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5 나해 연중21주일
열왕상 8:1, 6, 10-11, 22-30, 41-43 / 에페 6:10-20 / 요한 6:56-69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와 그 해결 방법
기독교 역사를 보면, 로마제국 박해 시대에 신자들은 카타콤(Catacombs)이라고 부르는 공동묘지 아니면 가정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때 그들은 구약성경, 복음서, 그리고 사도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는 등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하실 때 그들에게 “이는 내 살과 피니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 의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던 외부인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바람에, 기독교인들을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들이라고 오해했습니다. 또한 신자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불렀는데, 이것은 주님 안에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외부인들은 이 호칭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바람에, 기독교인들을 근친상간하는 자들이라고 오해했습니다. 더욱이 박해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종교예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끼리 비밀집회를 하면서 인육을 먹고 난잡한 근친상간을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불신하고 사회도덕을 위협하는 자들로 간주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313년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사람들로부터 몰이해를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 내에 심각한 전염병이 퍼지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180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 3세기 무렵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했던 데시우스(Decius)황제 시절 유행한 소위 ‘키프리아누스 역병(Plague of Cyprian)’은 구토, 설사, 고열, 그리고 손과 발이 썩어들어가는 무서운 전염병으로서 당시 기록에 의하면 수도 로마에선 하루에 5천 명이 죽었고,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구의 3분의 2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황제를 비롯해 정부에선 신들에게 제사도 지내고, 의사들을 보내어 치료하려고 했지만, 치료법을 몰랐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염될지 두려워 병자들을 방치하거나, 죽은 사람들을 거두지 않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공포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위험에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병자들을 돌보았으며,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또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와 예배를 통해 불안을 달래주고 영적인 위로를 건넸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이타적인 활동과 자선에 로마시민들은 깊은 감명을 받아서 기독교인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높아지는 데 큰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에 기독교 정신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그러한 영웅적인 행동을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원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6, 5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음식을 단지 육신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차원에만 있게 하지 않고 이제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차원으로 고양시키십니다. 그 높임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이 되신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주는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먹는 빵과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시간 안에 갇혀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감사성찬례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예수님이 전해주신 말씀을 재현하고 나서, “신앙의 신비여!(Mysterium fidei!)”라고 외치는 그 거룩한 선언이 선포되는 것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신앙의 신비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만은 수용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는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요한 6:66)”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들은 기독교를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구시대 유물로 치부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개독교’라는 말로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전하고, 인공지능으로 인간의 지식이 신처럼 극대화하고 있는 오늘날, 매 주일 성전에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믿지 않는 사람에겐 어찌 보면 비효율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초창기 기독교인들을 보고 식인종들이라고 매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여기에 모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할 때,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루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파송예식 때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 주님의 복음을, 주님의 평화를,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로마 시대 이방인들이 경멸했던 이러한 ‘식인종들의 예배’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 힘으로 전염병이 창궐했던 아비규환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에 평화를 증거하고, 슬픈 이들을 위로하며 기쁜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대대로 물려받아 간직해 온 신앙의 유산이자 전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초기 기독교 신앙 선조들이 전해 준 신앙의 신비와 사랑의 실천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는 오늘날 물질문명 속에서 냉소적이고 파편화된 이 세상을 다시 변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우리 한국의 기독교 역사을 되돌아 보면, 우리 신앙선조들도 이 정신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고아들을 데려다 보살필 때, 사람들은 혹시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아닌가 의심했지만, 선교사들은 그들을 정성껏 교육시켰고 그 중에는 훗날 교회와 사회에 훌륭한 역군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에게 신문물과 교육으로 계몽시켰고,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를 가르치면서 고루한 남존여비 관념을 타파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또한 망국의 길로 모두가 희망을 잃어가는 시절에 신앙과 교육으로 민족의 독립과 부흥을 일구는 정신적 힘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는 그러한 좋은 전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기독교가 다시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이 에페소 교회 성도들에게 한 다음의 말씀으로 재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모든 경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늘 깨어서 꾸준히 기도하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에페 6:14-18)” 우리는 이럴 때만이 우리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예수님의 거룩한 성도(聖徒)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시고,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