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실 金蓮實 (1898~미상)】 "1923년 대한인여자애국단 활동과 성금으로 독립운동 후원"
1898년 1월 16일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남면(南面) 원명동(圓明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최연실(崔蓮實)을 사용하였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영변의 숭덕(崇德)여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증산 창신(彰新)여학교와 평양 정진(正進)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경성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술(看護術)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평양(平壤) 남산현(南山峴) 대찰리(大察里)에서 유치원 교사로 활동 중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한 후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당에서 혈죽가(血誠歌)라는 창가를 부르며 독립의식을 고취시켜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위를 하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최종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옥에서 나온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고, 1920년 1월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안창호(安昌浩)·김립(金立)·윤현진(尹顯振) 등과 함께 김경희(金敬喜)·이인순(李仁橓)·하란사(河蘭史) 3인의 추도식을 주관하였다. 여기서 추도가를 부르면서 한인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3월 16일에는 안창호로부터 흥사단(興士團)입단 권유를 받고 정애경(鄭愛卿)·오남희(吳南熙)와 함께 입단 시험을 거친 후 3월 16일 정식으로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臨時委員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흥사단에 가입한 후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교장 손정도(孫貞道)·학감 김태연(金泰淵)·남교사 윤종식(尹宗植)·여교사 정애경(鄭愛敬)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성학교 교직원들 대부분은 흥사단원들이었다. 1920년 3월 8일부터는 김순애(金淳愛)·김원경(金元慶)과 함께 중국 청년 남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의 강압을 받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문제와 일제의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1923년 11월 상하이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 羅城)로 건너갔다. 1924년 8월부터 1925년까지 대한인여자애국단(大韓人女子愛國團) 나성지부에서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 안창호와 서재필(徐載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의연했으며, 한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대한인여자애국단은 1919년 5월 18일 삭도(朔都,Sacramento) 지방 한인부인회 회장 양제현과 다뉴바지방 신한부인회 회장 강원신이 중심이 되어 미주 각 지방에 난립되어 있는 여러 부인회를 통일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최대의 미주 여성 단체였다.
1926년 3월부터는 나성지부에서 단장 차경신(車敬信)·부단장 김혜원(金惠源)·재무 안혜련(安惠連)과 함께 서기로서 활동했으며, 그 해 7월에는 일본의 한국침략 옹호자였던 스티븐스(Durham W. Stevens)를 저격하여 독립운동의 불을 지폈던 장인환(張仁煥)이 나성에 방문하자 독립운동의 열정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환영식을 주관하였다. 1928년에도 단장 강원신(姜元信)·서기 송영도와 함께 재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1년에는 나성지부에서 서기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대한인여자애국단 총단에서 총단장 박경신·재무원 이성례(李聖禮)와 함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34년에도 총단에서 총서기로 활동하였다. 1939년 3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에서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24년 8월 7일부터 1938년 11월 10일까지 총12차례에 걸쳐서 국민의무금 명목으로 55원, 1925년 8월 20일 서재필의 외교활동비를 후원하고자 1원, 1928년 3월 22일과 1932년 3월 24일에 3·1운동 기념금으로 1원 70전, 1928년 6월 21일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에서 중국혁명후원금 명목으로 1원, 1937년 10월 17일과 28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후원하고자 2원, 1941년 12월 25일 특별운동비 명목으로 5원, 1942년 6월 18일에 독립금으로 10원 등을 제공하였다. 이런 다양한 성금을 통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그리고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재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