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은 매년 여름 경포대 해변에서 현대건설 직원들과 씨름을 하며 도전의식을 불어넣곤 했다. photo 이의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듬해인 1971년, 매우 뜻깊은 도로가 완공되었다. 바로 서울과 문산을 잇는 통일로 공사였다. 겨우 40여일 만에 40㎞ 구간이 완성된 놀라운 공사였다. 통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에게 직접 권유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박정희는 전용차에 정주영을 태우고 문산 쪽으로 달리면서 물었다. “서울에서 판문점까지 4차선 도로를 내려고 하는데, 정 회장이라면 오는 12월 5일까지 끝마칠 수 있겠소?” 의견을 묻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그렇게 하라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12월 5일 그날 북한에서 박성철 제2부수상을 단장으로 하는 남북 조절위원회 방문단이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올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깨끗이 포장된 도로 위로 그들을 달리게 하여 그들의 콧대를 꺾고 대한민국의 국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와 마찬가지로 전투와 같은 공사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기한이 너무 짧았으므로 삼부토건·동아건설·대림산업 3개 업체도 참여했다. 현대건설은 고양군 곡릉천의 벽제교(碧蹄橋) 구간을 포함한 9.5㎞ 구간을 맡았다. 전체 구간에서도 가장 난공사가 예상되는 구간이었다. 워낙 사정이 다급하여, 모든 구간에서 인부들이 한꺼번에 달라붙다시피 공사를 진행했다. 정주영은 날마다 새벽 5시쯤이면 현장에 도착해 작업을 지휘했다. 촉박한 시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겨울에 접어들자 기온이 크게 내려가 어려움이 컸다. 북한 대표단 일행이 오는 그날 아침까지도 공사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북한 대표단이 벽제교를 통과하도록 예정된 시각인 10시 바로 직전에 가까스로 포장을 끝냈다. 미처 굳지도 않은 아스팔트에서 김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기에 정주영은 무척이나 애간장이 탔다. 북한 대표단의 차가 오기 전에 인부들과 장비들을 서둘러 숨겼다. 벽제교에서도 교각 밑에 임시 받침판을 받쳐놓은 채로 행렬을 통과시켜야 했다. 행여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다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정주영은 노래를 무척 좋아하여, 만찬이나 그룹 행사에서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몇 곡은 쉬지 않고 연달아 불렀다. 스무 곡 넘게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윤항기의 노래 ‘이거야 정말’을 가장 즐겨 불렀다. “이거야 정말 만나 봐야지 아무 말이나 해볼 걸~” 하고 노래가 시작되면 좌중의 분위기는 단박에 고조되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몸까지 흔들어 대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였다.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한 곡으로 끝나는 법 없이 다음 노래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서유석의 ‘가는 세월’도 자주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우면 직원들도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한껏 흥겹게 놀 때 가장 행복합니다.” 누군가 어떻게 그 많은 노래를 외웠느냐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울산에 조선소를 세울 때 자주 내려갔었는데, 가는 데 다섯 시간 넘게 걸리다 보니 너무 따분하더라고. 그래서 카세트테이프 수십 개를 사 가지고 내내 노래를 들으면서 내려갔지. 그러다 보니 몰랐던 노래도 차츰 귀에 익더군. 같은 노래를 아마 수백 번 들었을 걸.” 이 집중력이야말로 오늘의 정주영을 있게 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주영과 비슷한 인물로 미국 억만장자 하워드 휴를 들 수 있다. 그는 좋아하는 영화를 160번이나 되풀이해서, 그것도 음식 먹던 것까지 잊어버린 채로 몰두해 보곤 했다. ‘타임’지는 하워드 휴가 괴벽한 성격을 갖고 있긴 했지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집중력과 정열 덕분에 그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집중력과 지구력은 정주영과 무척 닮아 있다. 정주영의 머릿속은 늘 사업 생각뿐이었다. 철저한 직업의식, 그것이 바로 정주영으로 하여금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정주영은 해마다 현대건설 신입 청년사원들과 씨름을 겨루었다. 씨름 시합을 통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사원들에게 도전의식을 불어넣은 것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창 팔팔한 신입사원들과 샅바를 부여잡고 힘을 겨룬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여름철 수련대회의 모래밭은 그래서 더욱 더 뜨거웠다.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은 현대건설 직원들에게 하계 수련대회를 통해 젊음과 정열을 마음껏 발산하고 진한 동료애를 확인하는 곳이었다. 씨름뿐만 아니라 배구나 달리기 시합도 벌어졌다. 창업주인 정주영을 중심으로 현대건설이라는 조직의 정체성과 신참 동료들 간의 단결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캠프파이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몇 곡조씩 뽑았다. 직원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가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쯤되면 그룹 총수와 새내기 사원들 사이의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그 모습이 낯선 직원들은 “저분이 정말 우리 호랑이 회장님인가?” 놀라기 일쑤였다. 1971년 영동고속도로 일부 구간이 개통되면서 경포대 현대호텔이 문을 열었다. 이 호텔은 수련대회 근거지였다. 서산농장이 만들어지면서 한때 그 근처의 몽산포해수욕장에서 수련대회가 열리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는 금강산으로 장소가 바뀌기도 했으나, 역시 현대건설의 대표적 수련대회 장소는 경포대였다. “우리 올림픽 한번 해봅시다” “여보! 정주영 회장, 우리 올림픽 한번 해봅시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정주영은 신바람이 났다. “우리같이 조그마한 나라가 올림픽을 치른다, 한번 해 보는 거야!” 1978년 10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을 정상천 서울시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발표했다. 다음해 10·26사건이 일어났어도 민족적 과업인 올림픽을 중단할 수 없었다. 올림픽 유치 선정 마감일인 1980년 11월 30일을 눈앞에 두고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가 떨어졌다. 1981년 2월 하순,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제24회 올림픽대회 유치 신청에 따른 제반문서와 자료를 완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접수했다. 이로써 서울은 일본 나고야와 함께 올림픽 개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개최권을 따낼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 IOC 위원이 있으니 0표의 굴욕은 없을 것이라며 안도하는 한심한 인사도 있었고, 올림픽 유치는 일본에 양보하고 1986 아시아경기대회나 열자며 일본과 물밑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 10억달러 적자를 보았다는 소식에, 경제사정이 훨씬 좋지 않은 한국이 과연 개최해서 무슨 득이 있을까 하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았다. 1981년 5월 19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올림픽유치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민간기구로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정주영이 위원장을 맡아 ‘서울올림픽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6월 9일, 국제육상연맹회장 폴렌이 국제경기연맹(ISF) 조사단을 이끌고 2박3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그날 저녁 롯데호텔에서 열린 만찬에는 유치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정주영이 정부와 체육계 인사들과 함께 참석했다. 정주영은 중요한 견해를 피력했다. “막대한 돈이 드는 올림픽 개최는 우리나라 경제에 큰 위험을 줄 거라며 반대가 큽니다. 그러나 올림픽 예산으로 짓기로 한 지하철이나 도로 공사 등은 올림픽과 관계없이 언젠가는 해야 할 일들이고, 이미 건설 중인 잠실경기장을 비롯한 여러 체육시설은 아시아경기대회를 위해 추진 중인 것이므로 이것 또한 올림픽과 무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림픽 개최를 위한 추가비용만을 계산하면 되는데, 그 금액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조롱과 반대뿐인 상황을 뚫고 1981년 9월 하순의 IOC 총회를 앞두고 유치단은 9월 20일 무렵 독일 바덴바덴에 집결, 막바지 활동을 벌였다. 현지 여론은 한국 유치단이 마치 금기의 땅에 발을 들여놓기라도 한 것처럼 혹독했다. 일본 개최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조롱과 반대뿐인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유치단은 온 힘을 다해 악전고투를 벌였다. 발전한 서울의 모습들로 전시실을 훌륭하게 꾸미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들과 미스코리아 입상자들을 안내요원으로 배치해 놓았다. 구심점은 당연히 정주영이었다. IOC 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건네고, 방에 꽃바구니와 선물을 보내고 정성 들여 접대하며 전심전력 열과 성의를 다하는 모습에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국 MIT에서 유학 중인 정몽준 등 가족들도 힘을 보탰다. 투표 하루 전날인 9월 29일 유치 도시 설명회가 열렸다. IOC 위원 80명 가운데 한국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직접 와본 사람은 몇 없었고,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을 합쳐도 겨우 10여명뿐이었다. 나머지는 한국을 막연히 아프리카 수준의 후진국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15분짜리 한국 소개 영화를 상영했다. 빌딩숲, 외국인 쇼핑객이 넘치는 백화점, 선진국 못지않은 시설과 한국인들의 상냥하고 멋진 모습이 화면을 메우자 장내가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저기가 정말 한국의 서울이란 곳인가? 혹시 도쿄의 모습은 아닌가? 미국과 유럽의 대도시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이어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다소 가시 돋친 질문도 있었지만, 예행연습 그대로 훌륭히 답하여 청문회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9월 30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한국의 시골 가을 같은 화창한 아침. 정주영의 얼굴도 하늘만큼 밝았다. “하늘도 축복하는군요. 오늘 통일의 대문이 열리는 날입니다.” 마침내 발표 시간, 사마란치 위원장이 단상에 섰다. 프랑스어로 “쎄울!” 첫마디에 대표단은 만세를 부르며 벌떡 일어섰다. 52 대 27, 기적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나고야를 압도한 것이다. 다음 날 정주영은 바덴바덴에서 가장 좋은 식당을 빌려 축하파티를 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한국인 밴드까지 초청했다. IOC 위원들도 거의 모두 참석했다. 모두가 손에 손을 맞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했다. 정주영은 빙긋이 웃는 박정희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손기정 옹과 더불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서울올림픽을 결정한 IOC에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며 극찬했다. 1980년대 초 중소기업중앙회는 회관을 새로 짓게 되었다. 서울시의 배려로 여의도 땅 일부인 8925㎡(2700평)를 불하받았다. 대지는 확보했으나 자금 마련이 문제였다. 건물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중앙회 임원들은 돈이 여의치 않으니 1만3220㎡(4000평) 정도로 짓자고 주장했으나, 회장 유기정은 무리를 해서라도 3만3000㎡(1만평)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당장 형편이 안 된다고, 그 좋은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을 세워놓으면 뒷날 틀림없이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인들의 긍지를 드높이기 위해서도 건물은 크고 우람해야 했다. 유기정은 현대건설 정주영을 찾아갔다. “정 회장님, 나만 보면 잘 봐 달라고 하시는데, 나도 한번 잘 봐 주십시오. 중소기업중앙회 회관을 짓는데, 공사비를 사정상 평당 120만원밖에 들이지 못합니다. 상공회의소 건물은 아주 그럴듯하게 잘 지어놓았는데 중소기업회관만 초라하면 형편 모르는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것 아닙니까?” 그러자 정주영이 말했다. “그래, 상공회의소만큼 으리으리하게 짓고 나서 돈은 평당 120만원만 받으라, 그 말이오?”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좋소, 해 주지.” 유기정은 깜짝 놀랐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오긴 했지만 그 또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공사비보다 50억원 이상 싼 가격이었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현대건설의 몫이었지만 정주영은 개의치 않았다. 삼화인쇄 창업자이기도 한 유기정은 그 배포와 결단에 감동해 큰절을 올리다시피 인사를 했다. 정주영은 문인 백 명을 초대해 울산의 현대 공장들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시인·소설가·수필가·극작가·평론가 등 다양했고 기자들도 몇몇 껴 있었다. 자동차공장을 찾은 일행은 그 방대한 시설이며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 빠져나오는 매끈한 차들을 보며 탄성을 연발했다. 조선소에서는 그 웅대한 규모에 압도당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 한국인이 이런 기술을 익혔단 말인가. 감개가 솟구쳤다. 일정을 마친 뒤 정주영은 영빈관에서 만찬을 열고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슬그머니 ‘돈’ 문제로 이어졌다. ‘글쟁이들은 가난해서 뭘 하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도와주십시오.’ 번갈아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어느 신문사 기자는 아예 구체적이었다. “2억이든 3억이든,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정 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참다 못한 한운사가 정주영을 위해 벌떡 일어나 말을 돌렸다. “정 회장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 시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던 일제강점기, 그 시대를 생각하니 오늘 이 바닷가에서 구경한 것을 한국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가, 감탄하고 감격했습니다. 이런 것을 이룬 정 회장님의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사람과 돈의 만남이지요” 장내가 숙연해졌다. 정주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고 할 거예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옛날엔 여기가 그냥 보통 해변이었지요. 바닷물이 밀려오면 철썩, 밀려갔다 또 밀려와서 철썩…. 거기가 이렇게 됐습니다. 5·16 군사정변 뒤 우리도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잘살아 보자고 말이에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배 한번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하시잖아요. 제가 ‘무슨 수로 배를 만듭니까?’ 했더니 ‘배는 사람이 만드는 거지 어디 딴 동물이 만드나, 한번 연구해 보자’ 하시더군요. 나와서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강원도 산골 출신인 내가 배를 어떻게 만드나, 뭘 가지고 만드나, 돈은 어디서 나고?” 소박하고도 거침없는 이야기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물 흐르듯 순하게 이어졌다. 자금 조달을 위해 무작정 울산 바닷가 사진을 들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던 일,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설득한 일,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겨우 수주를 받아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 시작했던 일들…. “언제나 고비가 있었지만 의지 하나로 극복해 왔습니다. 대한민국, 옛날엔 아무것도 없었던 나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살던 고장이었지만,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언제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배짱을 존경하면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열심히 일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다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 글 쓰는 분들을 나는 존경합니다. 옛날 강원도 고향 통천에서 어린 나이에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이광수의 ‘흙’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아니, 변호사가 될까도 생각했습니다. 부질없는 꿈이었고, 지금은 돈만 생각하는 사업가가 됐습니다. 선비는 자고로 청빈하다는데, 돈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서울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가 말입니다. 그 길을 알면 그쪽으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돈 좀 내놓으라던 사람들까지 활짝 웃으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기뻐했다. 영빈관 만찬이 끝난 뒤 기념촬영이 있었다. 정주영이 맨 앞줄 한복판에 섰다. 사진사의 요청에 모두 조용해졌을 때, 정주영에게서 두서너 사람 건너에 있던, 늘 재치 넘치는 한운사가 물었다. “정 회장님, 이게 무슨 만남입니까?” 정주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람과 돈의 만남이지요.” 그 자리에 있던 문인 백 명은 그 말을 다 들었다.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학을 하는 당신들은 사람이고, 경제를 다루는 자신은 돈이라는 비유였다. 어느 누가 이런 표현을 쉽게 할 수 있을까. 1984년 수필가 조경희는 예총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당선은 되었지만 사무실도 운영비도 없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경희는 무엇보다 회관을 마련해야 했고, 그러려면 이동하기 편하게 자동차가 있어야 했다. 자동차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려 문공부 장관에게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걱정에 싸여 있던 어느 날,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조경희가 받고 보니 정주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런데 정주영이 다짜고짜 “화이트, 화이트” 하는 게 아닌가. 흰색 자동차가 마음에 드느냐는 말이었다. 조경희도 “화이트, 네, 좋습니다”라며 크게 대답했다. 그간 자동차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털어놓은 푸념이 정주영의 귀에까지 들어가, 흔쾌히 차 한 대를 주겠다는 전화를 한 것이었다. 검은색 차가 주류이던 시절, 조경희는 흰색 스텔라를 몰고 다니며 백일점이 되었다. 그 차를 타고 다니며 애쓴 결과 마침내 동숭동에 예총회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첫댓글 사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만남이 한국 경제사를 새로 쓰는데 결정적인 고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