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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강요와 종지
남회근 선생 중용강의
송찬문 번역
형이상의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왔으며 천도(天道)와 서로 통하는 본성이면서 마음과 물질의 동일한 근원인 것, 이를 인도(人道) 근본의 자성(自性)이라 한다.
그 천성 자연 중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초심(初心) 한 생각[一念]은 바로 성명(性命)이 기동(機動) 작용을 일으킨 것, 이를 도(道)의 유래(由來)라 한다.
그 갑자기 일어나는 성명(性命) 기동의 도(道)는 선악(善惡)이 함께 갖추어진 작용이 있으니 선악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난동을 부리도록 내맡겨서는 안 되므로, 이를 고요히 사유 관찰하여 악(惡)을 없애고 선(善)을 따르도록 주동적으로 바로 잡고, 더 나아가 자성의 본래 청정(淸淨)으로 되돌아가서 천연 본성 순선(純善)의 도의 경지에 합하도록 학문수양의 도를 닦는 것, 이를 교화[敎]의 요지라 한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닦음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떠나도 된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연 자성을 알고 나서 도를 닦는 군자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임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警戒)하고 신중하며,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여 방임(放任)하지 않고 멋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천연 자성은 온갖 기능을 본래 갖추고 있는데, 그 기능은 있는 곳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지 않는 곳이 없어서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감시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장 깊숙한 은밀한 곳에서도 자성의 영상(影像) 속에 비추어 보지 않음이 없으며, 가장 미세하고 극히 작은 곳에서도 자성의 영상 속에 비추어 드러내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군자는 심의식(心意識)의 작용인,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임에 대하여 홀로 있을 때도 근신하는[愼獨] 공부를 스스로 중시하여, 심경(心境)상 갑자기 일어나는 심념을 청명하게 유지하면서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심리상태를 살펴보아 그것으로 하여금 영묘한[靈妙] 광명이 홀로 빛나고 있는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 중화(中和)의 경지로 진입하게 한다.
생리적인 정서와 상관이 있는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등의 망념(妄念)이 모두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성의 본래 청정(淸淨)의 경지에 정확히 맞아 들어간 것으로서 이를 중(中)이라 하고,
만약 우연히 밖에서 온 경계(境界)가 야기하였기 때문에 망념이 발동하였다면 그 즉시 자동 자발적으로 조절하여 다시 모두 안정되고 평화롭고[安和] 고요한 본래 청정의 경지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 이를 화(和)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화의 묘용이다.
그렇게 도를 닦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영묘한 광명이 홀로 빛나는 심경 중에 맞아 들어갈 수 있는,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 사람마다 자성 청정을 수행하는 큰 근본이다.
만약 우연히 발동이 있다면 곧 언제 어디서나 조절하여 안정되고 평화롭고 고요한 경지로 되돌아갈 수 있는, 화(和)라는 것은 온 천하 사람마다 통달하고 해낼 수 있는 도를 닦는 공부이다.
만약 언제 어디서나 수양하여 중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자기가 본래 천지와 더불어 동일한 본래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기가 본래 만물과 더불어 동등하게 천지의 생생불이(生生不已)의 양육(養育) 속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脩道之謂教。道也者,不可須臾離也;可離非道也。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莫見乎隱,莫顯乎微,故君子慎其獨也。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중용』제1절(節)이 말하는 원문은 바로『중용』전체의 총강(總綱)이며, 자사가 전통 유가공문 심법(心法) 학문수양의 심인(心印)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증자가 저작한 고본(古本)『대학』원문에서,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으로부터 시작하여 “차위지본(此謂知本), 자위지지지야(此謂知之至也)”까지가 바로『대학』전문(全文)의 대강요(大綱要)인 것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중용』제1구(句)가 말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천(天)’과 ‘성(性)’ 두 글자의 명사가 가리키는 내함은 무엇일까요? 사실 방금 제가 앞에서 이미 말하기를,『중용』이 의거하는 근원은『주역(周易)』「곤괘(坤卦)」의「문언(文言)」, 그리고「계사전」등의 내함으로부터 왔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듭거듭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의 가장 착실하고 가장 미련하면서도 가장 총명한 독서 방법인, 바로 ‘경문으로써 경문을 주해하고[以經註經]’, 더 나아가 ‘역사로써 경문을 증명하는[以史證經]’ 방법을 받아들여 쓰기만 하면, 그 의미를 스스로 융회관통(融會貫通)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의 ‘천(天)’과 ‘성(性)’에 관하여 당신이 만약『중용』전서(全書)의 결미(結尾)로서 자사가 인용하는『시경』「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의 “형이상의 하늘이 실어준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라는 두 마디를 파악하고 있기만 하면, 그가 여기에서 제시한 ‘천(天)’은 물리세계인 천체(天體)의 천(天)도 아니요 종교적인 현천상제(玄天上帝)의 천(天)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중용』이 무엇보다도 먼저 말하는 ‘천(天)’은 심물일원(心物一元)인 형이상의 의리(義理)의 천(天)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성(性)’자에 관하여는 어떨까요? 그것은 천성(天性) ․ 인성(人性) ․ 물성(物性) 혹은 명심견성(明心見性)의 성(性), 그리고 세속에서 통용하며 여기는 성욕(性慾)의 성(性)일까요? 그 답안도 간단합니다.『중용』이 여기서 가리키는 ‘성(性)’은 천도와 인도의 관계이면서[天人之際], 마음과 물질의 동일한 근원인[心物一元], 인생 생명 본유(本有)의 자성(自性)입니다. 당신이 만약『중용』원문을 자세히 읽어보기만 하면, 자사 자신이 주해한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알아서, 사려함이 없고 작위함이 없는 직도(直道)인 천성의 정성성[誠性]의 경지 속에 본래 스스로 처할 수 있다면, 자기가 자성의 묘용을 명백하게 깨닫는 것, 이를 자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자성의 묘용을 명백하게 깨닫는 작용을 미혹하여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온 후천의 인성으로부터 닦고 익히기 시작하여 먼저 자성의 본래를 명백하게 볼 수 있다면, 역시 본래 있으며 명백하게 깨닫는 지극한 정성의 경지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 이를 교화라고 한다[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그리고 “이는 본성의 덕용으로서 안과 밖이 합하는 도이니, 자기가 안으로 내명의 학(內明之學)을 닦든 밖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도에 사용하든 본성의 덕용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애의 덕과 지혜의 덕의 운용의 묘가 한마음의 지극한 정성[至誠]에만 있기에 언제 어디서나 가는 곳마다 사용해도 모두 마땅하다[性之德也, 合外內之道也, 故時措之宜也].”가 있기에, 그가『중용』의 첫 절(節)에서 제시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의 ‘성(性)’은 인도(人道) 근본의 자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자연히 온, 천도와 서로 통하는 본성(本性)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아(典雅)하고 농축된 언어문자로써 단지 간단명료한 다섯 글자인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써서,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스스로 자성을 깨닫게 할 수 있었습니다[直指人心, 自悟自性].
제2구인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는 비교적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들 2,3천 년 동안 한 개의 어휘를 습관적으로 사용해서 말하기를, ‘양심이 시키는 대로[率性] 이렇게 하자, 제멋대로 저렇게 하자’, 혹은 ‘아예[率性] 그만 하겠다’ 거나 ‘차라리[率性] 끝까지 하겠다’ 등등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중용』에서 말하는 ‘솔성(率性)’과 상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솔성(率性)’이라는 어휘는 이미 2,3천 년 동안 전통적으로 관용한 구두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솔성(率性)’이라는 이 명사(名辭)는 본유(本有)의 천성(天性) · 인성으로부터 작용이 일어나 움직인 초심(初心) 한 생각[一念]을 가리킵니다. 만약 굳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을 인용하여 말해보면, 바로 ‘직각(直覺)’이나 ‘직관(直觀)’입니다. 그렇지만 ‘직각’이나 ‘직관’의 실질 심리상태에 따라 말해보면, 그것은 의식(意識)의 범주에 속하며 아직은 그리 철저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비교적 상세하게 불가의 유식법상(唯識法相)의 분석을 인용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비교적 분명해집니다. 유식법상학은 말합니다, 본자[本自] 청정한 자성(自性)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심식(心識) 작용은 대략 5종 심성(心性)의 현상으로 분석 귀납할 수 있습니다. 1. 솔이심(率爾心) 2. 심구심(尋求心) 3. 결정심(決定心) 4. 염정심(染淨心) 5. 등류심(等流心)이 그것입니다. 이 5종 심리상태를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황으로부터 설명하려면, 거꾸로 먼저 등류와 염정의 심리상태를 말해야 합니다.
무엇을 등류심이라고 할까요? 바로 우리들의 심념생각[心念思想]이 영원히 마치 한 줄기의 폭포의 흐름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장강(長江)과 황하(黃河)가 영원히 끊임없이 출렁거리면서 청탁(淸濁)을 나누지 않고 흙과 모래를 뒤섞여 낀 채 쉬지 않고 세차게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른바 청탁(淸濁)을 나누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심념생각이 선악(善惡)이 뒤섞이고 성인과 범부가 병존하면서 평등하게 모두 쉬지 않고 세차게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등류심(等流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누어서 말하면 순수한 선심선념(善心善念)은 정심(淨心)이라고 하고, 악념악심(惡念惡心)을 염심(染心)이라고 하는데 바로 외부경계의 영향을 가장 쉽게 받는 염오심(染汚心)입니다.
솔이심과 순구심 그리고 결정심은 일반적으로 불학 수도의 지(止 : 定) 수행과 관(觀 : 慧) 수행 면에서 말해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른바 솔이심(率爾心)이란, 바로 평소에 사려(思慮)하지 않는 평정한[平靜] 심경(心境) 중에서 까닭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한 생각의 초심(初心)인데, 오되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줄 알지 못하고 가되 역시 그것이 어디로 좇아가는 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잠 푹 자고 막 깨어나는 한 찰나 사이에 아주 청명(淸明)하면서 어떠한 분별사념(分別思念)도 더해지지 않는 심경과 같습니다. 만약 이렇게 줄곧 유지해간다면[保持] 부처님이 말씀하신 ‘곧은 마음이 도량이다[直心是道場]’와 같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줄 아는 것이 바로 도를 깨달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수지(修持) 소양(素養)이 없는 일반 사람은 이런 청명자재(淸明自在)한 초심 경지를 언제나 유지해가는 것을 절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뒤따라오는 것은 습관적으로 일어나고[生起] 찾고 구하는[尋求] 마음일 것입니다.
예컨대 추억하거나 추모하는 등의 심리상태가 바로 ‘심(尋)’입니다. 사물을 바라거나 사색하는 등의 심리상태는 바로 ‘구(求)’입니다.
결정심(決定心)은 어떤 것일까요? 대체로 성인(聖人)과 속인(俗人) 두 가지 경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만약 학문수양 수행[修爲]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성인이라면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임이 어느 종류이든, 심지어 갑자기 일어나는 초심 한 생각[率爾之心]이든, 알자마자 쉬어버려서 수시로 자성의 청정본연(淸淨本然)으로 되돌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성인의 경지로 기울어지는 결정심입니다. 일반의 보통의 속인은 어떨까요? 어떤 사념(思念)과 일에 대하여 단호히 결정을 내려서, 갈지 안 갈지, 할지 안 할지 결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일반 보통사람이 사용하는 결정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상태들은 만약 유물철학과 과학의 관점에서 말해본다면 모두 뇌의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식법상학으로 말해본다면 뇌는 5식(五識 :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의 총화(總和)이며 심의식(心意識)의 의식은 뇌에 있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제6의식의 무대 뒤에는 또 더욱 깊은 이중(二重)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유식법상학을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려서 발휘하여 설명을 약간 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리 상황을 이해하고 난 뒤에는『중용』이 말하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솔성(率性)’도 바로 유식법상학에서 말하는 ‘솔이심’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성(天性) 자연(自然) 중에서 갑자기 일어나는[率性而起] 심념은, 바로 성명(性命 만물의 천부와 품성. 생명. 본성/역주)이 기동(機動)작용을 일으키는 도(道)의 유래(由來)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고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率然] 일어나는 성명 기동의 도는 선악(善惡)이 함께 갖추어진 작용이 있는데, 선악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도록[妄行] 내맡기고 그것이 제멋대로 난동(亂動)을 부리도록 내맡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고요히 사유하고 돌이켜 관찰하여 그것을 주동적으로 바로잡고[修正] 그것으로 하여금 악(惡)을 제거하고 선(善)을 따르게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으로 하여금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해야[在止於至善]’ 옳습니다.
이 때문에 “수도지위교(脩道之謂教)”라는 한 마디가 있어 설명하기를, “학문수양의 도는 그것으로 하여금 본정(本淨 본래 청정/역주)으로 되돌아가서 천연본성(天然本性) 순선(純善)의 도의 경지에 합하게 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교화 ․ 교육의 요지이다.”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평소에 습관적으로 말하듯이, 도는 닦아 얻어야 한다[修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脩道)’라는 명사의 유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또 도는 닦아 얻어야 한다는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하여서 그 다음 글로 “도야자(道也者), 불가수유리야(不可須臾離也) ; 가리비도야(可離非道也).”라는 훈계가 있습니다. ‘수유(須臾)’는 찰나의 의미와 같습니다. ‘불가(不可)’는 가르쳐 이끄는 말로서의 부정사(否定詞)이지 결코 불능(不能)이 아니며, ‘떠날 수 없다[不能離]’는 의미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평소에 불학을 연구하는 일반인들에게 하는 이런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이른바 ‘불가(不可)’는 부정사로서, 당신에게 평소의 습관적인 생각 의론으로써 멋대로 주해하지 말라는 훈계이지, 불법이 ‘불능사의(不能思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생각하고 의론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3장12부(三藏十二部) 경전을 또 사람들에게 사유하며 닦으라[思惟修] 가르치셨겠습니까?”(한 번 웃다)
마찬가지 도리로서,『중용』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자성을 스스로 깨달은 뒤에는 이어서 곧 말하기를, 깨달은 뒤에 닦음을 일으키는 것[悟後起修]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기를 바로잡아[修正] 천연 본정(本淨) 자성에 합할 것인지의 교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시고군자계신호기소불도(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공구호기소불문(恐懼乎其所不聞).”, 그러므로 천연자성을 알고 난 군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임에 대하여 모두 경계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면서 그 도를 스스로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설사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거나, 혹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듣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감히 방임하여 멋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보는 사람이 없거나 듣는 사람이 없다면 멋대로 함부로 해도 좋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사실은 “막현호은(莫見乎隱), 막현호미(莫顯乎微)”, 천연 자성은 온갖[一切] 기능[功能]을 본래 갖추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모두 자기를 감시[鑑臨]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보는 사람이 없고,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듣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것은 ‘있는 곳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似無所在而無所不在]’. 설사 가장 깊고 은밀한 곳이나 가장 미세하고 극히 작은 곳이라 할지라도 모두 자기 마음 자성의 영상(影像) 가운데 뚜렷이 비쳐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설사 백겁이 지나더라도 지어진 업은 없어지지 않고, 인연은 때를 만났을 때 과보를 도리어 스스로 받는다[假使經百劫, 所作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고 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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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보충 6) 무엇이 심(心) ․ 의(意) ․ 식(識)인가
이 심(心)은 무슨 심일까요? 의(意)는, 우리가 알듯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오늘날 말하는 심장이나 머리가 생각하는 것, 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 지각과 감각은 모조리 의식 상태이며, 이것은 심이 아니라 의식작용입니다. 제6의식작용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들 신체의 안과 밖, 이 양 손을 한 번 들어 벌린 둥근 범위, 즉 뇌의 생각이나 심리의 지각과 감각을 포괄한, 과학에서 아는 인체의 백광[光圈]이 도달하는 전감(電感) 백광의 범위는 모조리 의식의 범위로서 제6의식 범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심리학이 말하는 잠재의식은 제8아뢰야식이 아니라 제6의식입니다. 여러분은 특별히 주의하기 바랍니다! 심리학에서 오늘날 말하는 잠재의식을 불법의 제8아뢰야식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외할머니집 안으로 잘못 들어가 버린 것으로, 틀려도 크게 틀린 겁니다! 제가 보니 허다한 새로운 불학 문장들이 그렇게 써져 있습니다. 그건 정말, 아이쿠, 심어 넣은 치아가 빠질 정도로 우스운 일입니다! 완전히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의식의 범위입니다.
이른바 심(心)의 범위는 어떨까요? 제8아뢰야식의 범위입니다. 이 범위에는 3계우주(三界宇宙), 심물일원(心物一元)의 것, 형이상의 일체(一體)를 포괄합니다. 가장 연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제8아뢰야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번 연구에서는 여러분이 잘 깊이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정좌하여 불법을 학습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나 염불해서 정토에 왕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이치를 통한 뒤에는 틀림없이 왕생합니다. 이상이 심(心)과 의(意)입니다.
식(識)은 무엇일까요? 비유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식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것으로만 비유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다들 큰 바다를 알고 있는데, 큰 바다를 우리가 본적이 있습니까? 명광법사는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도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이 본적이 있어요? 나는 나이가 당신보다 많습니다. 유식학을 배움은 바로 여기 ‘인명(因明)’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의 물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무엇일까요? 하나의 추상적인 명사입니다. 많은 짠물이 모여 쌓여서 이루어진 것을 ‘바다[海]’라고 부릅니다. 바다는 하나의 명칭입니다. 이 이름[名]은 그런 하나의 상(相), 하나의 현상(現象)을 대표합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말하기를 배가 그 위에서 간다고 하지만 물의 표면에서 가는 것입니다. 배가 해상에서 간다고 하는 것은 인명적인 관념에서는 틀렸습니다. 문학적 관념에서는 그래도 됩니다. 그렇지요? 당신은 이해하셨지요? (남선생이 아래의 학우에게 물었다. 과학을 배우는 여러분은 당연히 이해했을 겁니다. 맞지요?) 그러므로 정말로 논리 인명적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바다를 본적이 있을까요? 아무도 바다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큰 곳 하나가 물이 모여 쌓여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 것을 말하기를, 우리는 인위적으로 가정하여 그것에 하나의 명사를 두어 바다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현상인데 이것은 하나의 명상(名相)일 뿐입니다.
바다에 대해서, 자, 우리는 이 하나의 명상을 이해했습니다. 이 바다의 표면에는 파도[浪]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요? 파도위에는 물보라[浪花]가 있고 물거품[水泡]이 있음을 봅니다. 그렇지요? 이게 다 있습니다. 당신은 바다가 움직이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이 말에 당신은 감히 답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대신해서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해양학(海洋學)을 연구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의 깊은 부분은 아예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상면의 표층의 파랑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바닷물 깊은 곳은 수위가 올라가거나 낮아지거나 않습니다. 그렇지요? 상면의 파랑이 움직이고 있는데, 이 파랑을 의(意)라고 가정합시다. 우리들의 생각은 바로 그 바닷물의 파랑인 의(意)입니다. 해수의 상면의, 파도[波浪] 상면의 작은 물보라를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비유인데, 이것은 인명에서 ‘종인유(宗因喻)’의 유(喻)의 작용입니다. 나의 지금 이런 말이, 인명을 배우고 논리를 배우는 사람은 하나의 비유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비유로써 이를 설명하여 식(識), 심의식(心意識)의 식(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심소조(唯心所造), 유식소생(唯識所生)! 이것은 식(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유심(唯心)은 이 물질경계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의 바람이 식의 파도에 분다[境風吹識浪]’고 하는데, 어떻게 이 경계를 조성할까요? 어떻게 물질을 조성할까요? 우리들 오늘날 과학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당신이 바닷물의 한 물보라를 보면 천연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돌이 있는데, 여러분은 본적이 있습니까?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모두 본적이 있습니다. 해수 상면인 해상은 파도[浪]로서 첫 겹[第一重]인 이것을 우리는 ‘의(意)’라고 비유합니다. 파도 상면에는 물보라가 있고 또 작은 물보라가 있는데, 이것을 식(識)으로 비유합니다. (남회근 저작, 인터넷상의『유식과 중관』에서 뽑아 번역하였음. 심의식의 차이, 지성 등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대학강의)』제3편을 읽어보기 바람/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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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자신기독야(故君子愼其獨也)”, 그러므로 도가 있는 군자들은, 심의식(心意識)에서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홀로 있을 때도 근신하는[愼獨] 공부를 중시하고, 심경(心境)상 갑자기 일어나는 초심(初心) 한 생각[率性而起]을 청명하게 유지하면서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심리상태를 살펴보아[照顧], 그것으로 하여금 영묘한 광명이 홀로 빛나고 있는[靈明獨耀]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발이개중절위지화(發而皆中節謂之和)”의 중화(中和)의 경지로 진입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이 영묘한 광명이 홀로 빛나고 있는 천연본유 자성의 청명한 심경에 합한 가운데서, 생리적인 정서와 상관있는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喜怒哀樂] 등의 망상의 생각[念]이 모두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이 바로 자성본정(自性本淨)의 경지로 정확히 맞아 들어간[中入] 것입니다. 만약 우연히 밖에서 온 경계(境界)가 야기하였기[引發] 때문에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등의 정서(情緖) 망념이 움직였다면, 그 즉시 자동적으로 자발적으로 조정하여 다시 안정되고 평화롭고 고요한 본래청정 경지 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중화의 묘용(妙用)입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중야자(中也者), 천하지대본야(天下之大本也) ; 화야자(和也者), 천하지달도야(天下之達道也).”, 이 때문에 또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상세히 해석하기를, “수도하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영묘한 광명이 홀로 빛나고 있는 심경(心境) 속으로 맞아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온 천하 사람마다 자성 청정을 수행하는 큰 근본[大本 기본/역주]이다. 만약 우연히 움직임이 있다면 곧 어느 때 어디서나 조절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安和] 경지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온 천하에서 사람마다 통달하고 해낼 수 있는 수도 공부이다.”라고 합니다.
“치중화(致中和),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만약 사람이 어느 때 어디서나 수양하여 중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자기가 본래 천지와 더불어 동일한 본래 위치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동시에 자기가 본래 만물과 동등하게 천지의 생생불이(生生不已)의 양육 속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했다면 도가와 불가 양가가 말하는 ‘천지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과 더불어 일체(一體)이다[與天地同根, 萬物一體.].’는 도리와도 같아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완전히 일치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중용』이 말하는 중화 경지를 더욱 체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중국 선종의 장졸(張拙)이라는 분의 유명한 오도송(悟道頌)을 인용하여 참고로 삼겠습니다.
불성의 광명이 두루 우주법계를 고요히 비추니
범부와 성인과 온갖 중생이 함께 내 집안이네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니 온전한 본체가 드러나고
6근이 움직이자마자 구름에 가려지네
번뇌를 깨뜨려 없애면 병이 거듭 늘어나고
진여로 향하여도 삿된 견해이네
세간의 인연에 따라서 걸림이 없고
열반과 생사가 평등하며 허공꽃이네
光明寂照遍河沙 凡聖含靈共我家
一念不生全體現 六根才動被雲遮
破除煩惱重增病 趣向眞如亦是邪
隨順世緣無罣礙 涅槃生死等空花
장졸 수재의 게송 속에 사용한 것은 모두 불가의 명사(名辭)입니다. ‘함령(含靈)’은 영지(靈知)의 성(性)이 있는 모든 중생을 말합니다. ‘6근(六根)’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을 가리킵니다. ‘열반(涅槃)’은 범어로서 이른바 청정한 불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번뇌를 깨뜨려 없애면 병이 거듭 늘어나고, 진여로 향하여도 삿된 견해이네.’는 번뇌를 끊지 않고 본성을 증득하며, 진여를 도체(道體)로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 두 구절은 모두 천연자성이 본자(本自) 청정한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과 ‘6근이 움직이자마자 가려진다’는 도리는『중용』이 말하는 도는 닦아야 한다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의의와 서로 같습니다. 요컨대『중용』의 전문 총강의 정수(精髓)는 바로 본 단락의 원문 속에 있으며 가장 중요합니다. 먼저 이 강요를 파악하고 있어야 그 다음의 글이 순조롭게 풀릴 수 있습니다.
뒤에 오는 대부분은 모두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와, 사람됨과 일처리라는 외용지학(外用之學)의 발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먼저 문자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여서 먼저 문구의 표층의 의의를 풀이했을 뿐이고 뒤에서 다시 깊이 들어가는 연구를 하겠습니다.
이어서는 바로『중용』원문이 먼저 제시한 총강의 뒤로부터 자사는 또 공자의『중용』의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와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와 관련 된 말 여덟 개의 절(節)을 특별히 신중하게 인용하여, 중용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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