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意志)와 인내(忍耐)의 결과물
출발 총성과 함께 선두에 참가자들이 달려 나간다. 중간에서 출발했던 나는 많은 참가자들 속에서 한 참을 걸어 출발선을 지났지만 1km 지점까지는 사람에 가로막혀 기름 새듯 걷는 둥 달리는 둥 시간만 소비하고 있었다. 많은 참가자가 있는 대회에는 항상 잘 달리든 못 달리든 앞에서 출발해야 자신이 연습해 온 실력을 막힘없는 주로에서 발휘할 수 있었다. 잠시 대회 감각을 잃은 탓으로 그 생각을 놓치고 말았다.
1km 지점을 지나자 10분이 되어갔다. 앞 사람의 달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한 사람씩 추월해 갔다. 지하도 언덕을 통과하면서 갑자기 발목이 잡히면서 무거워졌다. 5분대 속도로 달렸는데 불과 1km를 달리고 발병이 난 것이다. 숨까지 차오며 급격히 속도가 떨어진 것을 실감했다. 왜 그럴까. 그냥 걷다가 회복되면 달릴까. 별 생각이 다 나를 괴롭혔다. 시작부터 실험하는 것 같았다. 내 의지를, 인내를 검증하는 첫 번째 관문일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사전엔 완주까지 걷거나 포기는 없다.’였다. 나와의 약속인 것이다. 천천히 달렸다.

(( 제가 사진 한 장 찍은게 없어 인서협 임원님들의 사진(1) 2장을 차용해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연습 없이 기록이나 완주를 바라는 것은 단축마라톤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주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정신적인 싸움이 필요했다.
한 달 전, 무모한 결단을 내렸다. 단축마라톤을 경험해 보았기에,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가볍게 생각하고, 쉽게 해 낼 수 있다고 장담하고 접수를 감행했다. 거침없는 용기였다. 이유는, 2년 전 원주 치악 마라톤 대회 참가를 마치고 서예를 공부하면서 서예협회 임원들이 마라톤대회에 참가한다는 글을 읽고 망설임 없이 동참하고자 행동이 먼저 발동한 것이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연습하면 예전의 달렸던 세포가 살아나 완주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예상대로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3월 초에 접수를 하고 공원에서 하루에 3,4km를 달리면서 연습을 하고, 차츰 거리를 늘려가면서 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청객이 찾아와 내 몸을 가두고 말았다. 감기가 찾아온 것이다. 월차를 내면서까지 침대 신세로 일주일을 허비해도 뚝 떨어지질 않았다. 셋째 주가 돌아오자 마음은 점점 불안했고, 이러다가 참가도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었다. 무슨 이유로도 지인들에겐 내색하기도, 변명하기도 싫었다. 언제 있었냐는 듯 깔끔하게 감기가 떨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미세먼지로 온 세상이 예민한 요즘, 모처럼 미세먼지 좋은 날에 파란 하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영상9도에 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기침도 잦아드는 것 같아 조바심에 러닝 차림으로 공원에서 달렸다. 두툼한 잠바를 입고 걷는 주민들의 의아한 시선도 상관없었다. 달리는 동안은 추위도 모르고 달렸는데, 다음 날 병원신세를 지고 말았다. 다행히 영양주사를 맞고 말끔히 회복되었다.
마지막 주가 다가왔다. 감기로 10km거리 연습 한 번 못해보고 참가하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평소 다니고 있던 체육관에 들렀다. 의욕이 앞섰는지 연습량의 부족함을 채우려 한 욕심이었는지 스쿼트를 열심히 했던 것이 골반에 통증으로 걷지도 못하게 한쪽 다리를 묶어 버렸다. 나에게 웬 벼락이란 말인가. 대회가 코앞인데 이젠 완주가 아니라 지인들과 대회에 참석할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안 쓰던 근육이 놀랐던 골반의 통증은 다행히 이틀 만에 사라졌다. D-4일 전이다. 트레드 밀에서 사흘간의 연습이 만족할 리 없었다. 일찌감치 경기장에 도착해 잔디구장에서 몸을 풀며 순조로운 달리기로 완주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연습으로 탈 없이 달리기를 바랐던 것은 욕심이었다. 무리한 달리기가 발목을 잡고 완주하려면 천천히 달리라고 경고를 한 것이다.
달리기는 거짓이 없는 운동이다. 연습한 만큼의 결과를 안겨주는 착한 운동이다. 평탄한 길을 달리면서 유난히 힘들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한 달 동안 연습한날보다 감기와 통증으로 누워 있던 날이 더 많았기에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달리면서 예전에 달렸던 시절을 떠 올리면 올릴수록 자신이 슬펐고 안쓰러웠다. 달리기는 꾸준히 연습하지 않는 자에게 기쁨과 웃음보다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예전에 달렸던 내 페이스는 간데없고 묵직한 발목이 풀리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달렸다.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힘들수록 한 곳에 집중해서 달리면 잡념이 사라져 한결 편한 마음으로 달리게 된다. 앞 사람의 발뒤꿈치를 바라보면서 달렸다. 속도도 엇비슷해 편하게 따라갔다.
3Km를 지나고 고가를 올라가면서 힘들었지만 하프에 출전한 엘리트 선수들이 턴해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은 분명 달랐다. 마치 조련된 한 마리의 야생마처럼 힘차게 달렸다. 남자로서도 부러울 만큼 늘씬한 체격에 군살 없는 조막만한 얼굴과 쭉쭉 뻗은 허벅지에 근육이 일품이었다. 성큼성큼 뛰어가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에 자주 눈이 갔고 관심이 쏠렸다. 볼수록 의욕도 생기고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내리막길에서 반환점이 보였다. 주로엔 많은 주황색의 참가자들로 출렁거렸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고가 언덕길을 오른다. 버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대회에 참석한 이유를 떠 올렸다. 그것도 잊을 만큼 긴 시간 동안 접고 지냈던 달리기였는데, 갑자기 왜 대회에 참석한다고 했을까. 서예를 배우면서 홈 피에서 대회참가 글을 보고, 알게 된 지인들과의 야외 활동에서 만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망설임도 없이 대회참가 접수를 했고 대회 당일만 고대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연습과정에서 감기와 통증으로 연습은 고사하고 출전할 수만 있다면, 지인들을 뵐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도 들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찍 경기장에 도착해 출발시간이 임박해도 지인들의 모습은 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유선으로 경기장 내 동선을 확인은 했지만 출발시간 40여 분을 남기고 더 이상 찾기보다는 내 몸을 풀어야 했다. 출발 총성이 울리고 걸으면서 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완주하고 와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 하고 손을 흔들며 경기장을 빠져 나갔던 것이다.

((사진(2)을 곁들이니 한결 부드럽고 신선합니다. 임원님들, 차용을 원치 않으시면 언제고 내리겠습니다.))
이제 달려온 길만큼 쉬지 않고 돌아가면 완주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달렸다. 연습과정에서는 걷기도 하고 수없이 거리조정도 해왔다. 하지만 출전한 대회에서 는 한 번도 중도에 걷거나 포기한 적이 없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나에게 수많은 단축마라톤 완주기록증은 그래서 소중하고 애틋했다. 기록보다는 쉬지 않고 완주했다는 의미가 컸다. 그 과정에서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 나에겐 무엇보다 필요했다.
연습과정이 부족했던 무모한 출전은 주로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연습부족의 결과물이었다. 조금 속도를 내면 옆구리가 당기거나 숨이 턱에 차온다. 감기의 잔재물인 가래가 목구멍에서 그렁그렁 울림을 준다. 마음 같아서는 뱉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7km지점이었을 것이다. 동호회 한 회원이 동료회원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옆에서 구령을 붙여가며 이끌고 있었다. 순간 이 회원의 뒤만 따라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반환점을 거의 반시간에 턴했으니 시간 내로 완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시간을 넘겨서 완주한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 또한 남기고 싶지 않은 흔적이었다.
지하도 언덕길을 달리면서 그 회원의 뒤를 놓치고 말았다. 오늘처럼 내 몸이 이렇게 무기력하기는 처음 느꼈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깨달음을 일러준 순간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달려온 내 자신이 대견했다. 스피드는 떨어졌지만 나와의 약속은 지키며 달려오지 않았는가. 마지막 남은 고지가 저긴데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했다.
지하도를 빠져 나오자 완만한 경사도로가 이어졌다. 마지막 의지와 인내를 시험하는 구간이었다. 날씨는 하늘이 도왔는지 금상첨화였다. 땀도 예전보다 조금 흘렸고, 태양빛도 구름에 가려 잠자고 있었다. 정말 정신력만 있으면 달릴 수 있게 해 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부상이나 내 몸 일부가 통증이 있었다면 경중에 따라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력의 고갈이나 한계로 정신력이 필요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골인지점 500m를 남기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데 엘리트 선두 선수들도 달려온다. 더 긴 거리를 달려왔는데 역동적인 야생마의 주자로 성큼성큼 질러간다.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드디어 무모한 결정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의지와 인내의 사이에서 잘 견디어 내고 골인했다. 하나의 의지가 땀으로 성글어 당당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짜릿했다.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연락을 하고, 중식 집에서 뵙기로 했지만 교통통제로 그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자가용을 이용했던 나로서는 교통 혼잡으로 지체되고, 도로가 풀리면 통제로 중식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지인들과의 만남과 식사 자리를 함께하지 못해서 아쉬움과 애석함은 매우 컸지만, 나를 이겨내고 완주한 것만은 칭찬해 주고 싶었다. 인천국제하프마라톤대회여, 네가 깔아준 멍석 위에서 내가 달릴 수 있었으니 행복하고 짜릿했노라. 이 순간의 완주 경험은 영원히 각인되리라.(2019.03.31)
첫댓글 문곡선생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잘시작 하세요^^
아주 멋진 글입니다
마라톤과 서예는 너무도 닮은 구석이 많지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체계적으로 근력을 키워야하고
결코 욕심만으로 과욕을 부려서는 더욱 더 안되는 ...
저 역시 겹치는 행사로 컨디션 난조였지만 회원들과의 약속이 소중하여
동참하고 감기로 고생중입니다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떠들고 웃어 본 하루였습니다
날씨가 차서 불만이 아니라 비가 안 내려서 고마웠다고 생각하면
나날이 축복아니겠는지요 ^^
仁川書藝지킴이
그래도 당일 청산샘을 다행이었습니다. 어느 자리에나 항상 계신 청산샘 고생하셨습니다.
차꽃향기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쉽게 이뤄지는 것은 없지요.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서협에서 출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접은 지 수년이 지났지만
다시 참가해야겠다는 의욕이 살아난 것이지요.
회장님 말씀처럼
달리기도 절대 욕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 부지런하고
꾸준한 노력과 연습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지요.
요즘 감기 오래 가네요.
빠른 회복을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