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물의 마음은 언제나 빛깔이 없다 찾아오는 빛과 그늘에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맑은 가슴으로도 흐린 가슴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앞을 보느라 외로움을 모르고 뒤돌아보지 않기에 그리움을 찾지 않는다 인간에게 다가가 문을 두드리지만 삶의 가슴마다 물결이 다르기에 누가 물으면 가끔은 흰색이고 조용히 흘러가서 백색이고 가만히 멈추어 서서 순은의 빛깔일 때 있지만 물의 가슴은 두 마음이 없으므로 뜨거운 물도 차가운 물도 저 고요한 창조의 첫 새벽은 언제나 침묵으로 붐빈다
28.아바노투바니Abanotubani 아바노투바니는 트빌리시의 유황온천 지대다 트빌리시는 ‘미지근한 물’의 뜻인데 아바노투바니는 ‘뜨거운 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하맘 유황온천 곧 ‘Hammam Sulphur’라 불렀다 미지근한 물속에 숨겨진 뜨거운 물 아바노투바니의 가슴은 항상 뜨겁지만 트빌리시의 가슴은 종종 뜨겁다 숨겨진 가슴은 무엇이나 뜨겁다 드러낸 가슴은 무엇이나 차갑다 눈에 담은 풍경은 곧 시들지만 몸에 담은 뜨거움은 오래 간다 트빌리시의 유황온천은 세상에 유명하다 오죽하면 대처의 이름이 ‘미지근한 물’이겠는가 하맘 유황온천을 처음으로 목격했을 때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은 감격해서 말했다 내 생에 트빌리시의 온천보다 더 황홀한 온천을 가본 적이 없다 하맘 유황온천 온천장 오르벨리아니 목욕탕Orbeliani Baths을 두고 후세가 저 위대한 시인의 말을 기리고자 기념패를 만들어 벽에 붙여놓았다
아마도 시인에게는 도시의 기억보다 물의 기억이 더 오래가리라 아바노투바니에는 전설이 있다 너무도 따뜻한 물이 전설을 만들어냈을까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바흐탕 고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이 쏜 화살에 맞은 어느 꿩이 공교롭게도 아바노투바니의 온천수 위에 떨어졌고 온천수는 한 마리 가여운 새에게 더할 나위없는 정화수가 되어 추락한 새의 상처를 씻어내어 생명의 물이 지닌 영험이 한 마리 미물의 목숨을 지켰기에 치유의 기적에 마음이 동한 왕은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수도를 옮겼으니 새 한 마리의 영험이 한 국가의 수도까지 옮기게 했다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입은 탓으로 하맘온천은 돔 형식의 지붕으로 만들어졌다 터키 양식을 띤 목욕탕의 지붕은 우아하다 그러나 제국의 영광처럼 번성하던 육십여 개에 이르렀다는 수많은 목욕탕이 지금은 그저 열 개 정도만 남았다 카프카스산맥 남쪽 기슭의 해발고도 500m의 구릉 쿠라 강이 이룩한 계곡에 위치하는 하맘온천 나는 따뜻한 물을 만나면 몸을 담그고 싶지만 우리 일정에는 따뜻한 물을 만날 인연이 모자랐기에 나는 저 영험스런 물에 몸을 담글 수 없었다
‘몬테크리스트백작’의 작가 알렉산더 듀마는 말했다 왜 우리들의 파리에는 트빌리시 같은 온천이 없는가 따뜻한 물은 누구에게나 함부로 주어지지 않는 걸까 카프카즈 산맥의 위용이 없이는 온천도 없는 걸까 외연히 솟은 설산의 장엄이 없이는 신성한 물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 걸까 하맘온천의 입구 물의 가슴에는 두 마음이 없다 흐린 물도 없고 맑은 물도 없다 청탁淸濁은 인간의 마음이다 물은 때로 가다가 멈추어 흐려지고 바다를 잃어버려 썩을 때가 있지만 물의 본성은 그대로 있다 ‘淸濁’은 인간의 분별일 뿐 탁한 물의 안쪽은 언제나 거울처럼 맑다 껍질을 벗기고 나면 물의 속살은 언제나 순결하다 나는 저 위대한 카프카즈의 속살에 한 번 닿아보고 싶었다 가서 물의 가슴에 손을 넣어 물의 빛과 그늘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우리 생에 선악이 왜 있는지 물의 가슴 저 아득한 밑바닥에 닿아보고 싶었다 (이어짐)