 공작한테서 휴가를 얻었다. 당시 그의 형 필리프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 태생인 아스카니오 콜로나 추기경 밑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다. 로마로 간 루벤스는 형 필리프와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필리프는 플랑드르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이며 고전 학자인 유스투스 립시우스(1547~1606)의 뛰어난 제자였는데, 이런 필리프와 날마나 접촉하게 되자 고대 세계를 직접 발견하고 싶은 그의 열정이 더욱 강해졌다. 두 형제는 고대에 대한 관심을 합하여 로마의 사회생활과 관습을 다룬 〈엘렉토룸 리브리 Ⅱ Electorum Libri Ⅱ〉라는 책을 공동으로 제작했다. 이 책은 1608년에 안트웨르펜의 플란틴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는데, 필리프가 이 책의 본문을 썼고 루벤스는 삽화를 그렸다.
1607년 여름에는 곤차가 궁정 사람들과 함께 이탈리아 해변휴양지인 산피에르다레나로 가서 제노바 귀족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초상화를 계속 그렸다. 만토바에서는 봉급이 항상 연체되었고 만토바의 화가가 아닌 국제적 화가로 출세하고 싶은 야심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후원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루벤스는 부유한 제노바 사람으로 교황의 은행업무를 맡아주던 야코포 세라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루벤스가 발리첼라에 있는 산타마리아 교회 중앙제단 위에 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동시에 루벤스는 페르모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위해 〈목자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라는 제단화도 그렸다. 1608년 10월에 형한테서 어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귀향했지만 어머니는 루벤스가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안트웨르펜으로의 귀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루벤스는 플랑드르를 통치하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섭정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황금 족쇄'에 묶이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직접 지은 집은 안트웨르펜의 자랑거리인데, 그곳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와 고대 로마 시대의 그림과 조각, 카메오(부조로 새긴 보석 따위의 장신구), 동전 및 보석 등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의 골동품을 소장하기 위해 개인 신전을 지은 셈이었다. 이탈리아 건축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제노바의 궁전들 Palazzi di Genova〉이라는 출판물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1622년에 안트웨르펜에서 출판된 이 판화집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은 제노바의 궁전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탈리아 건축설계를 격찬했는데, 안트웨르펜 예수회 교단이 새로 짓는 웅장한 신트카를로스보로메오 교회에서 이 정신을 실천했다. 그는 플랑드르 건축가인 피테르 호이센스(1577~1637)와 함께 이 교회의 정면과 종탑 및 건축의 모든 세부를 마련한 주요설계자였다. 루벤스는 또한 이 교회의 실내장식도 담당하여, 천장화의 밑그림이 될 유화 스케치를 그렸다.
플랑드르에 영원히 정착한 그는 1609년 10월에 안트웨르펜의 주요 인문주의자인 얀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그는 궁정 초상화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주요한 종교화가로도 활약했다. 안트웨르펜의 신트왈부르가 교회를 위해 그린 〈십자가 세우기 Erection of the Cross〉, 안트웨르펜 대성당을 위해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scent from the Cross〉, 겐트의 이웃 도시에 있는 성바본 대성당을 위해 그린 〈성 바본의 기적〉 같은 바로크 양식의 제단화들을 통하여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명성 덕분에 루벤스는 플랑드르 궁정이 있는 브뤼셀이 아니라 안트웨르펜에서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또한 안트웨르펜 화가들의 길드가 정한 규정에 따르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제자나 조수들을 길드에 등록시키지 않고도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었다. 1611년경 루벤스는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지원자들을 100명 이상이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외교관 생활
1621~30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은 루벤스를 외교관으로 삼았다. 그는 우아한 태도를 지녔을 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 정치가 및 지식인들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대리인으로는 이상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화가였기 때문에 비밀외교관이나 관찰자 역할도 종종 해낼 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중요한 외교임무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는 플랑드르 지역과 북쪽의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맺어진 12년휴전조약(1609~21)을 재교섭하려는 스페인 및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노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플랑드르 섭정인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가의 알베르트 대공은 휴전협정 연장을 아내에게 맡기고 162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미망인인 이사벨라 공주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속하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딸이었다. 루벤스는 이사벨라 공주의 조언자가 되어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관계를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네덜란드에서 신교도가 우세한 네덜란드 공화국과 로마 가톨릭 교도가 우세한 플랑드르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 루벤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622년초에 프랑스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왕위를 이은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메디치가(家)의 마리가 루벤스를 파리로 불렀다. 피렌체 출신의 이 왕비는 1600년에 피렌체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결혼할 당시에 그 결혼식에 참석했던 루벤스를 다시 불러들여 새로 지은 뤽상부르 궁전에 있는 2개의 기다란 회랑을 장식할 2가지의 연작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21점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그림들은 마리의 일생을 표현한 것으로서,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 앙리 4세의 일생을 다룰 계획이었던 또 다른 연작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루벤스는 6주일 동안 어떤 그림을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를 토론하여 결정한 뒤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와, 종교와 무관한 작업 가운데 예술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 일에 2년 동안 몰두했다.
루벤스가 주문받은 그림들을 걸기 위해 1625년에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궁정의 정치적 분위기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스페인과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는 1624년 이전에 네덜란드 공화국과 덴마크 및 영국과 조약을 맺었는데, 이 나라들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에 적대적이었다. 프랑스가 이런 나라들과 새로 동맹을 맺은 것은 젊은 루이 13세의 강력한 조언자인 리셜리외 추기경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추기경은 루벤스가 두번째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예술가로서의 역할보다 첩자노릇을 더 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루벤스가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총애를 받는 버킹엄 공작과 자주 어울린 것은 더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버킹엄 공작은 메디치가의 마리와 앙리 4세의 막내딸인 앙리에타 마리아 공주와 찰스 1세의 대리결혼을 위해 파리에 와 있었다. 공작은 탐욕스러운 미술품 수집가였다. 파리에서 루벤스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공작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주문했고, 몇 점의 그림과 함께 화가가 소장하고 있는 유명한 골동품을 사들였다. 루벤스가 골동품을 판 것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버킹엄의 호의를 잃지 않으려는 외교적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프랑스에서 버킹엄 공작과 사귀는 동안 루벤스는 영국이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공작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버킹엄은 그 당시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을 유발시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벤스에게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다.
버킹엄이 죽자 루벤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위해 평화조약 협상을 시도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장관인 올리바레스 대공의 설득에 넘어가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위해 영국을 다시 침공하기로 프랑스와 밀약을 맺었다. 1628년에 루벤스는 비밀리에 급히 마드리드로 달려갔다. 루벤스는 마드리드에 9개월 동안 머물면서 영국과 싸우지 말고 평화조약을 맺으라고 간청하는 한편, 왕의 초상화들을 그렸다. 결국 펠리페 4세는 그를 적당한 칙사로 인정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 추밀원장으로 임명하여 특별한 평화사절의 임무를 띠고 영국에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가 브뤼셀에 도착하자 그의 임무를 훨씬 더 절박하고 어렵게 만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629년 4월 24일 영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영국의 찰스 1세는 대사를 교환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보류한 채, 직접 사람을 보내여 루벤스를 데려오게 하였다. 1630년에 영국과 스페인이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주로 루벤스 개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사작위를 받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왕은 그에게 궁정 건축가인 이니고 존스가 화이트홀 궁전의 일부로 설계한 왕실연회장(1619~22)을 장식할 천장화를 주문했다. 1634년에 완성된 9점의 거대한 천장화는 찰스 1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1세의 통치를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플랑드르에서 보낸 말년
1630년에 루벤스가 플랑드르로 돌아오자, 대공비는 외교적 임무를 면제해 주는 것으로 그에게 보답했다. 그러나 루벤스가 거의10년동안 애써 이룩한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그후 거의 20년 동안 유럽은 30년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계속 휘말렸다.
4년 동안 홀아비로 지낸 그는 1630년 12월에 엘레나 푸르망이라는 16세 소녀와 재혼했다. 어린 아내의 매력은 그가 후기에 그린 인물화의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그는 1635년에 엘레웨이트 성을 샀다. 말년에 그는 이 곳에서 안트웨르펜 교외의 시골생활과 풍경을 묘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풍경화에 관심을 가졌고, 일찍이 로마 시절에 그린 드로잉에도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지만, 이런 관심은 후기 작품에 가장 의욕적이고 낭만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러나 말년에 루벤스가 의뢰받은 주요작업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이사벨라 대공비의 뒤를 이어 플랑드르 섭정이 된 페르디난드 왕자의 형)를 위해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를 비롯한 고전작가들의 작품에서 약 120개의 장면을 선정하여, 왕이 사냥할 때 투숙하는 마드리드 근처의 토레 데 라 파라다(천국의 땅)를 장식할 그림 견본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루벤스는 몇 달 동안 그림 그리는 팔을 괴롭혔던 통풍이 심장에까지 미쳐 1640년에 안트웨르펜에서 죽었다.
업적
루벤스는 서양 미술가들 가운데 여러 기법들을 가장 잘 소화해냈으며, 가장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창조한 화가에 속한다. 그는 넘치는 정력으로 로마와 베네치아 및 파르마에서 고대와 16세기 거장들을 연구하고 모사했다. 또한 당대의 미술가들이 이룩해놓은 미술혁명에서도 자극을 받았다. 그의 포용력은 끊임없이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맡은 일의 규모가 클수록 그의 기질에는 더 잘 맞았다. 그는 라파엘로의 로마 화실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화실의 주인으로서 공적인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그의 매우 독특한 시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강렬한 개성은 가족과 친구들의 초상화에, 풍경의 분위기와 웅장함을 다루는 솜씨에, 〈모든 성인들 All Saints〉(네덜란드 로테르담 보이스 반 뵈닝겐 박물관 소장)의 밑그림인 유화 스케치 같은 작품들에, 그리고 안트웨르펜 대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 성 요한의 얼굴을 그리기 위하여 철저히 연구한 것 등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루벤스는 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화가로서 티치아노의 미술이 갖고 있는 시적 감흥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색채 구사, 그리고 유화물감을 다루는 완전한 솜씨를 열렬히 칭송했는데, 이것은 2번째 스페인 방문으로 절정에 달했다. 루벤스 자신도 이런 자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빛을 반사하는 작은 패널의 흰색 표면 위로 가느다란 붓을 놀리거나 길이가 거의 2m나 되는 커다란 화폭에 물감을 듬뿍 묻힌 붓을 휘두르는 대가다운 몸짓도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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