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교동손씨고가(密陽校洞孫氏古家)를 거쳐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갔다. 밀양교동손씨고가는 1천평이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아흔아홉칸 집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十二大門’이란 간판을 단 한정식집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사랑채 누마루 지붕 위에는 힘차게 뻗은 추녀마루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예림서원 안내문을 읽어보니, 佔畢齋 金宗直(점필재 김종직)을 모신 예림서원(禮林書院)은 ‘덕성서원(德城書院)’이란 이름으로 자씨산(慈氏山) 아래에 창건되었다. 1634년 현재의 상남면 예림리로 옮기면서 서원의 이름을 예림서원이라 바꾸고, 우졸재 박한주(迂拙齋 朴漢柱),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680년 서원이 화재로 전소(全燒)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예림서원 구영당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관련된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유명한 점필재 김종직은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제자인 한훤당(寒暄堂), 일두(一蠹)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지만, 그러한 제자를 길러낸 점필재 김종직은 문묘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점필재는 도학자(道學者)가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조선후기의 유학자들이 도학(道學)을 이야기하고, 이기론(理氣論)을 이야기하지만, 원래 유교는 생활 윤리였다. 심오한 이론을 탐구하기 보다는 생활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중요시하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재 유학이 가진 폐해(弊害)는 상당부분 형이상학적인 이론에 매달리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론에만 매달리면 현실과 괴리(乖離)가 생기면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회 문제의 개혁에 비중을 두던 조선 초기의 유학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현재의 예림서원은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점필재의 위상에 걸맞게 넓은 대지 위에 사당과 강당, 동․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서원 마당에 서있는 오래된 산수유나무는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강당에는 구영당(求盈堂)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대개 서원은 정면 5칸인데, 예림서원은 정면이 6칸이다. 동편에 온돌방이 둘, 서편에 온돌방이 하나였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이었다. 대청 위 강당을 살피는데, 대들보가 눈에 들어온다. 목재를 다듬지 않고, 껍질만 벗겨서 올렸는데, 그 굴곡진 모습이 꿈틀대는 한 마리 용(龍)의 몸통을 보는 것 같다.

예림서원 구영당의 대들보
강당 앞에서 다시 동․서재와 정면의 누각을 바라보았다. 넓은 대지 위에 있어서인지 건물이 왜소해 보인다. 작년 여름,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 답사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복원(復原)’을 하는 과정에서 외형적 규모가 너무 커지는 것 같다. 서원은 젊은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서원건축은 젊은 유생들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엄격한 규율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이치를 생각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그러한 서원 건축의 정신을 느낀다.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도 서원 건축의 엄정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복원된 예림서원은 젊은 유생이 법도를 배우면서 공부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예림서원에 걸려있는 현판에는 ‘克遵條約無生過失’이란 글이 있다. 글의 뜻을 몰라, 밴드를 통해 도움을 얻기도 했는데, 밀양부사 이몽억(密陽府史 李蒙億)이 점필재 김종직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알려져 있다. 풀이하면 ‘이치와 규약을 극진히 따르면 과실이 생겨나지 않는다’라는 의미라 한다. 서원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글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예림서원 구영당에 걸려있는 현판 글
현재 대부분의 서원은 교육의 기능은 잃어버리고, 제례(祭禮)의 기능만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시대에 생겨난 서원 건축의 원형(原形)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 추원재(追遠齋)를 지나 점필재 묘소(佔畢齋 墓所)를 가기 위해 산길을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는 군데군데 분홍색 진달래가 피어있었다. 어린 시절 생각을 하면서 꽃잎을 따서 입에 넣어보니 맛이 새큼하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니, 2009년에 묘역이 새로 단장되었다. 현재 점필재가 얼마나 많은 숭모(崇慕)를 받는 인물인지는 표석에 새겨진 국회의원과 도지사, 대학총장 등을 지냈던 분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거대한 석축(石築) 위에 왕릉(王陵)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규모로 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다. 옛날에 세워진 석물(石物)과 2009년에 새로 설치된 석물이 묘한 조화를 이룬 묘역은 큰 감동은 주지 못하였다. 성리학에서는 명분(名分)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명분(名分)이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에 걸맞은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점필재 묘

호랑이 무덤에 서 있는 비석
점필재 묘역 옆에는 ‘인망호폐(人亡虎斃)’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고, 그 뒤에 이에 대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점필재(佔畢齋)라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傳說)이다. 합리성(合理性)을 추구하는 유학(儒學)이지만, 조상이나 스승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유포(流布)시키는 모습을 여기서 본다.
‣ 점필재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우리 답사팀은 남은 일정을 생각한다. 볼 곳은 많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퇴로리(退老里) 여주이씨세거지(驪州李氏世居地)로 차를 몰았다. 당일 밀양 답사를 안내해주신 이한방 교수님은 ‘퇴로리지(退老里誌)’라고 적힌 두꺼운 책을 들고 계셨다. 하나의 마을에서 자기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마을지(誌)를 편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아는 것도 없이 시간에 쫓기는 나의 눈에, 퇴로리는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못하였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최고 어른으로 꼽히는 이우성 교수님 댁에 걸린 ‘이우성(李佑成)’이란 문패와 ‘효덕연경지각(孝德衍慶之閣)’이라 쓰인 서각 현판이 기억에 남는다.
‣ 대구로 가기 위해서는 밀양 IC로 가야 한다. 자연스럽게 답사할 장소는 정해진다. 국난(國難)을 예지(豫知)한다는 표충비각(表忠碑閣)으로 이동했다. 표충비각 경내에 들어서니, 흡사 큰 버섯과 같은 모습으로 가지를 펼치고 서 있는 향나무가 눈에 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안리 향나무이다. 이 향나무는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이 되시는 남붕선사(南鵬禪師)가 1738년에 심은 것이라 전한다. 남붕선사는 사명당을 밀양의 인물로 자리매김한 분이다. 당시 남붕선사는 사명당의 사당이 이미 설치되어 있던 합천 해인사(海印寺)와의 힘겨운 싸움을 통해 표충사(表忠祠)를 지켜내고, 표충서원(表忠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밀양지역 유림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안리 향나무
표충비각은 총 9칸이었다. 밖에 위치한 기둥은 모두 높은 장주초석(長柱礎石) 위에 있었다. 표충비는 살창이 설치된 중앙 칸에 있었다. 장주초석에는 무언가를 끼웠을 사각형의 홈이 있었는데, 방향이 제각각이라 어떤 용도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표충비는 국가적인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영험함을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이러한 신비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능력도 없지만,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남겨두고 싶다. 표충비는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사명대사를 생각하게 하는 유적으로 하나의 전설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표충비각
표충비각 옆에는 설법보전(說法寶殿)이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중앙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이 계시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앉아 계신다. 이럴 경우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설법보전(說法寶殿)이라는 전각명(殿閣名)을 쓰고 있어 기억에 남는다.

설법보전 현판
표충비각을 나온 우리 답사팀은 조선 초기의 인물인 박곤(朴坤)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어변당(魚變堂)과 적룡지(赤龍池)를 찾았다. 어변당으로 가는 봉고 버스 안에서 ‘어변성룡(魚變成龍)을 주제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한방 교수님은 중국 황허 강 상류에 있는 용문(龍門)을 이야기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변당의 전설을 만들어낸 박곤 장군은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한 후 왜구와 여진족 토벌에 많은 공을 남겼다고 한다.

어변당과 적룡지
이제 마지막 답사지인 경덕사(慶德祠)로 향했다. 경덕사는 재령이씨 문중(載寧李氏 門中)의 사당과 재실인데, 載寧李氏이신 이장희 원장님이 추천한 곳이다. 경덕사는 1987년에 세워졌다. 현장에 가보니, 추원재(追遠齋)를 비롯한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은 유가(儒家)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져야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공사의 현장을 보면서, 조상을 추모(追慕)하고 조상의 밝은 덕을 이어나가려는 후손들의 모습을 본다.
‣ 대구로 올라오는 길은 봉고 버스에 햇살이 비친다. 날도 저물기 전에 이렇게 빨리 답사지를 떠나오기는 처음이라 한다. 빌린 봉고 버스를 저녁 9시까지 인계해야 입장이기에 서둘렀지만, 답사를 같이 한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수성구 콩나물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간단한 반주를 곁들여 먹으면서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첫댓글 수고 하셨읍니다
어느 답사보다 유익했던 하루가 다시금 떠올려 집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뵈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졸재 박한주 선생은 우이나 오로 읽기도 합니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迃拙齋).
고조할아버지는 행산(杏山) 박세균(朴世均)이며,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